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오늘은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 소장의 시리즈 인터뷰, 논(論)과 쟁(爭)을 연재합니다.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을 시작으로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최장집 고려대 정치학과 교수, 박상훈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위원 등의 인터뷰가 예정돼 있습니다. 이 릴레이 인터뷰는 도서출판 답과 함께 진행하고 향후 인터뷰 전문은 따로 책으로 묶어 출간될 계획입니다. <편집자 주>

강준만 교수는 전북대 신문방송학과에 재직 중이다. 강준만 교수는 금기나 고정관념에 과감하게 도전해왔다. 실명 비판을 통해 공인의 허명을 깨트리는 데 앞장섰고, 날이 시퍼렇게 선 통찰로 문제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다. 강 교수는 남들이 못 보는 점을 자극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국 사회의 큰 판을 어떻게 구성할지에 대해서도 경륜을 보여주는 전략적 이론가(strategic theorist)이기도 하다.

이철희 -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전북대 캠퍼스를 봐서 좋은데, 게다가 연구실에 커피와 생수까지 미리 준비해 놓으셨네요. 고맙습니다. 오늘 강준만 교수님을 뵙기 위해 <싸가지 없는 진보>란 책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밑줄 그으며 정독했는데요, 저도 거의 전적으로 동의하는 내용이라 반가웠습니다. 동의율로 따지면 99.9%쯤 될 것 같은데….

강준만 - 0.1%는 뭐예요?

이철희 - 제가 0.1% 이견을 보이는 부분은 이 대목입니다. 전중환 교수가 2013년 10월 29일 한겨레 에 ‘보수와 진보의 도덕’이란 제목으로 쓴 칼럼에 나오는 인류학자 리처드 슈베더의 연구결과를 인용하셨더군요. “유권자들은 경제적 이득이 아니라 도덕적 가치에 따라 투표한다.” 저는 평소 사회· 경제적 약자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프레임(frame)을 만드는 게 핵심인데, 그것을 못해주고 있는 게 야권의 무능 중에 핵심이다, 한 마디로 그들은 그럴 의지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다, 저는 이렇게 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그런 것을 전제하지 않고 도덕을 얘기하면 자칫 품성론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이렇게 가면 사회·경제적인 프레임도 없이 이기려고 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 온테이블
 

강준만 - 이 소장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거든요. 제가 생각하기에도, 그게 진짜 정치가 돌아가는 단계죠. 그런데 우린 아직 거기까지 못 갔다는 거예요. 때문에 ‘싸가지’란 개념으로 메신저(messenger)에 대해 이미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 상황에선 메시지(message)가 의미 없다는 거예요.

궁극적으로는 저도 이 소장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유권자가 거기까지 신경 써서 새정치민주연합이 이번에 내놓은 안이 내 이해관계를 잘 대변해 주고 있는지를 따지는 단계로 못 가고 있다는 얘기죠. 기본적인 신뢰가 없어요, 그 집단에 대해서.

이철희 - 요컨대, 싸가지가 없으니 무슨 말을 하는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말씀이네요. 그렇다면 동의 안 할 도리가 없군요. 약간만 첨언하겠습니다. 대개 진보 또는 진보를 표방하는 정치세력은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이해를 대변해주는 프레임을 짜야 한다, 그걸 제대로 못하면 그 틈을 보수가 파고들어 문화나 민족 관련 어젠다를 동원해 프레임을 전치(replacement)시키려 한다, 특히 양극화가 심한 경우 진보가 사회·경제적 프레임을 고수하려 하면 반대로 보수는 그걸 용인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일종의 샅바싸움인데 진보가 여기에서부터 지고 있다, 저는 이런 점들을 강조합니다. 반면에 교수님은 그거보다 조금 더 앞으로 가서 메신저에 문제가 있으니 메시지는 아예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 거죠.

강준만 - 그렇죠, 그렇죠. 그 단계까지 우리가 아직 못 갔다는 거죠.

이철희 - 그게 교수님이 얘기하는 싸가지론의 기본 논지군요. 구구절절 동의 또 동의합니다. 철학자 롤스(John Rawls)가 말하는 “옳음이 좋음에 우선한다” (the right is prior to the good) 명제를 정확하게 반대로 비튼 것이라 할 수 있네요.

