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재개봉영화로 개봉당시보다 관객을 더 모아서 크게 화제가 된 영화 ‘이터널 선샤인’(2004)에서 남자주인공(짐 캐리)은 며칠 전 싸운 여자 친구(케이트 윈슬렛)를 찾아간다. 하지만 여자 친구는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여자 친구가 장난을 칠 일은 없고 쌍둥이 동생이나 언니인가 아니면, 아직 깨어나지 꿈일까. 알고 봤더니 여자 친구는 라쿠나 클리닉을 받았기 때문에 그를 기억 못했다. 영화에서 라쿠나 클리닉은 뇌의 기억을 제거하는 시술을 말했다. 손상이라는 뜻의 라쿠나가 이렇게 좋은 뜻으로 사용될 수도 있었다. 기억의 제거 사실을 안 남자주인공도 홧김에 여자 친구에 관한 기억을 지워 버린다. 그러나 기억을 지워도 겉으로는 없어져도 그 기억들이 그대로 사라질 리 없었다. 기억을 관통하는 본질은 더욱 또렷해질 뿐이다.

당시에는 낯선 것이었는지 몰라도 이런 기억제거는 허황된 일이 아니다. 몇 년 전 MIT연구진은 기억을 지울 수 있는 ‘Tet1’유전자를 발견해 특정 기억을 지울 수 있는 기술에 한층 다가가기도 했다. 존스 홉킨스 의대연구팀은 아픈 기억을 지울 수 있는 단백질 수용체를 발견하기도 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연구진도 특정유전자와 전기적 신호가 기억제거에 관여한다는 사실을 밝히기도 했다. 특정 신호를 전달하는 도구의 개발로 기억의 제거가 가능하다는 이론이 성립하는 것이다. 포스텍연구팀은 공포기억을 제어하는 원리도 규명했다. 이런 연구들은 기억 제거가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점을 짐작하게 한다. 물론 영화 ‘맨인블랙’처럼 간단하게 기억을 조치하는 날은 아주 먼 미래일 것이다.

   
▲ 영화 ‘이터널 선샤인’ 스틸컷
 

그러나 이미 사람들의 기억을 제거해주는 일은 대중문화 특히 텔레비전에서 시술한지 오래되었다. 텔레비전은 기억의 제거와 재조합으로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을만한 기억을 선택적으로 구성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드라마, 예능, 다큐 등등에 등장하는 과거는 진실인 듯 부각되지만 그것은 선택적으로 재조합된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과거에 대한 아픈 기억이나 고통스러운 장면들은 삭제된다. 너무나 식상한 말이 되어 버렸듯, 과거는 모두 아름다울 뿐이다. 아니 과거의 상처나 아픔도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항상 해피엔딩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은 지금보다 더 편안하고 평화로우며 안정적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과거를 마주하고 싶고, 현실에서 겪는 어려움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어 하기 때문이겠다. 인간의 운명이기도 하다. 한 가지를 얻으면 대개 한 가지를 잃는 경우가 많다. 과거보다 나아진 점은 결국 과거의 좋은 점을 교환하여 얻는 경우가 많다. 그 모든 것을 갖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이지만 쉽게 되지는 않으니 다만 추억할 뿐이다. 아직은 개개인의 나쁘고 부정적인 기억을 모두 지울 수 있는 테크놀로지는 출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대신 아직도 대중문화 특히 텔레비전이 그 역할을 톡톡하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만들어진 기억의 대표적인 장르는 드라마다. ‘응답하라’는 그 선두 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어 보인다. 최근에는 1997, 1994에 이어 1988편을 방영하고 있다. 앞서 두 편이 90년대를 담아내고 있다면 이번 편은 1988년을 보여주어 약간의 놀라움을 전해주기도 했다. 복고의 흐름상 과거에서 현재로 가까워지는 것이 통례인데 오히려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갔기 때문이다. 어쩌면 2000년대로 돌아오기 위해 한 템포 쉬고 있는지 모른다. 다만, 이는 40대의 시청자들을 겨냥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소 덜 주목을 받을 우려가 있었다. 이 때문인지 주요 컨셉을 고등학생과 가족에 중심에 두고 있다. 여기에 교복도 자율화와 비자율화를 혼재시키고 있다. 하지만 그 시대의 생활은 지금의 20-30대 삶과는 분리되기 알맞다. 이런 지적이야 늘 상 있는 것인데 걸리는 점은 몇 가지 더 있다.

