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하우스, 슬픈연가, 하얀거탑, 태왕사신기, 베토벤 바이러스, 그리고 여명의 눈동자와 모래시계. 모두 고 김종학 PD 작품들이다. 그는 한국 드라마계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가 설립한 ‘김종학 프로덕션’은 외주 제작사도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그러나 그는 지난 2013년 분당구에 위치한 세 평짜리 고시텔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드라마 '신의'의 출연료 6억4000만원을 지급하지 못해 고소당한 상태였다. 

방송계에서는 외주 드라마 제작 환경을 되돌아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정된 채널을 두고 다수 독립 제작사가 경합하는 과정에서 독립 제작사는 거의 마진을 남기지 못한 채 계약을 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프로그램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유명 배우를 출연시킨다. 김 PD의 죽음은 이런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힌 것이었다. 실제 김 PD는 이 과정에서 부족한 돈을 다음 프로그램 제작비로 충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독립 PD 잔혹사] 욕설에 ‘풀 스윙’ 뺨 맞아도 “CP는 신이다”

 

   
▲ 지난 2013년 7월23일 SBS <8뉴스> 화면 갈무리
 

모래시계 PD의 죽음

방송업계에서는 제작비 논란이 불거진 시기를 2003년 이후로 보고있다. 권호영 한국콘텐츠진흥원 수석연구원은 “2003년 이후 유료방송 가입자가 1000만을 넘어서고 인터넷 이용이 보편화되면서 지상파 방송사들 시청률이 급락하고 이에 따라 광고 수입이 정체됐다. 때문에 지상파 방송사는 외주 제작비를 대폭 줄였다”고 분석했다. 권 연구원에 따르면 외주 제작 다큐멘터리의 경우 2013년 기준 5년 전에 비해 30% 이상 제작비가 삭감됐다.

업계에 따르면 독립 제작사는 같은 형식의 프로그램을 절반 정도 제작비로 만든다. 제작비가 똑같이 책정된다고 해도 방송사는 인건비가 별도지만, 외주 제작은 제작비에 인건비까지 포함이다. 세트나 장비 대여료 역시 별도로 책정되지 않는다. 방송사들이 정해진 비율 이상으로 외주 제작을 하는 이유다. 

독립 PD들은 제작비를 몸으로 느낀다. 여럿이 할 일을 한 명이 하거나 10일에 걸쳐 할 일을 5일 만에 마무리 해야한다. 독립PD협회(협회)와 우상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발표한 ‘종편 및 방송사 독립제작 관행 실태조사’에 따르면 경력 19년차 독립 PD A씨는 한 번도 제대로 팀을 꾸려서 해외촬영을 가본 적이 없다. 조명감독, 카메라 감독, PD, 조연출 이렇게 4명은 필요한 일정을 그는 대부분 혼자 감당했다. 정말 영상미가 필요할 때만 카메라 감독과 두 명이서 갔다. 

이들의 열악함을 가장 잘 아는 이가 현지 코디네이터다. 독립 PD B씨는 “해외 코디들 중에는 방송사 PD들하고만 일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독립 PD랑 일하면 피곤하다는 인식이 너무도 강하다”며 “독립 PD들은 돈 깎으려고 하고, 하루에 촬영 일정 무리하게 잡아달라고 하고. 참 그거 보면 되게 서글프다. 예전에 한 코디 분이 저보고 그랬다. 왜 이렇게 무리하냐고, 그렇게 일하다가 죽는다고…”라고 말했다.  