강준만 - 싸가지가 아니라 메시지라는 말, 이 말이 옳긴 옳죠. 다만, 말하는 사람이 싸가지가 없다 보니 국민의 관점에서는 메신저가 싫어서 그 메시지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 상황이라는 얘기를 저는 하고 싶은 거죠.

이철희 - 그래서 제가 이런 질문을 드립니다. 왜 이렇게 싸가지가 없어졌을까요? 이 인간들이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을 거 아니에요. (웃음)

강준만 - 이유를 따져보기 전에 한 가지 지적할 게 있습니다. 지금 대부분의 사람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어요. 야권에서도 정치적 성향과 색깔이나 노선 차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총선과 대선이에요. 저는 거기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거든요. 제가 왜 그러냐? 총선·대선이 급하다고 하는 얘기는 그걸 염두에 두고 뭘 자꾸 쏟아내고, 뭘 보여줘야 한다는 거죠. 급하다는 생각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그게 제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저는 다른 얘기를 하고 싶어요. 선거라는 게 상대방이 크게 개판 쳐서 잘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유권자들이 또 속는 줄 알면서도 크게 도와줘서 이길 수도 있어요. 그래서 야권이 집권하면 좋아요. 저도 그 정도의 당파성은 있습니다. 다만, 제가 문제의식을 갖는 건 늘 총선이나 선거 앞두고 반짝 쇼하는 것이 오히려 신뢰를 죽여 버렸다는 겁니다.

뭔가 닥쳤으니까 뭘 해야 된다? 지금까지 비상대책위원회나 혁신위원회를 구성한 게 몇 번 째입니까? 그러니 유권자들도 선거 앞두고 펼치는 연례행사나 이벤트로 볼 수밖에요. 그런 생각이 뇌리 속에 딱 박혀 있으니 뭘 내놔도 그들에게 와 닿지 않는다는 거죠. 제가 열정을 갖고 얘기하고 싶은 주제는 이런 겁니다.

이철희 - 그게 책에서 말씀하신 선거주의(electoralism)이죠. 저도 칼럼에서 그 점을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선거에 이긴다고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선거, 선거한다고 해서 선거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습니다. 선거만 쳐다보고, 선거에 올인하면 일상정치(everyday politics)가 죽고, 역설적이게도 선거 결과도 좋지 않더라는 얘깁니다.

강준만 - 싸가지 없음의 문제는 그 연원이 노무현 정부 1년 차 때에 있었던 민주당 분당 사건이라고 봅니다. 사실 지금도 야권은 그 분당의 연장선상에 있거든요.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때 갈라졌다가 다시 합쳤는데, 뭘 해소하고 다시 합쳤느냐? 분당할 때 바람직한 가치를 기준으로 나뉘었으면 바람직한 일이었겠지만 그게 아니었잖아요. 명분 없이 나뉘었다가 명분 없이 다시 합쳤어요. 그래서 그때의 상처 때문에 지금도 아픈 겁니다.

여기 호남도 철저하게 양분되어 있어요. 가령 여기 정치권 상층부는 대체적으로 친노입니다. 하지만 민심은 친노와 다소 멀어져 있어요. 정치권에 있는 사람들은 대개 지역에서 거느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이들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릴 수 있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그와 달라요. 내부의 분열, 호남 내부 분열이라 할 수 있죠. 저는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봅니다. 세월 말고는 없어요.

이철희 - 에고, 시간이 약(Time heals all wounds)이라는 말씀이네요.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 중에 하나가 망각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죠. 하지만 상처는 아물어도 상흔은 아주 오랫동안 남잖아요.

강준만 -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와 관련해 흔히 기득권이라는 말을 쓰지만 그게 꼭 경제적 이익 때문만은 아니에요. 자존감의 문제일 수 있어요. 그 시절에 잘 나갔고, 그 시절에 뭔가 하거나 이뤄낸 사람은 그때의 체제가 부정당하면 자기 자신도 부정당한다고 생각해요.

