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의 창업주인 최종건은 1926년 수원의 지주였던 최학배의 4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최종현은 바로 아래 동생으로 1929년생이다. 최종건은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한 뒤 1944년 4월 선경직물 수원공장에 입사했다. 국내의 일본인 포목상인 선만주단(주)과 일본 관서지방의 교토(京都)직물이 합작해 세운 회사인 선경은 1943년부터 수원시 평동에서 조업에 들어갔다. 최종건이 입사한 지 4개월 뒤 선경직물은 조선총독부의 기업정비령에 의해 조선직물주식회사와 통합되어 인견과 군복 안감인 시루빠(Silver)를 직조하고 있었다. 전시물자 생산이 본격화되면서 최종건은 입사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100여명의 제직(製織)조 여공을 관리하는 생산부 제2조장이 되었는데, 당시 선경직물의 종업원은 200여명 정도였다.

일제 패망 이후 선경직물이 조업을 재개한 것은 1946년 2월이었는데 당시 21세였던 최종건이 생산부장에 임명됐다. ‘SK 60년사’  등엔 최종건이 8.15 해방 무렵 선경치안대를 조직해 일본인들의 무사 귀국을 돕고 공장 보호에 앞장섰다고 나오는데, 그 공을 회사에서 높이 산 것으로 보인다. 최종건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7월 선경직물에 대한 우선불하권자인 차철순 등과 적산불하를 얻어냈다. 당시 최종건의 나이는 27세였다. 당시 적산불하는 장기분납과 농지증권(액면가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다)으로 대납이 가능한데다 지속적인 고인플레로 인해 말 그대로 ‘횡재’ 였다. 전후의 물자부족 상황에서 선경직물은 닭표 안감과 봉황새표 이불 안감, 곰보표 나일론 생산 등으로 50년대 말엔 종업원 1천여명에 이르는 기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지방기업에 불과하던 선경이 대기업으로 성장하게 된 건 1960년대에 들어서다. 

최종건은 용인 출신의 이병희(중앙정보부 서울분실장, 공화당 국회의원)와 친분이 있었고, 이병희가 5.16 쿠데타에 가담하면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통해 박정희에게까지 선이 닿은 것이다. ‘최종건 평전 위원회’ 의 <공격경영으로 정면 승부하라>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난 지 4개월이 지난 1961년 9월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신분인 박정희가 수원의 선경직물을 방문한 것으로 돼 있다. 

   
▲ 1960년대 초 선경직물 공장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과 최종건 회장
 

“다음 날, 박정희 의장이 선경직물을 방문하고 돌아갔다는 소문이 퍼지자 여기저기서 최종건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 너도나도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막혔던 자금줄이 저절로 풀렸다.”

박정희 군부의 지원을 받으며 선경은 1962년 닭표 안감의 홍콩 수출을 시작으로 무역회사인 선경산업주식회사 설립, 63년 첫 금탑산업훈장, 66년 선경화섬 설립 등 고도성장을 이룬다. 선경은 1967년 일본 데이진과 합작해 일간 생산 7톤 규모의 폴리에스테르 원사 공장을 짓기로 하는데, 이때 선경의 자금 조달 능력에 회의적이었던 데이진 측이 부사장 나카지마를 한국에 보낸 일이 있었다. 이 때 최종건이 나카지마를 초대한 선운각 연회엔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인 이후락과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 박충훈, 상공부 장관 김정렴이 동석했다. 방충훈, 김정렴 등은 최종건과 가까운 이후락이 부른 사람들이었다. 데이진은 68년 3월 합작투자 협약을 체결했고 곧 폴리에스테르 원사공장이 착공됐다. 

