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노동자가 국회의원이 됐다. 지난달 17일 종영한 KBS 드라마 ‘어셈블리’의 독특한 줄거리다. 이 작품을 집필한 정현민 작가의 이력은 더욱 독특하다. 노동판에서 활동했고, 매일노동뉴스에서 기자생활을 했다. 국회에 발을 디딘 그는 민주당(새정치민주연합)과 한나라당(새누리당)의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국회의원 보좌관을 지낸 후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직업이 자주 바뀌었지만 그의 삶은 일관성이 있다. ‘노동’을 ‘정치’로 풀어내려는 노력이다. 정현민 작가를 지난 1일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인근 카페에서 만났다.

“지상파에서 해고노동자를 보여주고 싶었다”

어셈블리의 주인공 진상필은 조선소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다 해고된 노동자다. 오랜 기간 복직투쟁을 했지만 사측은 요지부동이다. 그러던 중 여당의 전략공천 대상으로 선정돼 국회에 입성한다. 정 작가는 “지상파에서 해고노동자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에 분명히 존재하는 사람들이니까. 걱정은 했다. 시청자들이 낯설어하고 부담스러워할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반응은 냉담하더라. 1~2회 내내 붉은조끼 입은 노동자들이 등장하는데 거부감을 느낀다는 이들이 많더라. 그래도 후회하지는 않는다.” 

   
▲ 정현민 작가. 사진=이치열 기자.
 

왜 해고노동자를 주인공으로 삼았을까. 정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민주노동당 당원이었고, 노조에서 일도 했다. 이후 매일노동뉴스 기자, 환노위 소속 의원 보좌관, 그리고 작가. 관련 없는 이력을 나열한 것 같지만 늘 노동을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강조했다. “노동은 내가 제일 사랑하고 자신있는 분야다. 직업은 작가지만 마음은 노동판에 있다. 그래서 해고노동자를 주인공으로 정했다. 해고노동자였기 때문에 극의 핵심적인 메시지인 ‘배달수법’을 만들 수 있기도 하다”고 말했다. 

소외받는 이들의 삶을 정치가 어떻게 대변해야 하는가. 작품 속 ‘배달수법’ 통과 과정에서 작가의 주제의식이 선명히 드러난다. 진상필 의원은 ‘배달수법’을 만든다. 배달수법은 크레인 위 고공농성을 시도하다 목숨을 잃은 극중인물 해고노동자 배달수의 이름을 딴 법이다. 직장을 잃은 이에게 지원을 통해 두 번째 기회를 준다는 내용이다. 국회 표결을 앞두고 진상필 의원은 이렇게 연설한다. “배달수씨 평생 뼈 빠지게 배만 만들고, 군대도 갔다 오고 갑근세도 꼬박꼬박 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길거리로 내팽개쳐졌어요. 이런 사람 누가 일어서게 도와줍니까? (중략) 국민이 국민의 의무를 다했을 땐 국민이 권리고 국가가 의무입니다.”

   
▲ KBS 드라마 '어셈블리' 극중 진상필 의원 대사. 사진=KBS, 디자인=이우림.
 

정 작가는 “작가를 하면서 늘 갖고 있는 기본적인 화두가 ‘승자독식 무한경쟁’”이라고 밝혔다. “패자에 대한 배려를 이야기하고 싶다. 배려 없는 사회가 얼마나 갈 수 있겠나. 길거리 돌아다닐 때마다 그새 사라진 간판들을 본다. 학교 다닐 때 빈민연대활동을 가면 골리앗 세워놓고 주말마다 규찰 섰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다. 밀려난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들이 열심히 살지 않아서 밀려난 게 아닌데.”

