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그의 공과(功過)가 재평가되고 있다. 

대표적인 김 전 대통령의 과(過)는 3당합당이 꼽힌다. 한국정치의 퇴행을 가져왔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민주세력을 배신하고 권력욕에 눈이 멀어 ‘3당야합’을 했고 3김정치로 지역주의를 고착화시켰다는 것이다. 

지난 2009년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현 충남도지사)은 "3당야합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를 결정적으로 왜곡하고 망가뜨린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님의 역사적 범죄"라고 혹독히 비판한 바 있다. 그는 "저는 당시 통일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의 비서관으로 재직하다가 사표를 내고 실직자의 길을 선택했다"면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정책과 노선은 필요 없고 지역당에 줄서는 일만이 유일한 선거운동이 됐다. 3당야합은 군사 쿠데타 못지 않은 나쁜 일"이라고 질타했다.

경제 문제로 보면 IMF사태가 있다. 김 전 대통령은 망국의 주범이라는 평가까지 받았다. 지난 1998년 문화일보는 문민정부에 대해 <실패한 집권 5년 5가지 이유>라는 기사에서 "국정경험이 부족하고 검증되지 않은 인사들이 상당수 기용돼 임기말 위기의 원인을 제공했다"며 "국민소득 1만달러 시대, 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 등을 중심축으로 하는 과시적인 경제정책을 입안한 초기 경제책임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한보사태, 기아부도, 외환위기를 방치한 후기 경제각료들도 실패를 부채질했다"고 지적했다.

한보비리 사태 때 아들 김현철씨가 거액의 대출 특혜에 연루된 것으로 드러난 것도 김 전 대통령의 대표적인 과오로 꼽힌다. 김현철씨는 사실상 비선 조직을 움직이는 실세로 통하면서 국정문란을 가져왔다는 비판을 받았다.

김현철씨의 국정개입은 어느 정도였는지는 당시 언론보도에 잘 나와 있다. 1997년 2월 한국일보는 사설에서 "대통령 차남 현철씨의 비리혐의는 단순한 인척정치 해악의 수준을 넘어 총체적 조직적 국정문란 사태로까지 확사되고 있다"면서 "현철씨가 지난 대선과정에서부터 가동된 비선조직을 김영삼 정부 출범 후에도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청와대 안기부 군 등의 인사 정책 등 국정전반을 간섭하고 재계와 금융계 국공립기관 언론계 등에 인맥을 심어놓고 활용했고 정권 재창출마저 기도하는 등 지난 4년간 사실상 국정을 주도해왔다 할 정도로 가공할 만한 혐의 전반을 빠짐없이 망라해야할 것"이라며 강도높은 수사를 요구했다.

문화일보는 1998년 2월 16일 "(김현철씨를 중심으로한 사조직은)인사나 개혁 정책 등을 닥치는대로 입안, 가족모임 등을 통해 김 대통령에게 비공식적으로 보고하는 형식이었다. 요직인사의 인선에서부터 심지어 국가대표 구기팀 감독의 선정에까지 주먹구구식으로 관여했다"고 보도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정권 말기 IMF사태, 아들 비리연루 혐의, 노동법개악 날치기 등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지만 정권 초기만해도 상당한 반향을 일으킬 정도의 사회 개혁을 단행하면서 국민들로부터 환호를 받았다.

김 전 대통령은 개혁을 국정의 핵심 축으로 세워 '세계화'에 편입하려고 했고, 걸림돌로 군사정권의 유산을 지목하고 이와 결별해야 한다고 봤다. 

