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논란의 중심에 선 작가 김훈의 신작은 제목에 라면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건강에도 좋지 않은 양은냄비와 봉지 라면을 이벤트 상품으로 걸었다. 세간에는 라면을 끓인 양은냄비의 받침으로 작가 김훈의 책을 사용하라는 말이냐는 비아냥거림도 있었다. 이해가 안 될 일이었다. 김훈 정도의 작가라면 애써 이런 이벤트를 벌이지 않아도 충분히 많은 독자들의 선택을 받을 만 했는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저서의 출판사는 무리한 마케팅으로 싫은 소리를 들었는데, 본인이야 구체적인 마케팅 방안을 몰랐을지도 모르지만, 이런 도를 넘은 마케팅은 결국 차트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다. 즉, 많은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찾기보다는 책 판매고를 선점하려는 것이다. 김훈의 신작은 아니나 다를까, 순위 조작 의혹까지 받았다. 실제 순위와는 달리 부풀려서 발표했다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차트 순위에서 일찌감치 상위 선점에 올라야 하는 이유는 승자의 지배 효과가 차트 순위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음원사재기와 많이 닮았다. 

사실 일반 상품의 사재기와 문화콘텐츠의 사재기를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일반 상품의 사재기는 대개 두 가지 목적이 내재되어 있다. 하나는 미리 사두어 나중에 시세 차익을 누리려는 것이고, 이는 시장의 수요 공급의 왜곡까지도 일으킨다. 다른 하나는 값이 오른 경우, 추가 지출되는 비용을 줄이려는 의도가 있다. 담배 사재기가 이에 해당한다.

음악이나 책의 사재기는 이런 목적 보다는 숫자를 조작하는 것이다. 숫자를 속이는 이유는 사람들이 실제로 사지도 않았는데, 산 것처럼 속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숫자는 단지 숫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선택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른바 ‘외부성’이 발생하기 때문인데, 한번 올라간 인지도는 쉽게 내려오는 법이 없다. 

무엇보다 음원의 구매횟수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음원 자체의 수익을 유도하는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방송출연의 근거와 행사 출연료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방송국에서 가요순위프로그램이 오랫동안 유지되는 것은 그곳에 등장하는 차트가 바로 인지도는 물론 행사출연료의 수준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음원사이트도 그러한 맥락에서 운용되는 것이다. 음악가들이 순수하게 음반이나 음원 그리고 공연수입이 아니라 행사출연료를 바라보고 활동하는 현실은 이런 가요순위에 대한 집착을 더 강화한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아이돌 그룹일수록 강하다. 

이런 가요차트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수용자들이 음악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 제대로 서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좋은 음악을 선호하고 판단 선택하는데 취약하다. 트렌드에 따라가기 바쁘다. 인기곡은 각 개인들이 만들어가는 것인데도 말이다. 즉 베스트셀러나 음원 1위와는 관계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곡을 선호하고 자신 있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각 공연행사도 1등이 아니라 각 개성 있고 컨셉에 맞는 뮤지션들을 캐스팅 하거나 섭외하면 된다. 하지만 현실은 각종 차트에서 1등하는 가수이면 끝이다.

한국은 순위를 참 좋아한다. 9월 24일 한국갤럽의 조사결과 우리나라 인구 가운데 40대 이상이 좋아하는 취미 1위는 등산이었는데 ‘월스트리트 저널’은 지난 9월 11일 한국인들이 등상을 '정상 중심주의(Peak-centricism)'에 따른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 이유에 대해 많은 한국인들이 정상을 오르고 바로 내려오는 등산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산의 주변경치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정상을 정복했는가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훈 '라면을 끓이며'
 

과연 이것이 한국인의 본질적인 등산문화인지는 알 수가 없다. 예로부터 산의 정상보다는 곳곳을 보는 것이 더 우세했기 때문이다. 조식의 지리산 '유두류록(遊頭流錄)', 김창흡의 '오대산기행', 채제공의 '관악산유람기’, 이황의 '소백산 유람록', 정약용의 '수종사 유람기', 허균의 '원주 법천사 유람기', 남효온의 ‘유금강산기’, 김창협의 <동유기>, 이상수의 ‘동행산수기’, 양사언의 ‘금강산유람기’, 장지연(張志淵)의 ‘금오산유람기(金烏山記) 등 남겨진 '유산기(遊山記)'는 무려 560여 편에 이른다. 이런 유람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산천의 명승지를 둘러보고, 자기의 느낌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이런 등산문화가 모두 사라진 셈이다.