박정희 군부는 SK측이 책임져야 할 공장건설자금 694만 달러를을 지원했는데 원래 조건은 폴리에스테르 원사를 전량 수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군부는 원사 생산 개시에 맞춰  국내 시판을 허용해줬고 이는 선경이 업계 1위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된다. 1969년 당시 폴리에스테르 예상수요량은 4765톤이었고 폴리에스테르 생산을 거의 독점했던 선경의 연간 생산능력은 2555톤이었다. 선경의 제품은 날개돋힌 듯 팔려나갔다. 

군부 정권 하에서 선경의 입지를 확인시킨 것은 워커힐 호텔 인수였다. 최종건 회장이 워커힐 불하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것은 1972년 12월 초. ‘SK 60년사’ 에 따르면 1972년 12월29일 박정희 대통령은 선경의 인수 의사를 보고 받고는 곧바로 “선경에 매각하시오”라며 결재서류에 사인했다. 원래 인수자는 한진그룹으로 잠정 결정이 나 있었지만, 선경과 밀월관계에 있던 이후락은 당시 권부의 최고 실세였다.
 
1973년 최종건의 사망 이후 동생인 최종현이 선경 그룹의 회장에 올랐는데, 이후 선경개발(관광), 서해개발(조림), 선경유화(DMT공장), 선경석유(정유공장), 선경금속, 선경매그내틱(오디오테이프), 선경종합건설(건설), 선경머린(요트)을 설립하는 등 사업다각화에 나선다. 70년대 말이 되면 선경은 군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재벌그룹의 반열에 들어서게 된다. 

선경이 국내 5대 재벌그룹으로 도약한 계기는 1980년 대한석유공사(유공) 인수였다. 

1980년 유공 인수는 아직까지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유공은 1962년 한국 정부가 미국 걸프사와의 합작으로 설립한 독점 정유회사였다. 선경은 1980년 걸프사가 보유한 지분 50%를 대한석유공사를 통해 재매입하고 5년 뒤엔 나머지 50%도 인수한다. 당시 선경의 유공 인수는 ‘새우가 고래를 먹었다’ 는 평을 받았다. 

당시 공기업인 유공의 위상은 어느정도였을까? 선경이 유공을 인수하기 전인 1978년에 발표된 대기업 외형 순위를 보면 유공은 전년도 결산법인 가운데 외형액(매출)이 6281억으로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선경그룹 전체로 보면 선경과 선경금속이 50위권 내에 들어와있지만 두 계열사의 매출액(1206억과 687억)을 합쳐도 유공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유공의 매출 순위는 75년과 76년에도 역시 1위였다. 79년의 매출액을 보더라도 유공은 매출액이 1조원을 돌파하며 ‘불황 속의 호황’ 을 누리고 있었고, 이는 선경의 10배 수준이었다.  

최동규 전 동자부장관은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이라는 에세이에서 “1994년 전두환 대통령이 백담사에서 돌아온 후 내가 초청해 골프를 치던 중 11년 전에 있었던 일이 되새겨졌다”면서 “그때 유공을 선경에 넘기게 한 사람은 보안사령관이었던 노태우야, 나도 몰랐어.”라는 전두환의 말을 전한 바 있다. 유양수 전 동자부장관은 ‘공직과 소신’이란 에세이에서 “1980년 6월 중순 모처로부터 유공 민영화 검토 제의를 받았으나 당시 유공의 지분 50%를 소유한 걸프사 지분을 정부가 전량 인수, 국유화하는 것이 최우선책이라는 소신을 밝혔다. 이후 1980년 7월 하순 선경의 C회장(최종현)이 장관실로 직접 찾아와 단도직입적으로 유공을 자기에게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그로 인해 유공 민영화를 독촉하던 고위층의 뒤에 C회장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라고 술회한 바 있다. 선경 회장 면담 2주후 “동자부 차관과 관계실장 및 국장이 국보위에 불려가 유공 불하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을 작성-보고하라는 지시를 받고 왔다”고도 했다. 이에 대해 SK는 “SK와 노 전대통령의 인연은 1989년에 시작됐다”면서 “유공 민영화 추진은 1980년 최규하 대통령 시절 진행됐다. SK가 유공을 인수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원유공급 능력이 국내 민간기업 중 가장 우수했기 때문”이라고 해명한바 있다. 

