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일이다. 2015년 우리 사회는 점점 어두워지고 있고 출구마저 쉽게 보이지 않는데, 영화는 자꾸만 밝은 결말을 이야기한다. 이 괴리 현상. 이것이 유독 이상한 것은 그런 결말이 엄청난 흥행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암살’은 우리의 숙제인 친일파 문제를 정면에서 거론했고 환상으로라도 반민특위를 살려 그들을 단죄해야 한다고 말했다. ‘베테랑’은 정치와 법 위에 군림하는 악덕 재벌의 실상을 스크린에 재현하면서 그들을 어떻게든 단죄했다. 2015년에 두 영화가 천만 관객을 넘긴 것은 우연일까?

그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내부자들’이 증명했다. ‘내부자들’은 앞의 두 편보다 더 현실적이다. 재벌과 정치, 언론과 검찰, 깡패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 내부의 더러운 관계를 폭로한다. 영화에 나타난 서열을 정리하면, 재벌이 모든 것 위에 위치하고, 정치와 언론은 공생 관계를 맺으며 재벌의 뒤를 받쳐준다. 검찰은 재벌과 언론의 눈치를 보며 자신의 안위를 찾고, 깡패는 재벌 자체에도 존재하고 언론과 정치에도 존재한다. 이런 먹이사슬 속에 대한민국은 존재한다고 ‘내부자들’은 말한다.

가장 눈여겨 볼 것은 재벌이 먹이사슬의 가장 위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정치보다 상위에 존재하는 존재. 이런 현실을 우리는 지금 부정할 수 없다. 정권은 5년마다 바뀌지만 재벌은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 ‘베테랑’이 그들의 악행을 이야기한 것도 이 때문 아니겠는가? 스폰서라는 이름으로 정치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광고라는 권력으로 언론도 손아귀에 넣었다. 정치와 언론의 하수인이 된 검찰은 당연히 재벌의 지배 아래 들어간다.    

   
▲ 영화 ‘내부자들’ 포스터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언론과 정치의 관계이다. 조국일보 논설주간인 이강희는 여론을 움직이는 ‘파워 엘리트’면서 정치와 재벌의 뒷거래의 판을 짜고 언론을 통해 그것을 밀어 부친다. 그가 자신의 친구인 장필우를 추천한 것은 그와 학맥이 통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의 고질적인 병폐인 인맥과도 만나게 된다. 빽 없고 족보 없어 매번 승진에서 누락되는 우장훈 검사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깡패인 안상구는 이런 관계 사이에서 그들의 ‘똥을 닦아주며’ 자신의 ‘나와바리’를 넓혀갔지만, 어느 순간 선을 넘으면서 응징을 당했다. 그런 안상구가 우장훈과 함께, 삼각동맹에게 법의 이름으로 복수하려 한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 재벌이 언론이고 언론이 재벌이며(‘족벌언론’이자 ‘재벌 + 언론’), 정치와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이복형제들인데, 이들과 맞서 어떻게 여론을 만들고 무슨 수로 (정치의 하수인인) 검찰을 동원하며 무엇으로 정치력을 발휘해 싸울 수 있을까?

이렇게 적고 나니 문득 고 노무현 대통령이 떠오른다. 검찰이 기소사실을 슬쩍 흘리면 언론이 받아쓰고, 여당이 이를 비판하면 다시 언론이 확장해 마치 팩트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다시 검찰은 추가 의혹을 이야기하고 언론은 강한 수사를 촉구하고 여당은 ‘한 점 의혹 없는 수사’, ‘성역 없는 수사’를 주장했다. 결국 재판을 받기도 전에 이미 노무현은 ‘죽은 노무현’이 되었고, 그런 자신과 야권을 살리기 위해 그는 정말 죽음의 길을 걸었다. 언론과 정치, 정치의 손발이 된 검찰이 만들어낸 삼각동맹이 이렇게 무서운데, 재벌까지 결합한 동맹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가?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힘을 지닌 괴물이다. 

신기하게도 ‘내부자들’에서 이 시도가 처음에는 실패하지만, 기어이 성공하고 마는데, (단순하게 보면) 결말은 ‘암살’, ‘배테랑’과 같다. 이때 우리는 이런 결말에 기뻐해야 하는가, 분노해야 하는가? 전자라면 영화적 내러티브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고, 후자라면 현실에 대한 감정적 반영이 지나치게 강하게 드러난 것이다.  

   
▲ 영화 ‘내부자들’ 스틸컷
 

다시 현실로 돌아가자. 왜 우리는 이런 판타지적 승리를 스크린에서만 보고 있는 것일까? 환상을 현실이 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현실은 갈수록 어두워지고 있다. 거리의 집회는 봉쇄되거나 강력 진압되고, 시위대가 다쳐도 과격시위 때문이라고 당연시된다. 국정 교과서를 통해 하나의 시각만 주입하려는 움직임도 여전히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다. 서민의 삶은 점점 팍팍해지고, 노동법은 개악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게다가 집권당은 내년 총선에서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이야기하며 희희낙락하는데, 야당은 존재 자체도 불투명하고 정체성은 더욱 희미하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질문을 바꾸어 보자. 영화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일까? 영화는 영화 자체로는 아무런 이데올로기가 없다. 단지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그러나 순수한 영화에 어떤 이데올로기가 들어가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 사회의 욕망이 영화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지금 우리 사회는 점점 어두워지고 있고, 그 원인도 정치와 재벌, 언론의 문제라고 영화는 정확하게 이야기한다. 정치는 친일 문제와 관련이 깊고, 경제는 재벌 횡포와 불가분의 관계이며, 언론은 두 집단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기생해 판을 짜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화는 사회의 반영이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이 검찰과 경찰이다. ‘베테랑’의 경찰은 재벌의 온갖 회유와 폭력에 맞서 결국 악행을 처단하고, ‘내부자들’의 검사는 재벌과 언론, 정치의 삼각편대 악행을 처단한다. 지독하리만치 현실적이다가, ‘베테랑’의 경찰과 <내부자들>의 검사에서만 만나게 되는 비현실적 존재, ( 때문에 발생하는 필연적인) 괴리. 그럼에도 여전히 두 분야에 희망이 있다고 영화는 이야기한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이런 경찰과 검사를 기다리는 것인가? 그런데 문득 채동욱과 권은희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그들은 과연 올 수 있는가?

   
▲ 영화 ‘내부자들’ 스틸컷
 

이렇게 이야기하자. 영화는 현실을 파악하고 있고, 문제점도 제대로 지적하고 있다. 게다가 이토록 어두운 사회에 환상이라는 형식이지만 희망을 준다. 비록 그 희망이 현실과 다르더라도 그것을 통해 다시 현실을 돌아보라고 한다. 나는 세 영화를 이렇게 해석하고 싶다. 그래서 마지막 바람이 더 간절하다. 정말이지 이제는 현실에서 영화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싶다. 영화가 선사하는 판타지는 쉽게 지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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