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과거를 기억하며, 그 기억들이 일정한 서사구조로 ‘이야기된 것’이 역사이다. 한국사 교과서는 한국인의 집단기억이 이야기된 텍스트이다. 극우세력과 정부여당이 입맛에 맞는 교과서에 집착하는 것이 그 때문이다. 그러나 긴 역사를 보면 권력이 역사를 주무르려는 시도가 성공한 적은 없다. 권력은 짧고 역사는 길기 때문이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국민의 집단기억에 담을 내용을 권력이 선별하여 엮고 획일적으로 주입하려는 기도이다. 이런 움직임이 기존의 교과서는 물론 학계와 교육계를 야만적으로 공격하며 강행되고 있다. 집권당 의원들은 반세기 넘는 동면상태에서 막 깨어난 듯한 이념 편집증에 환호하고, 당대표는 전체주의적 사고를 설파하는 강연자를 향해 영웅이라 추켜세운다. 또 국정화를 재천명한 대통령의 국회 연설 때는 극우단체들이 방청석에 포진하고 있었다. 나치가 득세하던 시절의 한 장면과 겹치는 느낌이다.

그들은 왜 이렇게 역사를 장악하려 할까? 답은 간단하다. 교과서로 상징되는 국민의 집단기억 속에서 지우고 싶은 것이 있고, 숨기고 싶은 것이 있으며, 부풀리고 싶은 것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역사 연구자의 절대다수는 권력의 기호에 맞춘 연구를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보기에는 학계 통설에 바탕을 둔 기존 교과서가 불만투성이였던 듯하다.

그들은 권력의 힘으로 과거 역사를 작위적으로 엮어내려 한다. 그러나 단언컨대, 권력이 제멋대로 가려내서 엮은 이야기는 역사가 아니다. 정부여당은 스스로도 민망했던지 ‘올바른 교과서’라고 그럴 듯하게 치장한 이름을 내걸었다. 그러나 이 표현 앞에서 이렇게 묻고 싶다. 왜 국가가, 권력이 역사에서 ‘올바름’을 결정하려 드는가? 감히 그리 나설 만큼 현재의 권력은 지혜로운가, 아니면 매우 선량하거나 무척 정의로운가? 장황히 따져 이야기할 필요를 못느끼지만 과거 역사상, 현재 지구상에 그런 권력은 없다는 점만 언급해둔다.

올바른 교과서? 무엇이 올바른지는 민주사회의 시민이 판단할 일이다. 자신의 판단이 타인과 조금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다양한 생각들을 관용하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이다. 권력이 ‘올바름’을 결정하여 강요하고, 나머지를 그릇된 것이라 매도하며 적대하는 것이 전체주의이다. 이 때문에 지금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권력이 선별하여 엮은 집단기억, 권력이 ‘올바르다’고 판정해준 역사! 이것이 획일적으로 자리잡느냐 아니냐에 따라 우리 사회가 전체주의로 갈지, 그나마 성취한 민주주의를 지킬지가 결정될 것이다. 또 이를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며 저항하느냐에 따라 왕조시대의 신민(臣民)・백성이 되느냐 아니면 민주공화국의 시민이 되느냐 하는 길이 나뉠 것이다.

   
▲ 하일식 연세대 사학과 교수
 

가까운 과거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든가, ‘자학사관’이라든가, ‘애국’이란 낱말이 어지럽게 떠돌고 있다. 애국을 자신만의 것이라 여기는 독단이다. 그러나 남녀 사이에도 아름다운 사랑과 비정상적 집착은 구분되어야 한다. 후자는 대개 폭력을 수반하면서 모두를 파탄시키는 불행으로 끝나지 않던가. 20세기에도 전체주의의 광풍이 수그러들기까지는 야만적 폭력에 엄청난 희생이 따랐음을 기억하자.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항의하는 역사학자와 교육자들이 행동에 나선 것은 나라를 걱정하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함이다. 대한민국이 전체주의로 기우는 위기에서 ‘지식을 가진 자’로서 영혼을 팔지 않겠다는 다짐이 집필거부선언이다. 지구상의 어느 곳에서 국정 교과서를 쓰는지 알게 된 많은 국민이 창피스러워한다는 것, 이 이유 하나만으로도 국정화 조치는 철회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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