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에서 있었던 고영주 이사장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은 부결됐다. 그러나 고 이사장에 대한 자격 논란은 앞으로도 끊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필자를 포함한 3명의 방문진 이사들이 지난달 8일 제출한 불신임 결의안에는 고 이사장에 대한 불신임 사유가 낱낱이 적시되어 있다. 고 이사장은 2013년 1월 한 시민단체 행사에서 “문재인 후보는 공산주의자”라고 발언한 바 있고, 이로 인해 민형사상으로 고소된 상태이다. 지난 달 있었던 국정감사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은 변형된 공산주의자”, “사법부, 공무원, 검찰 및 새누리당에도 김일성 장학생이 있다”, “국사학자의 90%가 친북좌경”이라는 등의 막말로 이념전쟁의 불을 붙였다.

그러나 5일 이사회에서 고 이사장은 “불신임 결의안에 불신임에 대한 명확한 근거가 기재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신상발언 형식으로 의견을 말씀드린다”며 자신이 작성해 온 ‘불신임 안건에 대한 의견’을 차근차근 읽어내려 갔다. 그의 해명은 진실의 왜곡, 주요 사실의 탈루, 독선적 사고와 억지 궤변 등으로 버무려진 선전 문구에 가까웠다. 그 속에서 방문진 수장으로서의 책임의식은 찾아보기 어려웠으며, 오랜 기간 공안검사의 일을 하면서 쌓여온 이념이 뼛속 깊숙이 배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신상발언에 앞서, 불신임 당사자라는 점과 불신임안의 공정한 처리 등을 고려해 이사회 사회를 다른 분에게 맡기는 것이 어떠냐는 야권 추천 이사의 요청이 있었지만, 고 이사장과 여권 추천 이사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 이사장은 불신임 결의안에 나와 있는 자신의 발언과 민형사상 고소를 당한 사실을 인정한다면서도 “의견 또는 논평의 진실 여부와 객관적 정당성 여부는 위법성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이 진실로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위법성이 없다고 판시하고 있다”는 취지의 대법원 판례를 강조했다. 그리고는 본인의 발언과 관련하여 이사장직에서 물러날 이유는 전혀 없다고 했다.

그는 또한 “판례는 공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보다 폭 넓은 의혹제기나 주장을 할 수 있다고 판시하고 있다”고도 했다. 문재인과 같은 공인에 대해서는 더 자유롭게 의혹을 제기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을 살펴보면, 그는 방문진 이사장의 자격과 역할, 그리고 불신임안이 제출된 이유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우선 3명의 이사들이 불신임안을 제출한 것은 법의 판단 결과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다. 그의 경직된 신념체계가 방문진의 직무수행에 미칠 위험성 때문이며 실제로 ‘광우병’ 소재의 <피디수첩>이나 ‘김현희’를 소재로 한 <2580> 등의 MBC 프로그램에 대해 그의 편향된 견해가 이사회에서 몇 차례 언급됐기 때문이다. 공인에 대한 그의 비판을 문제 삼은 것 또한 아니다. 그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정치인 문재인을 공산주의자라면서 “그가 대통령이 되면 대한민국이 적화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했다. 그러한 말이 ‘공인에 대한 단순한 비판’의 수준을 넘어선 것임은 수십 년 간 공안검사로 잔뼈가 굵은 그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이다. 그의 폭언은 정치인에게 치명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악랄하고 교활한 정치폭력이며 언론노조가 선거법 위반 혐의로 그를 고소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그는 또한 자신의 발언 시점이 그가 방문진 이사장이 되기 전이므로 ‘개인적 발언’임을 강조했다. 이는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궤변이 아닐 수 없다. 그는 국감장에 나와 자신의 발언과 관련해 지금도 그러한지를 묻는 의원들의 질문에 “소송에 불리하다”는 이유를 대며 답변을 회피했다. 이는 과거의 문제발언을 현재에도 철회할 의사가 없다는 의미 외에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다. 게다가 그는 한 술 더 해 노무현 전 대통령, 사법부, 행정부, 검찰, 국사학자 등을 변형된 공산주의자, 김일성 장학생, 친북좌경 등으로 매도했다. 이는 명백히 방문진 이사장이라는 공인의 자격으로 한 말이며 이를 개인의 발언이라고 발뺌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는 불리한 질문에는 묵비권을 행사하듯 아예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를 포함해 다수의 여권 추천 이사들은 그의 발언이 직무 연관성이 없으며 개인이 어떤 생각을 가졌든 방문진의 직무수행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없다는 식의 주장을 폈다. 이에 대해 “만약 그런 식이라면 방문진 이사들 중에 공산주의자가 있어도 그가 직무수행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다고만 하면 문제가 없다는 것이냐”는 반론에는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는 수차례 자신의 발언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도 “답변하지 않겠다”는 말로 일관했고, 그러한 태도가 방문진 이사장으로서 부적격하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같은 말만 되풀이 했다. 그런데도 그는 국감장에서의 자신의 발언은 모두 사실대로 답변한 것이며 그래서 불신임 결의안은 결과적으로 “왜 사실대로 답변했느냐”고 질책하는 것이어서 납득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국감장에서 사실대로 답변한 것이 아니라 답변을 회피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이중잣대의 모습도 보였다. 그는 서울지방변호사회가 그에게 사퇴하라고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한 것을 두고 ‘정치행위’라고 비난했다. 자신의 부적절한 정치적 발언은 ‘공인을 비판한 것’으로 정당화하면서 공인인 자신에 대한 비판은 정치행위라고 비난하는 이중적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MBC의 공적 책임을 지고 있는 방문진 수장으로서 매우 부적절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이 사안과 관련해 한 여권 추천 이사는 “정치적 성향 문제를 제기하게 되면 정파의 추천을 받은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한 보수 언론학자의 글을 소개하면서 고영주 이사장을 두둔했다. 그러나 이는 방문진의 구성 과정에서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 추천의 의미를 오로지 정파적 이해득실로만 해석하는 짧은 시각에서 빚어진 것이다. 방문진의 진정한 역할은 공영방송 MBC가 정파적 이익을 넘어 공정과 균형을 추구하고 노동, 환경, 여성 등 다양한 가치를 방송에 담는 등 공적 책무를 다할 수 있도록 관리하고 감독하는 것이지 정파적 이익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 아니다. 방문진 이사들이 정당의 주구가 아니라면 ‘수적 우위’만을 내세운 작금의 방문진 운영방식은 하루 속히 청산되어야 한다. 고 이사장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은 이념이나 정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상식의 문제요 삶의 자세의 문제요 가장 기본적인 윤리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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