경제정의를 바로 세우고, 부정부패를 척결해야 한다는 국정 기조가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공직자 재산공개는 김 전 대통령 추진한 사회 개혁의 첫 단추와 같았다. 1994년 말까지 1750명이 재산을 공개해 무려 242명의 정치인과 공직자가 자진사퇴했다. 율곡사업에 대한 특별감사를 진행했고 군장비 도입 과정에서 무기거래업자로부터 뇌물을 받은 전직 장관과 군고위인사들이 사법처리됐다.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과 카지노업계 비리 수사는 정경유착의 고리를 밝히는 계기가 됐다.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도 김 전 대통령의 대표적인 공으로 평가된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의 역사 바로세우기는 문민정부의 기틀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의 공과에 대한 논란이 많지만 역사 바로세우기만큼은 큰 논쟁의 여지가 없다.

우선, 바로 이전 정권의 핵심세력이었던 하나회를 해체한 건 군사정권과 문민정부를 구별지으려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에 따른 조치로 해석됐다.

그리고 이어 전두환-노태우를 법정에 세운 것도 김 전 대통령의 공으로 평가하는데 이견의 여지가 없다. 정세균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역사 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전두환, 노태우, 군부 독재 단죄, 조선총독부 철거는 큰 업적이라고 생각한다"고 했고, 같은당 원혜영 의언도 "고인께서는 12. 12 군사반란의 주역들을 엄중히 단죄하여 역사를 바로잡았고 하나회를 척결하여 정치군인들의 만동을 근절"했다고 평가했다.

동아일보는 1996년 12월 칼럼에서 "12. 12는 패악한 군사반란으로, 5. 17과 5. 18은 국헌을 문란케 한 내란으로 재확인됐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힘의 논리가 쿠데타는 성공하건 실패하건 반드시 처벌받는다는 정의의 논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 썼다. 다만, 5. 18 특별법을 제정하고 전두환과 노태우 전 대통령을 구속시켰지만 5.18 관계자 대부분이 사면 및 복권 또는 석방되면서 색이 바랐다. 

   
▲ 미디어오늘 자료사진.
 

역사바로세우기 일환으로 근현대사 사건에 대한 재평가도 이뤄졌다. 좌우 논쟁을 가져왔지만 군사정권의 청산이라는 대의를 거스를 순 없었다.

김 전 대통령은 4. 19를 혁명으로 규정했고 당초 4. 19의거로 기술됐던 것을 4. 19 혁명으로 변경해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반영시켰다. 5. 16 군사혁명도 5. 16 군사정변으로 바꾸었다.

근현대사 역사적 재평가 작업은 국정교과서를 검인정체제로 변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1997년 12월 고시된 제7차 교육과정에 따라 필수과목인 국사 교과서는 국정으로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는 검정으로 하는 이원체제를 도입했다. 이원체제 역시 교과서 준거안이 정해져 있어 국정체제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평가도 받았지만 당시 근현대사 검정 교과서를 국정으로 바꾸라는 보수세력의 강력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도입했다는 점을 높이 사야 한다는 반론도 있다.

김 전 대통령이 1993년 7월 24일 국사편찬위원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하면서 한 말은 김 전 대통령의 역사관은 물론 교육을 중요시 하는 철학을 엿볼 수 있다. 

당시 김정배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은 이 자리에서 "유신 때 국사책을 한군데서 만드는 국정교과서로 정해 사고의 경직성과 획일화가 빚어지고 국수주의적 사고를 낳는 등 폐단이 많았다. 다양한 역사관을 키우고 학계가 공동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역사교과서를 검인정교과서로 바꿨으면 한다"고 말했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박근혜 정부의 국정교과서 추진 선봉에 서 있는 것과 비교하면 180도 입장이 바뀐 것이다.

이 같은 발언에 김 전 대통령은 "문민정부는 이 땅에 민주공화정을 처음으로 연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다"며 "나는 역사로부터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워왔다. 역사는 우여와 곡절이 있지만 마땅히 흘러야 할 방향으로 흐른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해방 이후 주요한 역사적 사건들, 5. 16, 10월 유신, 12. 12, 광주민주화운동 등에 대해 나름대로 새정부는 정치적 평가를 내린 바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국사편찬위 같은데서 충분한 토론을 거쳐 역사적 평가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역사에 대한 평가 작업은 역사계에서 할 일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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