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해직 선배들을 잘 모릅니다. 같이 일해본 적이 없습니다. 제 입사는 2012년 1월, 선배들이 해직되고 꼬박 3년 3개월이 흐른 뒤였습니다. 쫓겨난 선배들의 공백은 다른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아니 사실, 공백이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2008년 그 순간에 전 없었으니까요. 해직 사태 이전을 경험해보지 못해서 비교하지 못하겠습니다.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죄송하지만 남이었습니다.

만남은 언제나 술자리에서였습니다. 해마다 이맘때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서울역 사옥 로비에서 열린 집회는 뒤풀이로 이어졌습니다. 술집 한쪽에는 해직 선배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 표정을 아직도 기억하는 이유는 하나, 어색함 때문이었습니다. 무표정한 눈이 웃고 있는 입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선배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는 무거움이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경찰 증원 기사를 쓴 적이 있습니다. 대통령 공약에 맞춰 경찰 수를 늘리기로 했는데, 준비가 부족했습니다. 합격한 많은 인원이 대기 상태에서 임용이 취소될지 몰라 불안해했습니다. 후보 시절의 대통령 공약 녹취를 썼습니다. 한 달 정도 승인이 보류됐습니다. 고맙게도 많은 선배가 기수별로 성명서를 써주셨습니다. 그래도 결국은 녹취가 잘렸습니다. 그때 처음 느꼈습니다, 해직 선배들의 공백을. 채워진 듯 보였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6일 저녁 서울 상암동 YTN사옥에서 언론노조 YTN지부가 주최한 '해직7년 기억하라 2008' 행사에 참석한 해직기자들 (왼쪽부터 노종면, 현덕수, 조승호 기자)
이치열 기자 truth710@
 

그래도 많은 사람이 YTN을 반겨줬습니다. 취재 나가면 시민들은 반가워했고, 출입처에서의 대우도 좋았습니다. 공정성 1위라는 명성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사건 사고가 터지면 사람들은 24번을 틀었습니다. 부모님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뿌듯했습니다. 그래, 이 정도면 다닐 만하다고 스스로 위안했습니다. 세월호 침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 한동오 YTN 기자
 

불안했습니다. 이기적이게도, 기자로서가 아닌 직장인으로서 말입니다. 제 나이 30살, 정년까지 꼭 그만큼 남았습니다. 그때까지 다닐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끓는 물에서 헤엄치는 개구리처럼 뒷다리부터 서서히 익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때론 가만히 앉아 있는 선배들이 밉기도 했습니다. 선배들은 퇴직하면 그만이지만, 저는 앞으로 수십 년을 다녀야 하니까요. 책임은 온전히 저희의 몫이었습니다. 다른 곳을 기웃거리며 혼자만이라도 살아보려 했지만 허사였습니다.그때 취재를 나가면 싸늘한 시선이 뒤통수를 감쌌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경멸이 담겨있었습니다.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그림만 담고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습니다. 기레기. 우리는 욕을 먹고 어느 종편의 중계차는 환호를 받았습니다. 인터넷 댓글은 차마 다 읽어볼 수조차 없었습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습니다. 뿌듯함은 어느새 자괴감으로 변했습니다.

저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해직 선배 여섯 분이 모두 돌아오셔도 당장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저희는 지금, 선배들이 필요합니다. 친분도, 정 때문도 아닙니다. 성역 없는 보도, 그래서 정말 믿음을 주는 보도를 하고 싶어서입니다. 선배들이 있다면 변화가 시작될 것 같습니다. 선배들은 잊혀지는 게 두렵다고 하셨죠? 잊혀지다뇨. 그럴 리가요. 끝이 안 보일 것 같은 이 순간 모두를 기억하고, 남길 겁니다. 노종면 선배, 조승호 선배, 현덕수 선배, 잘 계신 거죠? 이제는 당신들을 알고 싶습니다.

   
6일 저녁 서울 상암동 YTN사옥에서 언론노조 YTN지부가 주최한 '해직7년 기억하라 2008' 행사에 참석한 해직기자들의 발언을 듣고 있는 수습기자들. 이치열 기자 truth710@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