 

   
▲ 지난 7월 열린 방송사 외주제작 프리랜서 노동인권실태 긴급 증언대회. 사진=언론노조 이기범 기자
 

“그렇게 일하다가 죽는다고”

이렇게 일해서 손에 쥐는 돈은 얼마나 될까. 전국언론노동조합(언론노조)과 협회가 공동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166명 가운데 연봉이 3000만~4000만원이라고 답한 응답자가 60명(36.1%)로 가장 많았고 2000만~3000만원을 선택한 응답자가 41명(27.4%)으로 뒤를 이었다. 연봉이 4000만~5000만이라는 응답자는 16명(9.6%)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보장받기 어려울 때가 있다. 프로그램이 ‘엎어질’ 때다. 이때 독립 제작사는 프로그램을 일정 정도 제작했더라도 제작비를 보장받기 어렵다. 법적으로도 요구할 수도 없다. 방송사와 쓴 계약서 자체가 없다. 이같은 일은 주로 특별편성 프로그램이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벌어진다. 시기에 따라 주제가 바뀌거나 아예 편성되지 않는 경우가 잦기 때문이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방송이 나간 이후에 계약서를 쓴다. 방송사는 손해볼 게 없다. 

원청과의 계약이 부재한 탓에 독립 제작사들도 건당 계약을 하는 제작팀에게 4대 보험을 보장하지 않는다. 제작팀은 일하다 다쳐도, 죽어도 산재로 인정받기는커녕 알려지기도 힘들다. 실제 설문조사 결과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에 가입돼 있다고 답한 사람은 175명 중 각각 12%와 13.1%에 불과했다. 반면 응답자의 82.7%는 고용보험이, 92%는 산재보험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최근에도 한 제작팀이 교통사고를 당해 30대 초반의 독립 PD가 세상을 등졌지만 알려지지 않았다. 독립 제작사는 프로그램을 계속 제작하기 위해 이 사실을 공개화하기를 꺼렸다고 한다. 복진오 협회 권익위원장은 “딸 같은 나이의 동료 PD가 아침 일찍 나가서 일하다가 죽었는데 왜 방송 빵꾸 나는 걸 걱정해야 하나. 한 번 빵꾸 내면 안되는지. 우리는 왜 그렇게 살아왔는지”라고 말했다.  

 

   
▲ 전국언론노동조합과 독립PD협회가 공동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협찬 받아오면 나아질 줄 알았더니”

이런 상황 속에서 등장한 것이 협찬 제작이다. 제작비가 부족하다보니 정부나 기업의 협찬을 받아 제작비로 쓰는 것이다. 제작비 전체 혹은 일부를 지원받는다. 대신 협찬사가 원하는 것을 방송에 녹여내야 한다. 공정성도 문제지만 협찬 제작이 관행처럼 굳어지자 방송사는 독립 제작사에 협찬을 당연하게 요구하고, 협찬을 구하지 못하는 제작사는 편성을 폐지당하는 일도 벌어진다. 

하지만 협찬 제작에 대한 정확한 비율은 아직 조사된 적이 없다. 방송사가 공개하기 전에는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배대식 독립제작사협회 사무국장은 “원래는 프로그램 기획안만 통과되면 방송사에서 제작비를 내는 게 맞는데 이제는 협찬을 못 받아오면 못하겠다는 식이다. 공익성을 지키기 위해 협찬을 아예 금지하는 프로그램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협찬비를 받는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이런 관행이 잘 드러난 것이 지난 3월 미주 한인일간지 선데이저널이 공개한 ‘MBN X파일’이다. X파일에 따르면 MBN은 협찬금을 받고 이를 방송에 반영했으며 심지어 MBN미디어렙은 이미 편성이 확정된 프로그램을 협찬 프로그램으로 바꿀 것을 MBN 편성팀에 요구하기도 했다. 미디어렙법에 따르면 미디어렙은 방송 편성에 개입할 수 없다. 법을 위반한 것이다. 이에 대해 방송통신위원회는 지난 16일 과징금 2억4000만 원을 부과하고 시정명령을 내렸다. 

 

   
▲ MBN의 경제포커스. 한전으로부터 협찬금을 받은 대가로 한전홍보성 보도를 내보냈다.
 

분명 1억을 받아왔는데 절반은 어디로?