응사 시리즈는 주로 사물과 대상을 중심으로 서사를 전개해왔다. 항상 그 시대에 사람들이 사용했던 물건이나 대상물을 등장시켜 시각적인 효과를 꾀해왔다. 대중문화를 넘어서서 소비주의의 차원에서 물건의 구매가 없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한국사회가 그만큼 상품의 소비구조와 그에 따른 라이프 스타일의 구성이 의존관계에 있음을 반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추억의 고고학적 발굴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발굴 유물들은 거의 전부 자본주의 상품들인 셈이다. 정말 이런 상품들을 제외하고는 당대의 사람들의 삶과 가치관 그리고 공유 기억을 말할 수 없는 것일까. 또한 그러한 상품을 언제나 공유할 수 있던 이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많았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러 가지 기억의 편린들을 조각조각 붙여 만들었지만 그 실제라고 말하는 현실들은 사실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다.

   
▲ 영화 ‘응답하라 1988’ 포스터
 

여기에서 생각해볼 점은 과거 기억의 편중성이다. 정치, 경제, 사회는 대부분 제거된다. 사회 적 현실중에서도 범죄나 사건사고에 초점이 맞춰진다. 무엇보다 주목하는 것은 문화현상이다. 물론 그러한 문화 현상은 상품을 매개로한 것이다. 그 가운데에는 텔레비전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를 방증이라도 하듯 1988편에서도 사람들은 온통 텔레비전 광고에 몰입하고 있다. 아마도 텔레비전이 돌아가고 싶은 과거가 아닌가 싶다. 어쨌든 말랑말랑해진 추억은 뼈대가 없어 흐물흐물 거린다. 뼈대가 빠지니 과거에서 지금까지 이어지며 현실의 아픔과 고통을 일으키는 모순도 여전하다.  

또한 여전히 과거 기억조차 서울 중심이다. 기억조차 서울을 통해 공유하고 재확인해야 한다. 더구나 그 공간이 정말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서울 가운에서도 강북구 쌍문동을 특정하고 있고, 이 드라마를 보면 쌍문동의 사람들은 동네에서 서로 정겹게 의지하면서 살아갔을 듯싶다. 서로 집을 수시로 오가고 놀거나 먹어도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도 같이하며 동고동락하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강북스타일이다. 물론 정말 그런 집이 몇 집이나 될까, 만들어진 기억이다. 그랬으면 좋았을 듯싶은 욕망이 과거로 투영된 셈이다. 이는 서울판 ‘전원일기’라고 할 수도 있겠다. 신촌일기에 이어 쌍문일기라고 해야 할 듯싶다. ‘전원일기’는 농촌현실을 담아내지 못한다고 해서 항상 비판을 받았다. 주로 담아내고 묘사하는 장면이나 서사가 과거에 고착된 농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농촌은 과거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선택적으로 편집되어 구성된 현실이었다. 농촌의 고통과 아픔, 상처, 갈등, 분란 등은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주로 시청자들이 도시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비현실적인 현실은 이미 ‘전원’이라는 단어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새삼 놀랄 일은 아니었는지 모른다. 전원스타일이 사라져 갔듯이 이제 강북 스타일도 사라졌다. 사라진 이유는 다른 누가 아니라 스스로의 욕망 때문이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고교생들은 주로 강북 쌍문동에서 논다. 그러나 당시 정말 강북 쌍문동에서만 놀았을까. 아마도 그들은 강남을 뻔질나게 드나 들었을지 모른다. 강북을 강조하는 것은 강남에 대한 의식적 배제의 결과물이다. 즉, 기억의 소거와 재구성물이다. 왜 이런 기억의 작위적인 재구축을 할까. 쌍문동을 따뜻하고 아름다운 공간으로 재탄생시키려는 무의식에는 콤플렉스가 은폐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괴물은 은폐된 공간에서 탄생한다. 강남은 역시 강북의 콤플렉스가 만들어내 괴물이다. 과거는 아름답지도 고통스럽지만은 않으며, 지금 현실과 같다. 우리 스스로를 부정하고 선택한 욕망의 질주 때문에 생겨난 현실의 결핍이 그것을 그렇게 만들어낼 뿐이다. 과거가 조작되고 왜곡 되면 현실도 마찬가지다. 항상 복고물들이 허허로운 것은 이 때문이다. 역사교과서도 마찬가지다. 단일하게 편집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주인공은 기억을 지우지만 결국 그 기억은 더 또렷해진다. 대중문화 속 기억이나 정치 경제의 기억도 그것을 지우려할수록, 한쪽방향에서 선택적으로 왜곡 가공할수록 본질과 진실을 더 드러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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