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TV를 켠다. 오전 9시 30분, SBS에서 ‘TV동물농장’이 방영된다. 2001년부터 이어져오고 있는 장수 프로그램이다. 10시 30분, ‘신비한TV서프라이즈’를 볼 차례다. MBC로 채널을 돌린다. 낮잠을 자다보니 오후 5시가 됐다. KBS2 ‘해피 선데이-슈퍼맨이 돌아왔다’를 본다. 오후 6시, SBS에서는 ‘일요일이 좋다-런닝맨’이 방송된다. 저녁을 먹고 쉬다보니 벌써 잘 시간이다. 오후 10시 반 KBS2에서 하는 ‘다큐멘터리 3일’을 보다가 잠이 든다. 

누구나 한번쯤 봤을 법한 TV프로그램들이다.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독립 PD가 제작했거나 혹은 독립 PD들이 제작에 기여한 비율이 높다는 점이다. 방송통신위원회가 발간한 ‘2014 방송산업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지상파 방송과 방송채널사용사업자의 외주제작 비율은 28.8%에 이른다. 독립 PD들은 외주제작 PD를 말한다. 이들은 창작 주체로서의 긍정성, 독립성을 드러내기 위해 스스로 독립 PD라고 부른다. 

하지만 ‘독립’된 이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보호해줄 법으로부터는 ‘소외’됐다. 방송사들의 외주 제작 비율은 증가하지만 ‘외주제작’을 도맡는 이들의 법적 지위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현행 방송법에서는 생산자인 독립제작사에게는 법적 지위를 부여하고 있지 않다. 독립 PD들 대부분은 제작사와도 계약관계다. 고용은 불안하고, 프로그램 제작비는 ‘후려치기’ 당하기 십상인 이유다. 창작자로서의 법적 보호 틀에서 ‘독립’된 이들의 목소리를 미디어오늘이 들어보았다. 
- 편집자주

 

   
▲ 지난 7월 열린 방송사 외주제작 프리랜서 노동인권실태 긴급 증언대회. 사진제공=언론노조 이기범 기자
 

지난 6월 MBN 파일럿 교양프로그램 예비영상 제작을 맡은 독립 PD가 MBN 소속 PD에게 얼굴을 맞아 안면골절 부상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들이 처음 만난 날 술자리에서 발생한 일이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신고로 경찰까지 출동했다. 병원으로 가는 게 정상이지만 가해자와 피해자는 방송사로 돌아가 시사(독립 PD가 만든 프로그램을 해당 방송국 PD에게 보여주며 조율하는 과정)를 마저 진행해 논란이 됐다. 

외주제작 프로그램이 방송되기 위해서는 프로그램을 만든 독립 PD와 프로그램이 방송될 방송국 소속의 PD 사이의 조율이 필요하다. 조율 과정은 대개 기획안 미팅, 가편 시사, 수정 기사, 종편 시사, 납품 순으로 구성된다. 이 과정에서 ‘절대 갑’은 방송사 PD다. 구조적인 요인이 크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인의 횡포가 용인되는 건 아니다. 독립PD협회(협회)가 8명의 독립 PD를 인터뷰한 내용을 기사로 재구성했다. 

기획안 미팅… 첫 만남에서 대뜸 욕설

지난 3월 방송사 CP(총괄 프로듀서)와 처음 미팅을 하러 간 날이었다. 오후 2시께 18년차 독립 PD인 ㄱ씨와 후배 PD, 작가가 방송국을 찾았다. ㄱ씨에 따르면 해당 CP는 거의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술에 취해 있었다. 문제는 이후에 발생했다. CP는 이미 안면이 있던 후배 PD에게 “야 이 XX놈아, 니가 뭘 아냐” 라며 욕을 하기 시작했다. CP는 한 시간 반 동안 욕설과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후 욕설을 한 CP는 “윗선에 있는 부장이 힘들게 해서 (자기가) 그렇게 했다. 미안하다”고 ㄱ씨에게 말했다. ㄱ씨는 “방송사 내부에서 어떤 문제 때문에 자기 부장한테 혼이 났고 그것 때문에 열이 받아서 술을 먹었고 그렇게 와서 애꿎은 우리에게 그런 행동을 한 거죠”라며 “이해 안 가시죠?”라고 되물었다. 