상식적으로 협찬이 들어오면 제작여건이 나아져야 한다. 애초 방송사가 지급해야 할 몫이 줄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방송사가 송출료 혹은 편성료로 ‘떼 가는’ 비용 때문이다. 기준은 방송사마다 다르고 또 프로그램마다 다르다. 독립 PD B씨는 “A 방송사는 40~60%를 떼고 B 방송사는 30~20%를 정도는 뗀다. C 방송사도 한 30% 뗀다”고 말했다. 

B씨도 3부작 프로그램에 2억4000만원을 지원받았는데 방송사에서 총 1억3800만원을 가져간 적이 있다. A씨는 “1억을 받으면 국내 촬영물은 보통 4000만원, 해외 2개국 정도를 더 촬영하게 되면 5000만원에서 5500만원 정도를 받는다”며 “기획안 작성, 구성안 작성 등 제작사가 전 과정에서 노력을 해서 협찬을 섭외해도 받는 돈을 절반”이라고 밝혔다. 

B씨는 “방송사에서 제작비도 안 주는데 자기네 채널에 틀어준다는 이유로 1억 가운데 4000만원을 떼가는데 이유를 모르겠다. 지상파는 광고료도 수익원이다. 재방송하면 재방료도 받아간다. 문제 있는 거 아닌가? 협찬처에서 1억 원을 주면 1억 원에 상응하는 프로그램을 원하는데 편성료 때문에 1억짜리를 만들 수가 없다”고 말했다. 독립 PD들이 협찬 제작을 더 억울해하는 이유다. 

비판에 대해 방송사들은 언급을 꺼려하면서도 같은 대답을 내놓는다. 협찬이 독립제작사만 보고 지급하는 돈이 아니라, 방송국에서 방송되는 것에 대한 대가도 포함된 금액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방송사 PD들이 독립제작사와 함께 프로그램의 전체 방향 등을 조율하는 것의 비용도 여기 포함된다는 주장이다. 가편시사, 수정시사, 종편시사 등의 과정이 여기 속한다. 

 

   
▲ 아프리카 케냐 마사이마라에서 박환성PD 가 MBN법 제정을 촉구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독립PD협회 제공
 

이러다가 외주 시스템 붕괴된다

지나치게 불공정한 관행은 시스템 자체를 위협한다. 이창준 PD는 “하도 빨아먹으니까 들어오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그도 다수의 외주 제작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나 최근에는 독립 다큐멘터리를 만든다. 그는 “사실 30대 중후반 이후에는 방송 쪽 일을 할 수 없다. 제작 환경은 열악하고 그렇다고 마음껏 퀄리티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7~8년 전부터 해외로 눈을 돌리는 PD들이 많다”고 말했다. 

조연출이나 작가도 마찬가지다. 이 PD에 따르면 외주 제작 시장에 들어오려는 능력있는 신입들이 점점 줄고 있다. 언론사 채용공고를 봐도 외주 제작 조연출을 구하는 게시물은 하루가 멀다하고 올라온다. 이 PD는 “외주 제작 시스템이 서서히 붕괴하고 있다는 증거”라며 “이건 결국 대부분을 외주 제작에 의존하고 있는 방송사의 손해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2014 방송산업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MBC(본사)와 SBS의 외주제작 비중은 각각 61.7%, 53.3%에 이른다. 

이에 대해 언론노조와 협회는 외주제작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영국의 사례가 참고할만하다. 영국 오프콤은 제작비와 관련해 장르별 표준제작비를 방송사와 외주제작사가 정해 발표할 것을 의무화하고 있다. 가령 BBC는 드라마, 예능, 교양, 어린이 4개 대장르를 먼저 구분하고 그 아래 하위 32개 카테고리를 분류해 세부설명과 함께 시간당 제작비 범위를 명시하고 있다.
 
언론노조는 “이를 한국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방송법을 개정해 외주제작 가이드라인을 제정하거나 별도의 독립된 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방송통신위원회 곽진희 과장은 “독립 제작사가 불공정거래를 신고하면 방통위에서 시정을 명하거나 권고를 할 수 있는 법 개정안이 법사위에 계류된 상태"라며 "방통위도 불공정거래 규제감독에 대해 신경쓰고 있다”고 밝혔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