이렇게 산을 오르는 것에 대한 관점이 달라진 것은 어느 때부터일까. 경쟁과 속도주의가 국가주의가 팽배했던 군사독재시기부터라고 생각된다. 이때는 에베레스트 산의 등정과 같이 세계최초로 고산을 등정했다는 소식이 언론미디어를 장악했고, 대대적으로 치하의 대상이 되었다. 이 때문인지 산은 정복의 대상, 즉 빨리 많이 오르는 대상이 되었다.

이에 등산문화는 작은 산이라도 그 산의 세세한 부분을 살피기보다는 그 산의 정상에 올라봤는가가 중요해졌다. 산을 소소하게 즐기는 것보다는 전국의 산을 몇 개나 가봤는가가 자랑거리였다. 정상에 대한 열망성이 등산 문화의 중심을 이루었고, 정상에 오르지 못하면 등산을 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 산에 대해 잘 몰라도 올라갔다오면 다 아는 것이 되었다.

어디 그것만일까. 이런 경쟁과 속도전의 1등주의는 다른 사회문화 전반에 걸쳐서 폐해를 끼쳐왔다. 입시교육의 등수매기기에 익숙한 때문인지 대학이 세계 몇 위에 드는지, 국제경쟁력은 몇 위인가 그리고 국민소득이 얼마나 다른 국가보다 높은 위치에 있을지에 관심이 많다. 정작 그 안에서 각 개인들이 얼마나 행복한지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오늘날에는 행복감도 순위를 매기는데 즐거움을 느낀다.

최근 음원사재기에서 초점은 음원 사재기가 있는가, 없는가, 그리고 그것을 왜 하는가에 있었다. 방송이나 매체에서 대형기획사 대표나 인기가수, 관련 인사들은 자신들의 결백함을 호소할 뿐이었다. 음원사재기라는 부도덕하고 공정경쟁의 원칙을 해치는 어떤 누군가를 성토하는 수준이었다. 애써 비판하는 것은 시장지배자인 멜론의 추천제나 차트 집계 방식의 개선방안이었다. 이는 김훈의 신간을 둘러싼 논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요컨대, 근본적으로 음원 차트가 왜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없었다. 음악의 순위를 매기는 것은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하고 있었다. 방송채널에서 범람하듯이 등장하는 수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이나 음악 프로그램에서도 순위를 매기고, 승자와 패자를 구분하는 포맷은 당연시되고 있다. 그렇다면 차트가 없을 때는 어떻게 될까. 흔히 차트를 없애면 객관적인 공신력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말한다. 주관적인 요인이 개입될 여지고 많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도 그 객관적인 공신력을 확보할 수 없으며, 그런 적도 없다. 또한 주관적인 개입이라는 것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으며 그러한 주관성이 객관적인 지지를 받는가가 중요할 뿐이다.

하지만 객관적이라는 지금의 차트운영도 결국에는 쏠림의 지배현상에 편중되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대규모 자본과 인력을 지니고 있는 기업일수록 유리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순위 차트는 결국 이해관계자들의 만족을 위해서 존재할 뿐 객관적인 음악성이나 그것에 따른 지지와 관계가 없다. 오히려 사재기는 그런 구조를 깨기 위해 자행되는 소수자들의 불법행위인 것이다.

차트가 불필요한 이유는 스마트 모바일 환경 속에서 이제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들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어서다. 음원사이트든 관련 음악 방송이든 지향해야할 점은 다양한 음악을 소개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음악성을 순위로 나열을 하면 다른 음악을 좋아하는 많은 이들이 아예 떠나버리고 만다. 그것은 아이돌 그룹 위주의 음악이 더 기승을 부리는 근본적인 이유다. 이렇게 제한된 음악 장르가 음원 차트는 물론이고 방송 그리고 각종 행사에도 지배력을 행사한다. 즉 음악적 다양성이 갈수록 줄어들게 되었던 것은 바로 음악 차트에 있다. 음악관련 매체들은 플랫폼 역할만 해주어야 한다.

때문에 음원을 사재기가 있는가 없는가, 그리고 그것을 누가 하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은 근본적으로 한국의 음악에 대한 다양성을 외면하는 것이었다. 진범이 밝혀진들 이런 차트 구조에서 외면당하고 있는 뮤지션들과 음악들에게 희소식이 될 수는 없었다. 음원 사재기 범인들을 잡는다고 해서 사재기를 구조적으로 만들어 내는 원인들은 건드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책의 경우에도 이제 책을 살만한 사람들만 책을 사고 있고 이러한 정도는 디지털 다매체 사회가 될수록 심화될 것이다. 따라서 관심 있는 분야의 책은 차트에 상관없이 구입하게 될 것이며, 그 외의 삿된 이벤트들은 오히려 작가들에게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많다. 갈수록 개방과 투명, 소통성에 대한 대중적인 의지가 강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부응하지 못하면 출판은 이도저도 아닌 상태에서 쪼그라들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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