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선봉에 섰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타계했다. 1997년 11월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스스로 ‘자신의 책임’이라던 국가부도사태(IMF 구제금융신청)와 1990년 3당 합당과 지역주의에 기댄 정치권력 획득과정의 문제 등으로 인해 생전은 물론 사후에도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것은 모든 정치인과 정치지도자들의 숙명이기도 하다.

일요일이던 22일 김영삼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국내 언론사들은 앞 다투어 그의 파란만장했던 정치역정과 인생을 집중 조명하기 시작했다. 고인과 후손들의 입장에서는 이제야 역사적으로 정당한 평가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과 언론이 대체로 죽은 사람에게는 관대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의외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대부분 찬양 일색이다.

이것은 아마도 2009년 타계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이 반독재 투쟁의 중심이 되어 박정희 유신독재정권과 싸워 되찾은 민주주의와 헌정질서가 아버지를 이어 받은 딸에 의해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동시에 여야를 떠나, 한국 현대 정치사의 두 거목(巨木)이 남긴 ‘리더십 공백’을 후배 정치인들이 제대로 메우지 못하거나, 그들의 공과(功過)를 발전적으로 계승하지 못하고 소인배 같은 정치행태를 보이는 것과 관련 있어 보인다.  

이제 동년배 중에서 남은 정치인은 김종필 전 국무총리와 이철승 전 신민당 최고위원 뿐이다. 김종필은 처삼촌 박정희 통치 18년 동안의 ‘만년 2인자’ 역할로도 모자라, 자신과 정치적 노선을 달리했던 김영삼, 김대중과 차례로 손잡아 그들을 권좌에 앉힌 후 ‘2인자 위치’를 평생 누린바 있고, 지금 중앙일보에 ‘증언록’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정치행적을 미화하거나 역사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그려내고 있다.

반독재 권력투쟁의 화신

앞에서 지적한 정치인 김영삼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가 박정희 유신철권통치(18년)와 박정희의 ‘정치적 양아들’인 전두환‧노태우 신군부 정권(12년) 등 사실상의 군정 30년을 끝내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1993-1998)하는 동안 육사 출신 군인들의 사조직인 하나회 해체, 금융실명제 실시, 공직자 재산 등록, 전두환‧노태우 등이 일으킨 군사반란의 단죄 등은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는 한마디로 우리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여론의 중심’에 서 있었던 사람이다.  1954년 만 26세에 최연소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최연소 원내총무, 최다선(9선) 국회의원과 최다선 야당 총재 등 숱한 기록을 갖고 있다. 김영삼은 ‘권력 투쟁의 화신’이었다.

김영삼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여론의 중심’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정치인이었다. 두고두고 논란과 비판이 되고 있는 1990년 3당 합당 결정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열린 신민당 대선후보 선출 전당대회(1970년 9월29일)에서 ‘영원한 동지이자 맞수’인 김대중에게 역전패 당한 바 있는 김영삼은 1988년 4월 총선에서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에 의석수에서 밀려 제2야당 총재로 밀려나자, 이를 견딜 수 없었던지 노태우의 민정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합당을 단행하게 된다.

이로써 한 때 민주화의 성지로 불렸던 부산과 마산 등 이른바 PK(부산‧경남)지역이 지독한 지역주의의 포로가 되어 ‘만년 여당의 아성’으로 전락했다. 지역주의의 씨앗은 박정희가 뿌렸지만, 김영삼은 그것을 치유하지 못하고, 오히려 지역주의 낙인을 깊게 아로새겼다. 그가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멍에다.

어찌됐건 김영삼은 정치역정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간 사람’이다.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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