   
▲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 소장(왼쪽)과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 온테이블
 

노무현 대통령 때에 여기 이 지역에서 잘 나갔던 사람들이 있잖습니까? 이 사람들은요, 이해관계를 떠나서 자기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계속 침묵해요. 잘잘못을 따지지 않아요. 같은 호남 사람이고, 거시적인 지향점은 같을망정 당장 새정치민주연합을 보는 시각이 틀려요. 비록 짧은 5년이었지만 아직까지도 무서운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타협이 어려워요.

이철희 - 말씀하신 민주당 분당은 열린우리당이 떨어져 나간 건데, 그것이 지금 야권에서 드러나는 많은 문제의 연원이고 핵심이라는 얘기군요. 사실 싸가지 없음이라는 것도 생산적인 측면도 있잖아요. 왜냐하면 싸가지 없게 기성 주류나 그 질서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아야 그에 도전할 수 있는 거니까요. 승복하고 받아들이면 그런 도전이 생기기 어렵죠.

저는 노무현 모델에 그런 생산적인 싸가지 없음의 측면이나 정신이 들어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게 노무현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 예컨대 친노로 불리는 사람들로 가면서 속화(俗化)된 것 같아요. 싸가지 없음의 생산적 측면이 사라지고 천박해진 거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살아 계신다면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아요. ‘나는 친노가 아니다.’ 마르크스가 ‘난 마르크시스트가 아니다’라고 한 것처럼.

강준만 - 그 싸가지 없음을 생산적이냐, 비생산적이냐 하는 것으로 분류할 수도 있지만 인물 중심적 싸가지가 가장 큰 문제예요.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요. 예를 들어서 우리나라의 중요한 현안들을 놓고 대화하면 얘기가 돼요, 됩니다. 노동문제, 남북문제 등등 다 돼요. 생각이 비슷해요. 단, 누가 그걸 잡아서 해야 되느냐 하는 차원에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싸가지라는 것도 내가 지지하는 인물, 내가 지지하는 세력인지 여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거예요. 누구를 통해서 우리가 원하는 이슈에 접근할 것인가, 이 ‘누구’의 차원에서는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기 때문에 싸가지가 없어져요. 그러니 원초적으로 소통이 안 되는 거예요. 그게 문제인 거거든요.

야권이 문제가 생겨서 어지러운데 결국은 어떤 사람을 통해서 해결하느냐를 놓고 다투는 것 아닙니까? 권력을 잡는 건 사람이니까 거기서 문제가 비롯되는 거예요. 싸가지가 생산적이 되려면 소통이 되는 이슈를 갖고 해야 하는데, 인물 차원으로 가버리니깐 그냥 이분법이 돼버리는 거예요.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 되고, 이 편 아니면 저 편이 되는 구도죠. 그러다 보니 서로 죽이려고 달려드는 겁니다.

이철희 - 인물 중심의 싸가지 없음을 다른 말로 하면 계파주의입니다. 이슈는 절충이 가능한데, 사람은 선택이 가능할 뿐 절충할 수 없으니 인물 중심으로 가면 대립과 분열이 불가피할 수밖에 없는 건 사실이죠.

강준만 - 그럼요.

이철희 - 다시 원래 질문으로 돌아가서, 싸가지 없음은 결과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잖아요. 그걸 추동하는 근본 원인이나 동력이 뭔지 궁금한데요. 이 사람들이 싸가지를 잃어버린 이유가 도대체 뭐예요?

강준만 - 익명의 네티즌들을 보면, 일베(일간 베스트)건 어디건 간에 이 사람들이 글을 쓰고 댓글을 다는 동력이 뭘까요? 결국 도덕적 우월감입니다. 도덕적 인정투쟁(struggle for recognition)이에요. 그런데 어느 나라의 진보든 역사 이래로 그거 없이 진보를 할 수 있겠어요? 어느 정도의 도덕적 우월감과 인정투쟁은 필요합니다. 그런데 속에 감추는 것 하고 전면에 드러내는 건 다른 이야기거든요. 인정투쟁을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애초의 그 동기 자체가 인정욕구 충족이다 보니까 진정한 진보와 분리되어 버렸어요. 별개의 문제가 된 거죠. 분리가 되었으면 그걸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데 누가 이 얘기를 해주느냐 말이에요. 안 해요. 했다가는 깨지니까요. ‘1% 법칙’처럼 극소수가 논의의 장을 장악해 버리는 문화가 정착됐는데 이건 치명적인 겁니다.