 

   
▲ 지난 6월 방송된 MBC 시사매거진 “방송하고 싶으면...”. 위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합니다
 

“시사, 괜찮다고 하면 오히려 불안해요”

시사는 보통 가편집 시사, 수정 시사, 종편 시사 등의 과정을 거친다. 시사 과정에서도 폭력과 폭언이 자주 발생한다. 경력 15년차인 독립 PD ㄴ씨는 “기본적으로 CP들의 태도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ㄴ씨가 겪었던 CP는 책상 위에 편집기 데크가 있으면 거기에 발을 올려놓고 “야 이 새끼야, 틀어봐”라고 말했다. 그리고 잤다. 하지만 ㄴ씨는 혼날까 싶어 CP를 깨우지 못했다. 

시사가 끝나자 CP는 ㄴ씨에게 “가, 이 새끼야. 뭐 봤나? 뭐 틀었냐? 괜찮지?” 라고 말했다. ㄴ씨는 이런 경우가 잦다고 증언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보니 독립 PD들은 어느새 스스로 갑질에 길들여졌다고 느낀다. 18년 경력의 독립 PD ㄷ씨는 시사할 때 방송국 PD가 “뭐 괜찮네요. 해오세요”라고 하면 오히려 부담스럽고 불안하다고 털어놨다. “굉장히 슬픈 이야기인데 매 맞는데 길들여진…” ㄷ씨는 이 부분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시사 후 회식자리… “무릎꿇고 하이힐에 담긴 술을”

ㄷ씨가 방송사 아침 방송을 제작할 때 겪은 일이다. 다음날 아침 방송을 앞두고 회식을 하던 중 노래방에 가게 됐다. 해당 프로그램은 작가가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노래방에서 방송국 PD가 독립 PD들에게 말했다. “우리 작가 말 잘 듣고 앞으로 충성을 결심하겠다는 다짐으로 술을 한 잔씩 받아라.” ㄷ씨는 무릎을 꿇고 술을 받았다. 그런데 술잔이 아니라 작가의 하이힐에 술이 담겨져 왔다. ㄷ씨는 “그 작가도 굉장히 불편해했다”고 덧붙였다. 

독립 PD ㄹ씨는 방송사 상급자 PD와 저녁 식사 중에 이야기를 나누다가 폭언·폭행을 당했다. PD 입봉(처음으로 영상을 만드는 것)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어떤 사안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ㄹ씨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더니 방송사 PD는 “뭐? 뭐라고 이 새끼야. 지금 말대꾸야?”라며 ㄹ씨 뺨을 때렸다. ㄹ씨는 “풀스윙으로 때린 거여서 얼굴이 붓는 정도”라고 기억했다. 

하지만 ㄹ씨는 병원 진단은 따로 받지 않았다. “어차피 이슈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방송사 PD는 다음날 사과하고 모든 걸 보상하겠다고 했다. ㄹ씨는 해당 방송사 PD와 다시 친하게 지냈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PD가 돼야 되니까 친하게 지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다만 그는 당시 상황을 녹음으로 남긴 다음 “다른 후배한테라도 이런 일이 발생하면 상습 폭행으로 같이 집어넣겠다”고 말했다. 

   
▲ 2014 방송산업 실태조사 보고서
 

“너 이제 각오해”

독립 PD라는 이유만으로, 전혀 관계없는 방송국 관계자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때도 있다. ㅁ씨는 주차장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곤혹을 치렀다. 방송사 시사를 마치고 나왔는데 이중 주차돼 있는 차를 밀어서 뺐던 것이 화근이었다. 며칠 뒤 방송사 PD라는 차 주인이 전화가 와서는 “당신이 아슬아슬하게 차를 밀어놔서 들어서 차를 뺐다”고 말했다.
 
