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과 ‘노동’은 북한말인가. 대한민국의 주적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집권당인 조선‘노동’당에서 이 두 단어를 점령한 이후 한국사회에서 이 단어는 금기에 가까운 말이 됐다. 동시에 인민과 노동이란 단어가 품고 있던 가치도 사라지게 됐다. 하나의 언어는 하나의 삶의 형식이 되기 때문이다. 

‘인민(people)’은 국가를 전제로 하지 않는 인간, 피지배층 일반을 가리키는 말이다. 인민이라는 단어를 북한에서 사용하자 대한민국 헌법 방향이 틀어졌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민은 국가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존재이며, 국민의 지위를 얻지 못한 다른 사람들의 인권은 고려되지 못할 수 있다.

국가가 먼저고 국민이 나중이면, 헌법은 국가의 의무가 아닌 국민의 의무를 강조하게 된다. 대한민국 헌법 제2장(국민의 권리와 의무)에는 국민의 권리가 추상적으로 규정돼 있고 동시에 국민의 의무가 규정돼 있다. 근로를 해 세금을 내고 국방의 의무를 져야한다. 헌법이 피지배층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만든 것이지만 대한민국 헌법에는 국민의 의무라는 께름칙한 조항들이 존재한다. 

스위스 연방헌법 1조는 “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고 나라의 안전과 독립을 수호한다”로 시작한다. 국민이 아닌 인민을 헌법의 주체로 규정한 헌법은 자연스럽게 국가의 의무를 규정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어지는 스위스 연방헌법의 내용은 국가가 복지와 지속가능한 발전, 내적 유대와 문화적 다양성을 증진시키고 동등한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 지난 20일 조선일보 사설.
 

조선일보는 지난 20일 사설에서 전교조 위원장이 인민이라는 단어를 언급했다며 색깔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당시 위원장은 ‘인민’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고, ‘빈민’이라고 말한 것으로 밝혀졌고 조선일보는 온라인에서 해당 기사를 내리며 사과한 뒤 21일 이를 정정했다.

근거 없이 색깔론 공격을 한 것과 별개의 의문이 생긴다. ‘인민’을 내뱉으면 안 되는가? 인민을 언급하는 사람들의 어떤 점이 두려운 걸까? 설마 인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북한 주체사상에 취해서 북한 김정은 체제를 지지하는 독재찬양론자로 변할 것 같아서는 아닐 것이다. 국가 이전에 존중받아야 할 인간이 있고, 국가는 그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닐까? 

   
▲ 사진=pixabay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노동’당에게 뺏긴 또 다른 단어는 ‘노동’이다. ‘인민’이 국민이 될 때 ‘노동’은 근로가 됐다. 노동은 노동력을 제공하고 돈을 받는 행위이고 노동자는 일해서 먹고사는 사람이다. 하지만 근로의 의미는 살짝 다르다. 부지런할 근(勤)과 일할 노(勞)가 만나 부지런히 일한다는 의미를 갖게 된다. 

노동자는 자본가와 대등한 입장에서 헌법에 보장된 다양한 노동권을 보장받아 노동조합도 만들고 권리도 주장하는 주체다. 그러나 근로자는 ‘부지런히 일해야 하는 존재’로 근로자에게 돌아오는 혜택은 국가나 자본가가 시혜적으로 ‘열심히 일했으니 혜택을 주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혜택이 없을 수도 있다. 헌법상 노동권이 현실에서 쉽게 외면당하는 이유다.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는 각종 강연이나 인터뷰를 통해 “노동자, 노동조합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나쁜 국가를 찾기가 힘들며,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다”고 말했다. 노동자가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을 방해하는 진짜 이유가 조선노동당이 집권하고 있는 북한의 3대 세습을 찬양할까 두려워서일까?

노동을 근로로 바꾼 이유는 노동자들이 주체의식을 가지고 노동조합을 만들어 국가나 자본가에게 ‘법 지켜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이라는 점에 더 가깝다. 그래서 노동복지공단이 아닌 근로복지공단, 노동절이 아닌 근로자의 날이 됐다. 심지어 이명박 정부는 실업해결문제를 더 강조하며 노동부 명칭 앞에 ‘고용’이라는 단어를 붙였다. 실업해결의 주체는 물론 정부다.  

   
▲ 노동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 평택비정규노동센터
 

지난 2013년 경기도 평택비정규노동센터에서 평택지역 학생들을 대상으로 ‘노동자’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결과 대부분 학생들은 노동자에 대해 ‘거지’, ‘장애인’, ‘못 배운 자들’ 등의 부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하종강 교수는 노동강연에 가서 “독일에서는 차관도 노조에 가입하며, 헐리우드 배우나 박사들이 연구하는 연구소에도 노조가 있다”고 강조해줘야만 한다. 

이번에 조선일보는 ‘빈민’을 ‘인민’으로 잘못 표기한 ‘사실오류’에 대해서만 사과했을 뿐이지 앞으로 ‘인민’과 ‘노동’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색깔론을 펼치지 않겠다고 혹은 색깔론이 얼마나 악용돼 왔는지에 대해서 사과하지 않았다. 여전히 대한민국은 ‘인민’과 ‘노동’이라는 아름다운 말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게 된다. 

1960년 10월 시인 김수영은 시 <김일성만세>를 썼지만 발표하지 못했다. “‘김일성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대한민국에 사실 자유가 없다는 것을 멋지게 보여준 시다. 

2015년 대한민국은 아직 여기서 벗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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