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힘들 때요? 지금인 거 같아요. 어제 바로 삼성이 보상위원회를 따로 띄운다는 기사를 봐서, 어제 오늘 막 가족들한테 전화 돌리다가 왔어요.” 

4일 서울 영등포구 서울하이유스호스텔에서 열린 ‘2015 활동가 네트워크 파티 인디언 썸머’에서 이종란 노무사가 개인적인 이야기를 털어놨다. 

이종란 노무사는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의 상근 활동가로 8년째 일하고 있다. 노무사 자격증을 딴 2000년대 초반 수원에 자리 잡은 후 ‘삼성 전문 노무사’로 알려지게 돼 반올림까지 왔다. 그는 2014년 개봉한 <또 하나의 약속>에서 김규리씨가 열연한 노무사의 실제 모델이다. 

사람책은 각 분야에서 독자적인 경험이나 지혜를 쌓은 사람이 책이 돼 독자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소규모 토크 프로그램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듯 책이 된 사람의 이야기를 직접 공유한다는 점에서 사람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날 ‘인디안 썸머’에서는 15명의 사람책이 독자들을 만났다. 

   
▲ 이종란 노무사가 4일 서울 영등포구 서울하이유스호스텔에서 열린 '2015 활동가 네트워크 파티 인디언 썸머' 사람책 프로그램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인디안 썸머’는 현재 시민단체와 사회단체·노동조합 등에서 일하는 활동가들의 리사이클 행사다. 활동가 간의 네트워크를 넓히고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는 동시에 미래를 함께 모색해보자는 차원에서 기획됐다. 

이종란 노무사는 “선배들은 통일 운동을 열심히 했는데 그 사이에서 유독 노동법에 관심이 갔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학생 시절 학생운동을 했던 이종란 노무사는 앞에서 주도적으로 모임을 이끄는 사람은 아니었다. “집회에 열심히 따라다니는 정도였다”는 였다는 게 그의 부연 설명이다. 

“집회를 가면 유독 길거리로 나온 노동자를 많이 봤어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제 대학 시절 가운데에 IMF 외환위기가 있었거든요. 자연스럽게 노동법, 근로기준법 이런 쪽으로 눈길이 갔죠. 졸업할 즈음에 친구가 ‘노무사’를 하면 ‘노동자 편에서 일할 수 있는데 돈도 벌수 있다’고 해서 눈이 반짝했죠. 근데 머리가 나쁜지 3년 만에 붙었어요.(웃음)” 

순박하게 웃는 이종란 노무사는 수원에 자리 잡고 처음 일했던 3년은 정말 재밌었다고 말한다. 경기지역 중소규모 사업장의 임금체불과 해고 사건 등을 다루는 일이었다. 노무사로 노동운동에 뛰어든 이십대 후반 여성을 경기지역 일반노조 사람들이 “기특하게 봐줬던 덕분”이라고 이종란 노무사는 회상한다. 

여기서 삼성 노동자들과 첫 대면을 하게 됐다. 

   
▲ 삼성반도체 백혈병 피해자 고 황유미씨 아버지 황상기씨. 사진=반올림 공식 페이스북
 

 

“중소기업 비정규직 상담을 하는데 이상하게 삼성 노동자들도 종종 상담을 오더라고요. 오는 분들이 백이면 백 일반 노무법인 상담에 실망하고 오는 거예요. 세탁기·가전 등 제조업 라인이 하나 없어지면서 구조조정 된 후에 회사에 대들고 싶은데 무기가 없다는 거예요. 작은 모임이라도 열면 감시당하고. 결국 벼랑 끝에 몰렸던 분들이 마지막으로 찾아오게 되더라고요.”

이종란 노무사는 “삼성 노동자들은 민주노총에 와서도 도감청 이야기를 해서 이상하게 생각했다”며 “상담 받고 다음날 회사에 끌려가서 상담하는 거 아니냐고 의심하는 데 실제로 그런 사람도 생겨났다. 그래서 나도 민주노총에 분명히 도감청 장치가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이르기도 했다”고 말하며 웃기도 했다. 

실제 삼성은 노조를 조직하려던 삼성SDI 등 몇몇 사업장 노동자들을 도감청하고 납치하는 등의 노동탄압으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삼성 노동자들과의 만남도 잠시 이종란 노무사는 경기일반노조가 통폐합 되는 등 과정을 거치면서 민주노총 경기본부 법률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종란 노무사는 대형마트 계산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노동자를 지원하는 노무사에서 노동자로 역할이 바뀐 것이다. 2004년. 하지만 이 생활이 길진 못했다. 

   
▲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이 지난 2013년 3월 서울 곳곳에서 전자산업 피해자 추모주간 행사를 하고 있다. 사진=반올림 제공
 

 

“4개월 정도 일했어요. 노동조합 준비하면서. 계산원 언니들이 조합 창립총회 하고 바로 그날 회사에 상견례를 하자고 제안했죠. 회사는 발칵뒤집어 졌죠. 바로 다음날 전국 지점장 회의가 우리 지점에서 열리더라고요. 거기가 또 삼성 가족인 신세계 이마트 용인 수지점이었어요.”