우리 진보가 70~80년대의 유산을 극복하지 못한 거죠. 우리 학생들에게 글쓰기 주제로 청년의 정치 참여를 주고 봤더니 놀랍게도 지금의 20대도 똑같아요. 세월이 많이 갔으니 지금 20대는 과거 우리 20대와 달라졌을 줄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닙디다. 정치 참여를 보는 시각 자체가 부정적이에요. 그러다 보니 외골수 성향의 사람들이 주로 정치에 참여하는 풍토가 돼버렸어요.

그래서 제가 묻죠. 20대 젊은 청년들의 정치 참여, 필요하지 않느냐? 이렇게 답해요.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은 뭔가 속셈을 갖고, 어떤 의도를 갖고 한다고 봐요. 좋게 보지를 않아요. 참여에 대한 기본적인 바탕이 왜곡됐습니다. 참여의 동기나 참여를 바라보는 시각 등 토양이랄까 문화 자체가 일그러진 상황에서 참여를 외쳐 봤자 효과 없어요. 되레 참여를 안 하면 좋을 사람들이 더 많이 참여하는 결과를 초래해요. (웃음) 정작 참여를 해야 할 사람들은 참여 안 합니다. 사회심리적인 문제이기도 하고 기본 바탕의 문제이기도 한데, 이걸 제쳐놓고 참여를 외쳐봤자 소용없다고 봅니다.

   
▲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 소장(왼쪽)과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 온테이블
 

이철희 - 제가 늘 가슴에 담고 다니는 불만이 하나 있어요. 안철수나 문재인 등 정치 경험 없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유력 후보로 등장하고, 한국 정치를 바꾸겠다고 나서는 것부터가 넌센스예요. 정치 경험도 없고, 정치 문법에 대한 이해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불려 나와서 마치 구세주처럼 대접받고 행세하는 게 저는 가당찮다고 봅니다. 정치에 대한 이해 없이 좋은 정치인이 될 수는 없잖아요.

강준만 - 그게 문제라는 데 동의합니다. 보통의 유권자들도 그건 문제라고 느끼지만 그래도 저쪽이 되는 것보다 낫지 않겠냐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어쨌든 정치 경험은 당연히 있어야죠. 정치 알기를 우습게 알고, 정치를 혐오하는 저주에 바탕을 두고서 좋은 정치를 할 수는 없어요. 솔직히 그건 아니죠.

이철희 - 사실 합당할지 여부에 대해 제 의견을 구하지도 않았고, 저도 그런 사정을 전혀 몰랐어요. 들어가기 전까지 한동안은 연락도 없더라고요. 그런데 불쑥 들어가는 결정을 하더구먼요. 좀 아쉬웠죠. 합당은 과정이 참 중요하거든요. 명분도 축적하고, 여론의 지지도 동원하고, 또 확장도 해야 하는 데 그런 게 없었어요. 프로세스 매니지먼트(process management)가 안 된 거죠. 들어가는 프로세스를 잘 만들고, 들어가서는 또 어떻게 할 것인지 등등 그림을 그려야 할 것이 많아요.

그런데 그런 그림 없이 들어간 것 같아요. 준비도, 의지도, 진지도 없이 사실상 혈혈단신으로 들어가니 금방 허물어질 수밖에요. 인물 중심의 정치가 한국 정치의 기본 특징 중에 하나라는 말은 학자들도 많이 합니다. 그걸 끊임없이 재생산해내는 게 소선거구-단순다수제란 선거제도입니다. 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정치를 정당 중심의 정치와 인물 중심의 정치로 대별할 때 비례대표제는 정당 중심의 정치를 활성화하고 소선거구-단순다수제는 인물 중심의 정치를 지향한다고 하죠. 물론 제도만 탓할 일은 아닙니다.

강준만 - 지금까지 오픈 프라이머리(open primary)에 대해서 가장 체계적이고 제대로 된 비판을 한 게 이 소장인 거 같아요.

이철희 - 아, 제가 <인물과 사상> 2015년 1월호에 실었던 글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제가 <인물과 사상>에 ‘이철희의 트루 폴리틱스’란 제목으로 1년 넘게 연재를 했죠.