“국민이 정치 혐오해 정치드라마 썼다”

정현민 작가를 스타작가 반열에 오르게 한 ‘정도전’은 높은 시청률을 보이며 ‘정통사극의 부활’이라는 평을 들었다. 반면 어셈블리는 저조한 시청률로 막을 내렸다. 정현민 작가는 “두 작품은 다르다”며 운을 뗐다. “‘정도전’을 썼던 작가가 현대정치극을 쓴다고 하니 ‘하우스오브카드’같은 암투극을 만들 것이라고 생각하더라. 근데 애초부터 그렇게 쓰지 않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오로지 정치만 이야기하는 드라마를 쓰고 싶었다. 현대정치, 그것도 인기 없는 한국의 의회정치를 다뤘다. 흥행을 생각해서 쓴 게 아니다. 해야 하는 이야기고 내가 잘 할수 있기 때문이다.”

왜 정치 이야기를 드라마로 썼는지 물었다. 정 작가의 대답은 명쾌했다. “국민이 정치를 혐오하기 때문에 정치에만 집중했다”는 것이다. 그는 “국민들의 반감과 혐오감에 기대어 시종일관 암투하고 배신 때리고 이렇게 하면 속된 말로 ‘재미가 쩔수도’ 있다. 하지만 국민들에게 정치를 포기하면 안 된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다. 세상을 바꿀 유일한 수단은 아니지만 유의미한 수단이 바로 정치이기 때문이다.” 

‘어셈블리’는 국회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배달수법’ 일화만 해도 의원실에서 법안을 만들고, 입법조사처에서 검토를 받고, 상임위를 거쳐 표결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보여준다. 정 작가는 “가능한 한 국회의 모든 시스템을 담으려 했다. 국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의원들이 어떻게 일을 하는지 보여주려 했다”면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지만 여야 가리지 않고 성실한 국회의원이 분명 존재한다. ‘월화수목금금금’인 의원들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의원들은 TV에 잘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어셈블리’는 국회의원이 ‘지역구’와 ‘공천’, ‘계파’에 휩쓸려 어떻게 초심을 잃는지도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진상필 의원은 현실성이 낮은 ‘신항만’을 유치하려는 지역구 유지들의 압박에 시달린다. 환경운동을 하던 변호사 출신 비례대표 홍찬미는 재선을 하기 위해 계파정치에 올인한다. 초선의원들이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 쳐야하는 상황인 것이다. 개혁보수를 표방한 386 운동권 출신 백도현 의원은 당 사무총장을 맡게 되며 조금씩 타락해간다. 야당 386정치인인 조웅규 의원은 당의 지도부가 물갈이돼 공천이 불확실해지자 ‘전국정당’ 만들겠다며 제1야당인 한국민주당을 탈당한 후 결국 여당에 입당해 ‘철새’가 된다. 

정 작가는 “원래부터 나쁜놈들이 정치를 하는거냐, 아니면 정치를 해봤더니 그렇게 된 거냐? 결론을 못 내리겠다. 정치를 하는 과정에서 숱한 유혹들이 있다. 재선을 위해 계파정치하고 지역구 유지와의 결탁한다. 시청자들에게 이 점을 보여주고 판단하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 작가는 “백도현과 조웅규를 통해 초심은 아름다웠지만 세속화 내지는 권력화된 386의 모습 보여주고 싶었다. 백도현은 나중에 개과천선한다는 점에서 기대도 담았다. 다만, 이들을 통해 386 모두를 평가하려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최인경에 감정이입, 정치는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진상필 의원실 인턴인 김규환은 정치를 “쓰레기”라 부르며 혐오하는 20대다. 같은 의원실 최인경 보좌관은 그런 김규환에게 “아무리 정치를 혐오하고 부정해도 정치는 언제나 네 인생 전부를 지배하고 있어”라고 말한다. 두 인물 모두 정 작가의 감정이 이입됐다.

“최인경 비서관이 하는 말은 거의 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김규환에는 국회에 들어가기 전 내 생각을 일부 녹였다. 국회에서 일을 하는 내가, 국회에 들어가기 전의 나에게 이야기하는 셈이다.” 인물의 대사를 통해 ‘정치의 중요성’을 직설적으로 강조하다보니 다소 드라마가 ‘오글거린다’는 평도 있다. 정 작가는 “일부러 좀 오글거리게 쓴 면이 있는데, 이 드라마는 중학생,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누구든 정치에 관심 가진다면 누구나 권해줄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다. 다소 계몽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그것도 내 색깔”이라고 말했다.