   
▲ 1970년 박정희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임명장 수여. 사진=국가기록원.
 

이렇듯 유공 인수는 노태우의 작품으로 알려져있다. 최종현의 아들 최태원과 노태우의 딸 노소영이 혼인한 것은 그로부터 8년 뒤인 1988년이다. 월간조선 2010년 3월호에 실린 전 수방사령관 안병호(안병규 전 민정당 국회의원의 동생)의 증언에 의하면 유공은 원래 하나회 출신의 K씨를 통해 로비를 했던 삼성의 몫으로 정해져 있었는데, 노태우가 선경에 주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유공 인수와 관련해 노태우와 최종현이 언제,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는 드러나있지 않다. 그러나 최근 밝혀진 사실들에 근거하면 이 역시 이후락 측의 연결선이 배경이 된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이후락은 그의 4남 이동욱과 최종건의 4녀 최예정을 통해 SK와 연결되어 있는 동시에, 이후락의 외동딸인 이명신 역시 선경의 부사장이 되는 정화섭과 결혼한다. 정화섭은 최예정의 가정교사로 있다가 이후락의 눈에 들어 중앙정보부 국장, 흥국상사 부사장, 선경 부사장 등으로 이름을 올렸고, 박정희의 해외비자금 관리책으로 추측되는 인물이다. 

실질적으로 유공의 지분을 SK에 넘긴 걸프사와 한국 사이를 연결하고 있던 것이 바로 이후락의 사위 정화섭이다. 재미언론인 안치용씨가 발굴한 미국 프레이져 청문회 보고서에 따르면 걸프사는 1969년 서정귀(이후락과 사돈관계, 호남정유 사장, 4~5대 국회의원) 명의의 스위스 비밀계좌를 통해 박정희에게 20만달러의 정치자금을 제공했고 이 돈을 이후락이 찾아갔다는 것이다. 또한 청문회 보고서엔 정화섭이 서정귀의 명의로 된 박정희의 비밀계좌를 관리했다는 이동훈(이후락의 차남)의 증언도 나온다.  

고 문명자 재미언론인은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서 “걸프, 칼텍스, 유니언 오일 등 미국의 국제적 석유자본들은 기름값을 정부가 결정하는 한국에서 석유 공급을 독점함으로써 폭리를 취하고 그 대가로 박정희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했다. 그것을 관리한 것이 이후락 일가였다”고 기록한 바 있다. 

SK가 인수한 두번째 공기업은 한국이동통신이었다. 이 과정에도 노태우와의 혼맥이 얽혀있다. 

한국전기통신(현 KT)이 무선호출과 휴대전화 서비스 등을 위해 자회사로 출범시킨 한국이동통신은 노태우 정권 하에서 민영화 논의에 들어갔는데, 제2이동통신사업자를 선정해 경쟁 체제를 도입하는 것이 그 1단계였다. 제2 이동통신은 1992년 선경, 포항제출, 코오롱, 쌍용 등이 경쟁하는 구도가 되었는데, 최종 심사에서 선경이 압도적인 1위를 기록했다. 이동통신은 당시 정권의 최대 이권 사업이었던 만큼 이같은 결과는 노태우 대통령의 사돈 기업에 대한 특혜라는 정치적 논란을 불러왔다. 결국 청와대의 권고로 선경은 제2이동통신사업권을 반납하게 되는데, 이후 김영삼 정권 시절인 1994년에 선발주자였던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하고 99년엔 신세기통신을 인수하면서 이동통신업계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1995년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검찰수사 과정에서 최종현 회장이 사돈인 노태우에게 30억의 뇌물을 공여한 사실이 드러났을 뿐, 선경의 이동통신 인수 과정은 아직도 상당부분 베일에 가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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