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김영삼 정부는 “그 어느 때보다 언론자유가 구가되고 있다”고 장담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언론의 권력비판 보도는 군사정부시기보다 분명 활발했다. 문민정부에서 매체비평지 미디어오늘이 창간(1995)하고 본격적인 언론모니터가 시작되며 언론개혁운동의 토양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문민정부에서도 언론통제는 버젓이 이뤄졌다. 정부권력은 언론권력과 유착했다. 국가안전기획부는 언론을 관리했고, 언론은 정부발표를 받아쓰며 신공안정국을 연출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당시 안기부 내 대언론 담당부서 폐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미디어오늘은 창간호에서 안기부 언론 담당부서가 존속되고 있다며 언론사 출입 안기부 요원 13명의 명단을 폭로했다. 이들은 해당 언론사 언론인의 신상을 파악하고 노조활동과 관련된 정보를 수집했다. 대구 가스폭발 참사 때는 방송사에 현장 참상을 축소하고 수습에 중점을 두도록 보도조정을 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김영삼 대통령에겐 집권 초기만 해도 언론개혁안이 있었다. 미디어오늘은 1997년 문민정부 언론개혁안을 설계했던 동숭동팀 문건을 보도한 바 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문민정부는 △신문사에 일정 발행부수까지는 면세혜택, 초과부수엔 인지세 부과 △공영방송 수신료 폐지, 각 방송사에 전파사용료 부과해 KBS 재원으로 활용 △방송위 방송기준을 어긴 방송사 전파사용료를 상향조정 등의 안을 갖고 있었다. KBS 1TV와 EBS 통합, KBS 2TV · MBC · 서울신문 민영화, 언론중재위원회 권한 강화, 한국방송광고공사(코바코) 해체도 개혁안에 담겨있었다. 

   
▲ 1993년 2월 26일자 동아일보 1면.
 

개혁안이 과연 올바른 방향이냐를 논의할 새도 없이, 이 개혁안은 실종됐다. 동숭동팀을 이끌던 전병민씨가 청와대 정책수석으로 내정됐다가 인척 문제로 실각하며 동숭동팀 개혁안은 ‘폐품’처리 됐다. 전병민씨의 실각이 안기부의 작품이란 이야기도 떠돌았다. 당시 동숭동팀은 ‘신문전쟁’ 시기를 겪었던 1990년대 한국 언론을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있었다. 

“언론사의 양적 팽창은 일부 언론에 의한 여론의 독점현상을 가져올 수 있을 것임. 즉 언론의 협조를 얻지 않고서는 정부의 입장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으며 정치권조차도 정치적 결단과 관련하여 운신의 폭이 매우 좁아질 것으로 예상됨. 이 같은 상황에서 우리 언론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보다 영향력 있는 언론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 노력은 신문지면의 개선 등을 통한 노력보다는 판매부수 확장과 같은 노력이어서 언론사의 양적 경쟁이 보다 치열해짐. 따라서 부수확장을 위한 소모적인 언론사간의 경쟁에 국민과 정부가 피해를 볼 수 있음.” 

언론에 대한 진단은 정확했다. 그러나 제도적인 언론개혁은 이뤄지지 않았다. 대신 김 대통령은 언론사 사주와 경영진의 비리를 포착하고 언론사 세무조사에 나선 뒤 공개하지 않았다.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는 1995년 9월 당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현 정권은 언론사를 세무조사 해 놓고 목을 죄고 있다. 청와대가 직접 나서서 언론사에 압력도 넣고 때로는 간청도 하면서 간섭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YS는 퇴임 이후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언론사의 장래를 위해 세무조사 결과를 공개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 1998년 2월 퇴임후 청와대를 나오는 김영삼 전 대통령. ⓒ포커스통신
 

문민정부는 안기부를 이용해 언론을 통제했다. 안기부는 북한 주민의 일상생활 모습을 담은 화면을 통제했다. 방송사가 외신을 통해 수집한 자료도 특수 자료로 분류해 안기부장의 승인을 받도록 했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참사 당시에는 안기부 주도로 ‘전쟁영웅’ 조창호씨의 북한 탈출·귀환 발표가 언론에 대서특필되며 참사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을 돌렸다.

안기부는 1995년 지방자치선거와 관련해 천리안, 하이텔 등 컴퓨터 통신 게시판에 특정인에 대한 공격 등 문제 있는 글이 많다며 삭제를 강화해달라고 당시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실무진에게 압력을 넣기도 했다. 안기부는 방송뉴스 시간에 방송사 직원 실수로 인공기가 방영되자 담당직원의 인사자료를 요구해 유출해가기도 했다. 1997년에는 안기부가 한겨레의 광고수주를 방해하고 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김영삼 대통령의 감정적 대응도 도마에 올랐다. 부인 손명순 여사가 1992년 말 대선 직후 백화점에서 8천만 원을 소매치기 당했다는 동아일보 보도가 나가자 김 대통령은 형사고발에 이어 유엔 방문 수행취재단에서 동아일보를 전격 제외시켜 감정적 보복조치라는 비판을 받았다. 1996년 MBC가 신임 청와대 비서실장과 안기부장에 이원종 정무수석과 김기춘 의원 등이 기용될 것이라 보도하자 김 대통령은 이득렬 MBC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국가를 혼란스럽게 하려는 보도”라며 호통을 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MBC노조는 “청와대의 초법적이며 비민주적인 압력 행사”라고 강력 비판했다.