   
▲ KBS 드라마 '어셈블리' 극중 최인경 보좌관의 대사. 사진=KBS, 디자인=이우림.
 

극 중 사회당 대표로 등장하는 ‘천노심’에도 작가의 감정이 이입됐는지 궁금했다. 천노심과 사회당은 등장 때부터 심상정과 정의당을 연상시켰다. ‘천노심’이라는 이름 역시 정의당 정치인인 천호선, 노회찬, 심상정의 약자로 보이기도 했다. 정 작가는 “약자가 맞다. 그렇다고 해서 특정 정당과 캐릭터를 밀어주려는 의도는 없었다. 심상정에 몰입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비중도 매우 적다”고 말했다. 정 작가는 사실 사회당을 넣을지 말지도 고민했다고 한다. 정 작가는 “한국에 사민주의노선을 추구하는 미니야당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굳이 극에서 제거하고 싶지 않았다”고 밝혔다.

“기자님들 이런 것도 좀 써주셔야죠.”

작품에서는 기자와 정치인의 공생관계가 잘 드러난다. ‘단독’을 얻기 위해 의원실과 거래를 하거나, 정치인이 정적을 제거할 수 있는 폭로성 정보가 있으면 친한 기자에게 연락해 “1면 톱기사 비워놓으라”고 이야기한다. 기자들이 보좌관에게 ‘선배’라고 부르는 장면도 있다.

18회에는 특히 의미심장한 장면이 있다. 국회 기자회견장에 들어선 진상필 의원. ‘폭로’를 많이 해온 까닭에 기자들이 집중한다. “오늘은 꼭 통과시켜야 하는 법안을 발표하려고 나왔습니다.” 진상필 의원의 말에 기자들이 한숨을 쉬거나 “뭐야...”라고 말하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러자 진상필 의원은 이렇게 강조한다. “이런 얘기 기삿거리 안 된다는 거 압니다. 그래도 이런 얘기도 기사를 많이 내주셔야 우리 국회의원들이 더 좋은 법 만들려고 할거잖아요.”

정 작가는 이 장면을 넣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극이 20부작으로 짧다보니 다 담지 못했는데, 국회를 둘러싼 다양한 요소들도 담고 싶었다. 국회가 국민의 비난 받는 게 온전히 국회만의 책임인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 국감 때 기자들이 의원실 돌아다니며 이렇게 묻는다. ‘쟁점’이 뭐냐고. 다툼과 갈등부터 찾는 것이다. 국회의원이 법안 발의한 게 뉴스가 되나? 잘 안 되더라.” 정치를 ‘정쟁’으로만 다루는 언론보도에 대한 문제제기다.

   
▲ 정현민 작가. 사진=이치열 기자.
 

정 작가는 연말까지 휴식을 갖겠다고 했다. 다음 작품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이제 작가 2기를 준비하겠다. 1기는 끝난 셈이다. 연착륙은 한거 같다. 향후 작품에 대해 생각해둔 건 없지만, 시기가 어떻든 내가 가장 잘 쓸 수 있는 분야를 쓰고 싶다. 나는 팔자에도 없는 작가가 왜 됐을까. 정도전, 어셈블리 같은 드라마를 통해 내 존재이유를 찾는 것 같다”고 정 작가는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굳이 내 창작물이 아니더라도 한국의 여러 주옥같은 대하소설들을 드라마로 만들고 싶다”고 강조했다. “아리랑, 한강 같은 작품을 드라마로 집필하고 싶다. 다만, 방송사가 글로벌한 한류 콘텐츠를 중시하는 상황에서 기획이 성사될지는 의문이다. 이번 작품을 통해 작품은 작가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업성’을 어느정도 고려해야 한다는 점도 알게 됐다.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꼭 도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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