강준만 - 근데요, 저는 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어떤 게 더 악이냐?’ 하는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차악을 선택해야 된다는 얘기죠. 내부의 계파주의를 깨는 게 우선 급한 문제라고 봅니다. 오픈 프라이머리의 모든 단점은 기존 정치문화를 전제로 한 거란 말이죠. 그렇잖아요? 정치문화 개혁을 체념하고,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상수니까 그대로 끌고 가야 된다는 얘기에요. 이걸 전제로 오픈 프라이머리를 하면 엄청난 부작용이 벌어지죠. 미국도 그러니까요.

사실 미국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된 민주주의라고 볼 수가 없는 거 아니에요.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이걸 받고 나서, 비록 오래 걸릴망정 정치문화 자체를 바꿔나가는 것과 계파주의를 어쩔 수 없이 안고 가는 것을 비교해서 꼼꼼히 따져보면 과연 어떤 것이 더 나쁜 것일까요? 고민을 좀 더 해봐야 할 사안이지만 오픈 프라이머리를 무조건 아니라고 배척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이철희 - 반론하겠습니다. 오픈 프라이머리가 되면 ‘지금의’ 계파주의는 없어질 가능성이 있어요. 그런데 이 제도가 도입되면 여러 사람이 모인 계파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계파가 되는, 더 세분화되고 파편화되는 인물 중심의 정치가 득세할 겁니다.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나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지금은 몇 개의 계파가 존재하지만 오픈 프라이머리가 되면 1인 계파, 즉 계파가 소속 의원 수만큼 존재하게 될 겁니다.

또 하나, 제가 제일 우려하는 것은 언론의 힘이 너무 커진다는 점이죠. 대한민국 언론의 현실에 이건 정말 진보가 감당할 수 없을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그 걱정이 많이 돼요. 안 그래도 정당이 약하고 힘이 없는데, 오픈 프라이머리가 되면 정당은 사실상 무력화됩니다. 정당이 행사하지 않는 권력의 공백을 언론이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 미국의 경험입니다. 이런 점들 외에도 여러 단점이 있기 때문에 저는 오픈 프라이머리에 대해 단호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갖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지적하신 것처럼 잘 설계하면 전략적으로 활용할 여지도 있다는 데에도 동의합니다. 어떤 제도든 선택의 문제이지 우열의 문제는 아니라는 게 평소 생각이기도 합니다.

강준만 - 언론 문제를 말씀하시니까 야당의 싸가지 문제와 관련된 것이기도 하는 점을 하나 지적하고 싶어요. 언론이 왜곡 보도한다고 푸념하죠.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우리 언론이 기본적으로 정치를 바라보는 하나의 프레임(frame)입니다. 언론이 누구에게 유리하게 보도하느냐의 차원보다 갈등 중심의 프레임으로 정치를 보는 게 문제라는 얘깁니다. 저널리즘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 아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죠.

그런데 저는 묻고 싶어요. 그 프레임을 그냥 받아들이고 갈 거냐? 왜냐하면 갈등 중심으로 가는 체제하에선 이쪽이 절대적으로 불리하거든요. 그거야말로 기울어진 운동장이죠. 야당이, 진보 정당이 이런 점에 대해 고민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갈등 프레임을 불가피한 걸로 받아들이고 그거를 계속 따라가고 있는데, 우리가 하다못해 보도자료를 내더라도 프레임 자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시도는 왜 하지 않을까요. 그냥 갈등 중심의 프레임에 맞춰서 언론이 좋아하는 게 뭐지? 하면서 맞춰 가는 게 문제예요. 그거 하다가 골병들어요. 들입다 싸우는 모습만 보여주는데 유불리가 어디 있어요? 정치인들이 싸우면 유권자들은 바로 저 개새끼들이라고 욕해버리잖아요. 이러면 결국 누가 당하냐는 말이에요. 이런 문제의식이 전혀 없는 것 같아 답답합니다.

이철희 - 지금 국회의원들의 모든 활동은 친 언론(pro-media) 활동에 맞춰져 있어요. 이게 언론이 좋아할 만한 거냐, 기사화될 만한 것이냐, 여기에 중점 포인트를 두지 다른 것은 거의 고려하지 않아요.

다음편에 계속됩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