ㅁ씨는 CCTV까지 본 다음 자신을 찾았다는 데 대한 놀라움 보다는 차 주인이 이후에 한 말이 더 놀라웠다고 말했다. 차 주인은 “당신 지금 무슨 프로그램하지? 그 CP가 누구야”라고 물었다. ㅁ씨가 CP 이름을 알려주자 그는 “어 알았어. 당신 프로그램도 이런 식으로 만들어? 내 성격, 나 누군지 모르지? 이 방송국에서 누군지 모르지? 알았어 끊어. 너 이제 각오해” 라고 말했다.

독립PD협회와 전국언론노동조합이 독립 PD 175명을 상대로 한 ‘독립 PD 노동인권 긴급 실태조사’에 따르면 업무와 관련하여 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답한 비율은 응답자 96명 중 17명(17.7%)이고 이 중 가해자가 방송사와 독립제작사 소속 관리자 및 직원인 경우는 80.0%에 이른다. 여성 독립 PD의 경우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희롱이나 추행 등 성폭력을 당했다고 답한 비율은 응답자 32명 중 14명(43.8%)이다. 언론노조 관계자는 “인권침해 질문은 타질문에 비해 무응답률이 압도적으로 높았다”라고 말했다. 

 

   
▲ 전국언론노동조합(언론노조, 위원장 김환균)이 지난 4월 미디어산업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위한 전략 조직화 사업 ‘미로찾기’를 출범했다. 사진=김도연 기자
 

“방송사 CP는 신이다”

여기에는 방송사 PD가 많은 권한을 갖는 구조가 있다. 특히 책임 프로듀서인 CP는 ‘신’이라 불릴 정도다. CP는 프로그램 내용은 물론이고 스탭, 작가, 연출 PD, 제작사까지 바꿀 수 있으며 심지어 방송 여부를 결정할 때도 있다. 독립제작사나 독립 PD들 입장에서는 CP에게 문제제기를 하기 쉽지 않다. 문제제기가 문제제기로 끝나지 않고 생계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문제제기를 한다해도 해결된 사례가 드물다는 경험도 구조를 고착화 시키는 데 한몫했다. 가령 지난 2012년 성추행에 가까운 일을 당한 여성 독립 PD가 방송사에 문제를 제기했으나 방송사는 “가해자 PD가 퇴직했다”며 되레 거짓말을 하며 가해자를 감쌌다. 피해자 PD는 사실상 업계에서 은퇴했다는 게 주변의 진술이다. 복진오 독립PD협회 권익위원장은 “말을 해봤자 해결이 안 되고 오히려 갑과 껄끄러워지니까 아예 이야기를 안 꺼내는 문화가 자리잡아 버렸다”고 말했다. 

그래서 독립 PD들은 이번 MBN 사건과 관련한 1인 시위 역시 쉽지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이승구 PD는 “거기(MBN 본사 앞) 서 있으면 찍힌다는 이야기가 오갔다”며 “1인 시위는 그런 불이익을 각오하고 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미 PD는 “예전에는 문제제기를 하면 블랙리스트가 돈다는 말까지 있었다”며 “생계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나서는 것을 굉장히 무서워한다”고 말했다. 

 

   
▲ 아프리카 케냐 마사이마라에서 박환성PD 가 MBN법 제정을 촉구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독립PD협회 제공
 

독립 PD-방송사 PD 공동의 신고센터 마련돼야

이번 사건의 긍정적인 면은 그동안 쉬쉬해왔던 문제를 해결하자는 논의가 오간다는 것이다. 단기적인 대책으로는 MBN이 밝힌 신고센터 등이 있다. 복진오 PD는 “지상파의 방송협회와 독립PD협회 등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공동신고센터도 하나의 방법”이라며 “설령 피해자가 원하지 않더라도 사건이 알려지게 되면, 사건을 조사해 이에 맞게 징계하고 처벌하는 것 역시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장기적으로는 이를 강제할 수 있는 법이 필요하다는 게 독립 PD들의 목소리다. 실제 이번 사건을 통해 독립 PD들은 이른바 ‘MBN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이 법에는 △방송사-독립제작사 표준계약서 작성 의무화 △독립 PD인권침해 감시하는 독립PD인권감시기구 출범 △방송통신위원회의 독립 PD 실태조사 정례화 등의 내용이 담길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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