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로서 자식을 나라의 창조신께 기뻐하며 바쳐라. 귀여운 자식이 호국의 신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받들어 모셔질 영광을 인식하자”

이는 1943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전선공직자대회에서 김용주 당시 경북도회 의원(창씨명 가네다 류슈)의 발언이다. 이 행사는 일제가 징병제 실시에 대해 감사하고 일제의 적국인 미국과 영국을 격멸할 것을 결의하기 위한 공직자들의 모임이었다. 이 모임에 참석한 공직자 중 조선인은 두 명이었다. 경북지역 대표적 친일파인 서병조와 김무성의 부친 김용주.

이런 김용주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있다. 지난달 15일에는 김용주 평전인 <강을 건너는 산>도 출간됐다. 이 책을 출판한 ‘청어’는 이 책을 “광복 70주년 기획, 새로운 역사인물 찾기”라는 설명을 달아 “그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제거 명단 중 포항지역 총살 대상 1호였다. 현대사의 격랑 중, 오해와 왜곡 속에 감춰진 한 애국자의 진실”이라고 포장했다. 

   
▲ 해촌 김용주. 자료=민족문제연구소 제공
 

김용주 평전은 인터넷 매체 ‘브레이크 뉴스’를 통해 <김무성 대표 부친 김용주는 친일파가 아니라 애국자!>라는 제목의 기사로 연재되고 있다. 17일 현재 총 18회에 걸쳐 기사가 올라왔다. 그 외에도 각종 블로그, 인터넷 매체 등을 통해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부친이 친일파가 아니라 애국자라는 글은 다수 존재했다. 

김용주는 지난 2009년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이에 민족문제연구소는 “출간 당시에도 밝혔듯이 재원과 자료의 부족으로 전면적으로 조사할 수 없었다”며 “김용주가 친일행위자가 아닌 것이 아니라 추가조사가 필요했기 때문에 보류했다”고 밝혔다. 17일 민족문제연구소는 1차 사료들을 분석해 김용주를 ‘명백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다. 

김 대표는 지난 2013년 9월 월간중앙과 인터뷰에서 부친의 친일 행적에 대해 부인했다. 이후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라며 이승만 국부론을 주장하는 등 역사에 대해 미화했다.(지난달 15일 여의도순복음교회) 그는 진보좌파 세력이 준동한다는 이유로 역사교과서를 국정교과서로 바꾸기 위하 노력을 하고 있다고도 했다. (지난 7월 31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그가 부친의 행적을 미화하며 숨기고 싶었던 역사는 무엇일까? 17일 민족문제연구소는 김용주에 대한 친일경력에 대한 입증 자료를 공개했다. 

   
▲ 1944년 7월 9일 아사히신문에 실린 "결전은 하늘이다! 보내자 비행기를!"라는 제목의 광고. 일제에 전투기를 헌납하자는 내용의 기명광고인데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부친 김용주의 이름이 등장한다. 자료=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연구소에 따르면 김용주의 친일행적은 경상북도 도회의원 시절인 1940년 이후부터 발견됐다. 그는 도회의원으로서 1940년 2월 23일 “국체명징관 내에는 내선관계의 역사적 연원을 증명하는 자료를 진열해 내선일체의 정신적 심도를 올릴 것”이라고 말했다. (동아일보 1940년 2월 27일자) 국체명징관은 내지(일본)와 조선이 한몸이라는 ‘내선일체’를 촉진한다는 목적으로 세운 건물이다. 

김용주는 대구 국체명징관에 1000원, 대구 신사에 2000원을 헌납했다. (일본동맹통신사, 330~332쪽) 김용주는 애국기(전투기) 헌납운동도 주도했다. 그는 1941년 조선인의 전쟁협력을 위해 결성한 최대 민간친일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 경상북도지부 상임이사에 선임됐다. 경북지부는 1942년 2월 군용기 5대를 헌납했다. (매일신보 1942년 2월 27일자)

김용주가 활동했던 경북 영일군에서 애국기 헌납 비율이 가장 높았다. 1942년 2월 당시 경북 영일군에서 애국기 3기를 헌납했기 때문이다. 같은해 12월이 되면 경북 영일군에서만 애국기 7기를 헌납하게 된다. 

김용주는 애국기 헌납 선동 기명 광고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1943년 9월 8일자 아사히신문에는 “대망의 징병제 실시, 지금이야말로 정벌하라, 반도의 청소년들이여”라는 제목의 광고가, 1944년 7월 9일자 아사히신문에는 “결전은 하늘이다! 보내자 비행기를!”이라는 광고가 실렸는데 모두 김용주의 이름이 실려있다. 

   
▲ 1943년 9월 8일 아사히신문에 실린 "대망의 징병제 실시, 지금이야말로 정벌하라, 반도의청소년들이여"라는 제목의 광고.징병제를 찬양하는 내용의 기명광고인데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부친 김용주의 이름이 등장한다. 자료=민족문제연구소 제공.
 

김용주는 국민총력경상북도수산연맹 이사로 선임되기도 했다. (매일신보 1941년 5월 20일자) 이 조직은 조선민중을 강력히 통제하고 동원하기 위해 조직된 전시 최대 관변통제기구인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직역별 산하연맹이다. 그는 5개월 뒤인 1941년 10월 8일 친일파 문명기와 함께 국민개로운동을 독려하기도 했다. 국민개로운동은 일제가 전쟁 수행에 필요한 조선인을 동원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처럼 1차 사료를 제시해 김용주를 친일파로 규정했다. 또한 최근 출간된 김용주 평전<강을 건너는 산>이 객관적인 사실이 다수 틀렸으며 친일행적을 감추고 친일세력을 미화했다고 평가했다.

기초적인 사실관계의 오류는 저서의 신뢰도를 떨어뜨린다. 김용주의 회고록 <나의 회고록 풍운시대 80년>(1984년)과 거의 흡사한 평전에는 모두 경상북도 도회의원 당선 사실과 관련해 “나는 당선됐다. 때는 1935년, 내 나이 불과 31세, 국내 최연소 도회의원”이라고 했지만 처음 당선된 해는 1937년이며 나이는 33세였고, 당시 최연소 당선자는 황해도 도회의원인 이흥엽(29세)이었다. 이런 오류는 회고록이 나온 지 30여년이 흘렀지만 수정되지 않은 채 평전에도 그대로 실렸다. 

관련 자료가 없어 확인이 되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평전 153~154쪽에는 “중국에 있는 대한광복군”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당시 이런 조직은 없다. 한국광복군의 오류로 보인다. 또한 “조선 전토를 여러 군관구로 나눴다”고 나오는데 연구소에 따르면 당시 조선 전체는 하나의 군관구였다. 

해당 쪽에는 김용주를 애국자로 미화하는 부분도 있었다. 평전에는 “미군이 조선지역에 폭격을 시작하면 곧 전토에 계엄령이 발포되는데 계엄이 발포되면 즉시 특정 조선인 8명을 체포 총살하라는 지시가 왔다. 그 명단 중 제1호가 바로 포항의 김용주”라고 나온다. 하지만 연구소는 “일제가 전시계엄을 선포한 것은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을 치를 때 뿐”이라며 “근거없는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노컷뉴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번 자료 공개가 연좌제가 아니냐는 비판에 대해 “친일행위자의 후손이나 연고자가 친일인물을 기념하는 경우, 친일행적을 부인하거나 왜곡하는 경우, 친일청산운동을 방해하는 경우에만 친일행적을 공개한다”며 “김무성 대표의 경우 이 세가지를 모두 충족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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