이종란 노무사는 상견례 직후 마트 계산원에서 “짤렸다”. 경력 위조라는 이유였다. 감시도 당했다. 이종란 노무사는 “화장실 몇 번째 칸에 들어갔다, 나왔다, 뭐 이런 걸 초 단위로 보고 하더라”며 “짧은 시기였지만 삼성의 탄압을 고스란히 당했다. 개인적으로는 언니들이 함께 일해보자고 해서 갔다가 회사로부터 큰 상처를 입고 나왔다”고 말했다. 

당시 마트 계산원이 요구한 것은 고용불안정 해소와 최저임금 인상이었다. 이 정당한 주장을 했다고 조합원들은 감시를 당했다. 

삼성과 ‘인연’이 쌓이자 수원지역에서는 ‘복잡한 삼성 관련 노동 상담 전문가’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삼성과 관련된 일이 들어 오다보니 삼성 반도체 산재 사고 당사자들과도 연이 닿았다. 

   
▲ 이종란(오른쪽) 노무사가 지난해 10월 캠페인 준비를 하면서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 작업복 착용을 돕고 있다. 사진= 반올림 카페
 

 

2007년이다. 이종란 노무사는 지역 언론에 보도된 삼성 반도체 백혈병 사망자 황유미씨의 사건이 지역 언론에 보도된 후 다산인권센터를 통해 황유미씨의 아버지를 만났다. 황유미씨 아버지 황상기씨는 삼성에 진상규명·사과·보상을 요구하며 해결책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찾아다니다 이종란 노무사를 만났다. 

“황상기 아버님이 진짜 대단해요. 속초에서 택시운전을 하시는 분인데 ‘삼성에서 진상규명·사과·보상을 꼭 받아내야 한다’는 마음을 단단히 하신 상황이더라고요. 그리고 지금까지 삼성에서 어떤 회유가 들어와도 ‘진상규명 우선’ 이 조건에서 변함이 없으세요.”

2007년 12월 삼성백혈병대책위로 시작한 반올림은 대책위가 아니라 상설 단체로 만들어져 현재까지 왔다. 이종란 노무사는 법률원 일을 병행하다가 상설 단체로 바뀌면서 반올림으로 자리를 옮겼다. 반올림 후원금으로 단체 활동을 꾸리고 생활비도 받는다. 

이종란 노무사를 독서하던 한 독자가 물었다. “가장 힘들 때와 가장 보람 있을 때는 언제냐”고. 이종란 노무사는 “지금”이라고 말했다. 삼성은 황유미 등 백혈병 산재사망 사건에 대한 1차 재판에서 진 후 공단과 함께 항소했다. 항소심 결과도 1심과 같이 산재로 인정되었고 확정되었다. 삼성에서 먼저 협상요구가 나왔다. 재판은 재판대로 받되 협상을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직접협상은 순조롭지 않았다. 이후 제3자 조정위원회가 꾸려졌고 조정권고안이 지난 7월 23일 발표된다. 희귀난치성질환도 포함되는 등 보상 대상자 폭도 넓었고 재발방지책도 괜찮은 기대 이상의 조정안이 만들어졌다. 

   
▲ 지난 23일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 김지형 조정위원장이 권고안을 발표했다. 사진=노컷뉴스
 

 

“조정안을 발표하는 날 백대 가량의 카메라 후레쉬가 터졌어요. 눈물은 나는 데 카메라가 너무 많아서 울지도 못하겠고 억지로 참고 넘겼죠. 근데 그 다음날 아무 곳에서도 기사가 안 나오는 거예요. 사실 조정은 2심 판결문을 받고 싶지 않은 삼성이 제안한 거 였거든요. 근데 이 조정안도 삼성 맘에 안 드는 거죠. 삼성의 작업이 들어갔으니까 뭔가 기사가 안 나온 거 아니겠어요?” 

삼성은 지난 3일 보상위원회를 구성하자는 제안을 던졌다. 이종란 노무사는 “보상위원회는 삼성이 조정안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라며 “지금도 반올림과 함께하는 가족들에게 그 의미를 알리는 전화를 엄청 돌리다 왔다. 지금 끝나면 바로 또 전화를 하러 가야한다”고 말했다. 

   
▲ 영화 <또 하나의 가족> 중 한 장면.
 

 

“가장 힘든 때는 지금이다. 눈이 조금 부었는데 어제는 조울증 환자처럼 울다 웃다 했다. 어제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하다 루프스 발병한 분을 만났다. 황유미씨의 동료 이숙영(백혈병 사망)씨와 같은 라인에서 일했던 분이다. 오후에 또 다른 사업장의 피해자를 만나고 사무실에 돌아왔다. 힘든 상황에서 삼성이 보상위원회를 새로 발족한다는 기사를 본거다. 감정 통제가 안 되더라. 그동안 나를 보살피지 못하고 지냈다는 게 안쓰럽기도 하다. 가장 힘든 건 헤쳐 나가야 하는 데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 다는 것이다.”

내내 밝게 웃던 이종란 노무사는 루프스병 피해자 이야기를 할 때 결국 눈물을 쏟고 말았다. 반올림은 다음주 월요일 삼성의 새로운 위원회가 갖는 의미를 알리는 기자회견을 할 예정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