   
▲ 1994년 5월21일자 언론노보.
 

이원종 청와대 정무수석의 경우 김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가 1996년 말 장애인 출신 국회의원 이성재씨의 신체장애 사실을 비하한 통화내용을 보도하지 말아달라고 언론사 편집국장과 보도국장에게 요구한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이원종 정무수석은 지자체 선거 및 삼풍백화점 참사 관련 방송보도와 관련, 지상파3사 사장을 불러 강하게 불만을 표시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한겨레가 “1992년 대선 때 한약업사로부터 김현철씨가 정치자금을 받은 의혹이 있다”고 보도하자 김씨가 한겨레를 상대로 제기한 20억 원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도 재판부 외압논란과 언론자유 침해 논란이 빚어졌다. 1996년 서울민사지법은 1심에서 한겨레에 4억 원의 배상 판결과 1면 머리기사 정정보도문 게재 판결을 내리는 한편 언론사 입증책임을 강조하는 판결을 내렸다. 

경찰은 시위현장을 취재하던 중앙일보 등 사진기자 4명을 집단폭행하기도 했다. 검찰은 ‘청와대 북한 밀가루 제공설’을 보도한 시사저널 이교관 기자를 긴급 구속해 24시간 동안 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문민정부는 보도직전 기사삭제 압력을 가했으며 이미 인쇄된 잡지를 전량 폐기처분하게 한 뒤 일부가 배포됐다는 이유로 편집국 간부와 취재기자를 사법처리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 언론은 한총련 연대사태 보도, 15대 총선보도, 북한 잠수함 사건 보도 등에서 정부입장에 편향된 왜곡 보도를 이어갔다. 

   
▲ 지난23일 국회에 마련된 고 김영삼 전 대통령 분향소의 모습. ⓒ이치열 기자
 

김영삼 대통령은 1980년 언론 통폐합과 언론인 강제해직의 주역인 권정달 전 보안사 정보처장, 허문도 전 국보위 문공분과 위원, 이상재 언론대책반장 등을 사법처리 대상에서 제외하기도 했다. 당시 12‧12 및 5‧18 사건 특별수사본부는 “언론 통폐합 조치와 언론인 숙청 작업이 신군부측의 다단계 집권계획의 일환으로 입안돼 추진된 것으로 결론 냈으나 이 작업을 주도한 허문도씨 등은 구속 기소 대상에서 제외했다. 

추혜선 정의당 언론개혁기획단장은 “김영삼정부는 언론모니터 활동이 시작되고 언론운동단체들이 전문성을 갖게 된 시기였다. 군사정권을 벗어나며 언론보도에 대한 비평이 활발해지고 언론은 제도적 통제에서 벗어났다”고 전하면서도 “그러나 언론환경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고 실질적인 언론통제는 계속됐다. 김영삼 대통령은 언론을 적당히 활용하고 구슬렸다”고 지적했다. 

김영삼 정부시절 한국기자협회장을 역임한 김주언 전 KBS이사는 “노태우 정부까지 이어지던 언론통제는 YS때부터 조금 달라졌으나 YS정부는 언론개혁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신문사 세무조사에 나섰지만 발표는 못했다. 언론과 유화적 관계였던 YS는 언론과 크게 대립각을 세우지 않았고, 이런 가운데 언론의 권력화 현상은 두드러졌다”고 지적했다. 

1997년 한보그룹 부도사태를 계기로 김영삼 대통령은 언론으로부터 버림받는다. 김 대통령은 집권 초기 언론사 세무조사를 실시해 결과를 각 언론사에 통보했으나 레임덕이 오며 ‘약발’이 먹히지 않게 됐다. 문민정부는 군부의 언론통제가 사라진 시기로, 언론권력이 정치권력을 압도하는 시기였다. 이는 동숭동팀이 진단한 내용과 같다. 

김주언 전 이사는 “1990년대 언론계에선 신문 사주 몇 명이 모여 대통령을 뽑는 식이라는 비판도 나왔다”며 “김영삼 정부에서 비대해진 언론권력으로 인해 (국민의 정부에서) 언론개혁 움직임이 나왔다”고 전했다. 1997년 대선 직전 중앙일보 정치부에서 작성한 ‘이회창 경선전략의 문제점과 개선방향’ 내부문건이 언론계에 알려지며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문민정부는 1994년 수신료를 준조세로 바꿨고 KBS 1TV 광고방송을 폐지했다. 수혜는 지상파3사 모두에게 돌아갔다. 1995년에는 부산방송, 대구방송, 광주방송, 대전방송 등 지역민방과 케이블방송을 설립했다. 방송정책의 경우 노태우정부가 1990년 세웠던 ‘21세기 대비 방송구조 개혁안’을 따라간 것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있다. 신문부수공사(ABC제도)가 문민정부에서 시작됐으나 “공사실시로 진정한 권위지가 가려질 것”이라던 초대 조용중 회장의 말은 공염불이 됐다. 

물론 문민정부에선 △언론기본법 폐지 △신문사 설립요건 완화 △보도지침·홍보조정실 폐지와 같은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1974년 동아투위를 비롯한 언론인 해직과 1980년 언론 통폐합 사태는 청산하지 못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언론정책은 어찌 보면 “그 어느 때보다 언론자유가 구가되고 있다”는 자신감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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