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급 공무원>, <해적 : 바다로 간 산적>, <소수의견> 등에서 각본이나 각색을 담당했던 ‘이야기꾼’ 천성일 감독의 데뷔작 <서부전선>은 이미 고전이 된 반전영화 <서부전선 이상없다>의 오마주이다. 왜 그는 굳이 제목을 <서부전선>이라고 했을까? 영화에서 서부전선이 배경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휴전을 위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전쟁을 독려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그만두기 위한 장소인 것. 더구나 어린 학도병과 늙은 농부를 캐릭터로 내세워 엔딩에서 눈물을 만들어내는 것도 결국 반전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보면 <서부전선>은 <서부전선 이상없다>의 주제를 오롯이 빌려왔다는 것을 드러내놓고 증명한 셈이다.

주제를 빌려왔다고 이야기가 같은 것은 아니다. <서부전선>은 참혹한 비극인 <서부전선 이상없다>와는 꽤나 다르다. 휴전 3일전, 농사를 짓다 군인이 된 남복(설경구), 여섯 형이 모두 전사해 출전한 학도병 영광(여진구)의 이상한 동거 이야기. 전쟁 중인 남과 북의 병사가 동거한다는 게 타당하기나 한가? 그럼에도 영화는 말이 되게 상황을 만들어낸다. 일급 비밀문서를 잃은 남복과, 탱크를 지켜야 하는 영광은 우연히 전쟁터에서 조우하게 된다. 영광이 남복의 비밀문서를 습득하면서부터다. 쉽게 보면 남복이 비밀문서만 찾아 가면 되는 상황이지만, 이제부터 영화는 둘이 한 장소에서 좌충우돌 살아간다.  

이상하게도 둘이 펼치는 이야기는 코믹을 바탕으로 하는데, 이것은 참 비정상적이다. 출산한 아이의 이름도 지어주지 못하고 출전한 아버지 남복, 어머니와 사랑하는 여학생이 너무도 그리운 중학생 영광이 처절한 전쟁의 고통 속에 처해 있어, 기본적으로 영화 분위기는 비장미가 지배해야 한다. 그들이 속한 부대는 처절하게 전멸하지 않았던가! 둘만 살아남아 임무를 완수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코믹이라니. 유능한 감독 천성일은 긴박한 분위기를 단숨에 코믹으로 바꾸어 버리고, 이 기조를 종반까지 잃지 않는다.

   
▲ 영화 <서부전선> 포스터
 

그런데 전쟁과 코믹을 결합한 이 영화는 너무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 전쟁의 긴박감과 코믹의 웃음을 동시에 만들어야 하니 쉽지 않은 것.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이런 이야기가 꽤나 상투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한국전쟁을 소재로 어떻게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이 영화처럼 우화로 완벽하게 작동하는 영화라도 영민한 관객에게는 진행될 서사가 보이게 마련이다. 감독이 구사한 전략인, 코믹이 코믹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후반의 감동을 조준하기 때문에 코믹은 에피소드식 구성 안에서만 작동하다가 결국 비극의 눈물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운명을 관객들은 이미 보기도 했고 짐작할 수도 있다. <서부전선> 역시 이 함정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이를 두고 창작력의 부족이나 연출의 미숙이라고 하기보다는,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명확하고, 그래서 오히려 진솔한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솔직히 말해 <서부전선>의 영화적 완성도가 탁월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엉성한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걸작이 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코믹의 강도도 그리 강하지 않고, 우화와 상징은 읽히기 쉽다. 엔딩에서 눈물을 자극하려면 더욱 강하게 몰아쳐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다. 여러모로 아쉽지만, 그럼에도 지금 이 영화는 너무나 소중하다.

   
▲ 영화 <서부전선> 스틸컷
 

<서부전선>에서 우리는 무엇을 봐야 하는가? 단적으로 말해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가족을 본다. 남과 북의 병사들이 서로를 차츰 알아가는 과정에서 진한 농담이 오가고 이를 통해 교감의 길을 건설해 놓았다. 남복과 영광의 목적은 같다. 집으로 돌아가 사랑하는 처자식과 어머니를 만나는 것. 왜 그들이 전쟁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본인들은 알지 못한다. 일급 비밀문서를 잃어버린 남복은 그 내용조차 알지 못하고 목숨을 건다. 자신들은 단지 시키는 것만 하면 되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 영화 <서부전선>이 하고자 하는 말은 어쩌면 단순하다. 왜 전쟁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 그러니 하지 말자는 것.

이런 장면이 있다. 영광의 탱크로 민간 마을로 가니 북한군인 영광을 보고 마을 사람들이 인공기를 들고 나와 만세를 부른다. 영광의 뒤에서 군복을 입은 남복이 등장하니 한 마을 아낙이, 숨긴 손에는 인공기를 들고 있으면서 앞에서는 태극기를 흔들며 환영한다. 마을 사람들에게 전쟁은 그런 것이다. 이념이 무엇인지, 왜 싸우는지도 모른 채 격동 속에 휩쓸려야만 했던 상황. 상(喪)을 당한 상황에서 출산의 기쁨을 맞는 것도 전쟁과 무난한 민중의 삶의 모습이다.

   
▲ 영화 <서부전선> 스틸컷
 

그런 민중들이 위기에 빠진 탱크를 구해낸다. 탱크를 폭격한 미군 비행기가 추락하자 영광은 복수하기 위해 속도를 냈다가 끊어진 다리 위, 아슬아슬하게 추락 직전의 상태에 처하게 된다. 이때 남복이 상여를 지고 가던 마을 사람들을 불러 탱크를 건져낸다. 불가능한 판타지의 영화적 재현. 때문에 이 장면은 명확한 상징이다. 남과 북의 앞에 놓여있는 끊어진 다리, 거기로 추락했다가 다시 솟구치며 날아가는 미국 비행기, 추락 직전의 비행기를 민중들이 끌어올리는 모습 등은 현실과 희망이 교차하는 감독의 메시지다. 이렇게 영화 안에는 미국과 중국, 남한과 북한의 복잡하지만 단순한 관계가 녹아있다.    

자연스럽게 <공동경비구역 JSA>가 떠오른다. 천성일 감독이 <서부전선>에서 코믹적 장치를 구사한 것은 <공동경비구역 JSA>가 추리적 서사 구조 안에 코믹적 장치를 빼곡히 채워 넣은 것과 일맥상통한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비극으로 막을 내린 것처럼 <서부전선>도 그렇다. 분단과 전쟁을 다루지만, 왜 민초들이 분단과 전쟁 때문에 희생되어야 하는지, 남과 북은 이념과 무관한 한 민족이며 가족 관계라는 것을 알레고리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래서 이상한 것은 이 영화가 아니라 이 영화를 지금 만나야 하는 우리 상황이다. 남과 북의 대결로만 치닫고 있는 지금, 반전을 이야기하고 민족을 거론하는 영화는 너무 늦게 만들어졌거나 또는 너무 일찍 등장했다. 분명 <서부전선>은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만들어졌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이 지금의 우리에게는 부족하다. 그것은 이 영화의 불행인가, 우리 시대의 불행인가? 만약 후자라면 우리는 정말 불운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