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70년이 지났지만 지구상에 마지막 남아 있는 분단국가의 현실은 여전히 한반도를 짓누르고 있다. 그 속에서 그 긴 세월 동안 남북 위정자들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병정놀이가 펼쳐져 왔다. 이 놀이는 종종 치킨게임의 양상을 보이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남북의 동포들이 전쟁공포로 가슴을 쓰러 내렸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남북의 분단을 기획하고 관리해 온 것은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이다. 남과 북의 권력자들은 이를 등에 업고 70년 세월 동안 이 병정놀이를 주도해 왔다. 아버지, 아들, 손자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권력을 세습해왔던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 북한의 주역들이라면, 권력에 눈 먼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의 독재자들과 그들을 향수하고 숭배해온 이명박, 박근혜 등이 남한의 주역들이다. ‘안보’로 생명줄을 이어가는 군과 국정원, 좌우로 갈라져 ‘타도와 척결’의 언행을 일삼는 이데올로기의 확신범들, 대결의 논리를 앞세우는 호전적 지식인들이 이 병정놀이의 조역들이며 실행자들이다. 거기서 수구 족벌언론들은 병정놀이의 흥행을 부추기면서 안보상업주의의 떡고물을 챙겨왔다. 남북의 우수마발들은 이 끝날 줄 모르는 병정놀이에 때로는 놀라고 때로는 분노하며 때로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이들은 병정놀이의 시리즈 한 편이 막을 내리고 또 다른 한 편이 유사한 내용으로 되풀이될 때마다 마음을 졸이다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일상으로 돌아간다. 6.25참극 이래로 이 놀이는 똑같은 레퍼토리의 반복이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놀이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지난 8월4일 비무장지대 남측 지역에서 발생한 지뢰폭발 사건 또한 70년 동안 이어져온 기나긴 병정놀이의 한 단편이다. 남북의 주역과 조역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긴장을 조성하고 위기를 극대화했다. 합의 바로 직전까지 남북은 ‘전쟁불사’, ‘단호한 대처’를 주문하며 심리전을 펼치고 포격을 주고받는 등 전쟁분위기를 연출했다. 수구언론 또한 “결코 물러서서는 안 된다”며 ‘원칙’을 강조하고 강경한 대응을 촉구했다.

그런데 일촉즉발의 이 험악한 분위기는 남북 고위급 2+2의 공동보도문 하나로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남북관계가 갑자기 해빙의 시대를 맞은 것처럼 되어버린 이 놀라운 반전의 결말 또한 병정놀이 시리즈물의 기본 포맷임을 부인할 수 없다. ‘단호한 대처’를 고고지성으로 외쳤던 수구언론이 전혀 새롭지 않은, 그저 그런 합의문에 상찬을 아끼지 않으며 180도 태도를 바꾸는 변덕의 미학은 이 병정놀이에서 종종 등장하는 레퍼토리의 한 장면이다. 어찌되었든 그 와중에 이 한편의 병정놀이는 엄청난 역할을 했다. 정치, 경제, 사회 등 박근혜 정권이 자초한 국내의 모든 골치 아픈 악재들이 쓰나미에 휩쓸리듯 깡그리 사라져버린 것이다.

정부와 언론은 남북 합의문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그것은 언젠가 휴지조각이 될 공산이 크며, 과거의 경험으로 보아 이후 유사한 대결과 충돌이 되풀이 될 것임은 불문가지다. 예컨대 합의된 공동보도문 제 2항에는 “북측은 최근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 남측지역에서 발생한 지뢰폭발로 남측 군인들이 부상을 당한 데 대하여 유감을 표명하였다”고 되어 있다. 통일부 관계자는 ‘북측은’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것에 대해, 북한이 “사과 주체를 처음으로 명시한 것”이라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이 문구에 어떤 주어를 갖다 붙여도 사과의 주체를 적시한 것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상투적인 위로의 문구라고 보는 견해가 더 자연스럽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는 병문안 온 아무개가 상처받은 병자에게 통상적으로 행하는 위로의 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합의 당사자의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한 이러한 합의문은 궁극적으로 양측의 논쟁거리를 하나 더 만들 뿐 아니라 한편으로 남북의 국민을 우롱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매우 불쾌하다. 남북 합의 직후에 벌써 그 징후는 나타나고 있다.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은 합의 당일인 25일 청와대 브리핑에서 “북한이 지뢰 도발에 대해 ‘사과’하고 재발 방지와 긴장 완화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북측의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은 같은 날 <조선중앙텔레비전>에 출연해서 “남조선 당국은 근거 없는 사건을 만들어가지고....”라며 불평을 토로했다. 이럴 바에야 궁색한 사과의 논거를 억지로 만들어내기보다는 차라리 “북한 아니면 누가 했겠냐”는 주장이 솔직하고 신선하게 느껴진다.

기실 논쟁의 시발점은 폭발사고의 원인이 된 목함지뢰의 설치 주체가 누구인지 입증하지 못한데서 나온다. 군이 ‘북한제 지뢰’라고 발표했지만 그것이 “북한군이 비무장지대 남측 지역에 숨어들어가 그 지뢰를 설치했다”는 사실을 담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는 2010년 수병 46명의 목숨을 앗아간 천안함 침몰과 관련해 군이 ‘1번’이라고 적힌 북한제 어뢰를 바다에서 건져냈지만, 그것이 ‘침몰’의 직접 원인인 스모킹건이 될 수는 없다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당시 군의 입증 노력과 이명박 정부의 치열한 외교전의 성과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의장성명에 그대로 담겼지만 성명의 내용은 허탈하기 짝이 없었다. 천안함 침몰 105일이 지난 2010년 7월 9일에 채택된 의장성명은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남북 양측의 주장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의장성명 제 5항은 “안보리는 북한에 천안함 침몰의 책임이 있다는 ‘민군합동조사단’의 조사결과에 비춰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고 되어 있는 반면에 제 6항에는 “안보리는 이번 사건과 관련이 없다고 하는 북한의 반응, 그리고 여타 관련 국가들의 반응에 유의한다”고 되어 있다. 즉 의장성명은 남북 양측의 입장을 담았을 뿐, 천안함의 침몰원인에 대한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호하기 짝이 없는 의장성명이 채택되기까지 남북 양측이 엄청난 시간과 외교적 노력을 쏟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소모적 병정놀이로 시간과 국력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는 ‘선제공격’이니, ‘백배 천배의 보복’이니, ‘확실한 재발방지’ 따위의 군사적 허세가 아니라 경계태세에 대한 책임을 철저히 묻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북한 잠수정이 한미군사훈련이 실행되고 있는 남측 해역에 침투해 어뢰를 발사한 뒤 유유히 사라지고, 북한의 귀순병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남한 병사들의 내무반을 노크하는가 하면, DMZ 남측 통문에 북한군이 숨어들어 지뢰를 매설하는 황당한 경계공백의 상황이 계속되는 한, 남북의 소모적 병정놀이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또한 북한에서 볼 때는 사과가 아니고 남한에서 볼 때는 사과같이 보이는 해괴망측한 엉터리 합의문의 남발은 반복될 것이다.

남북이 이러한 진부하고 구태의연한 병정놀이를 걷어치우고 평화통일을 위한 발걸음을 내딛기 위해서는 ‘통일대박’ 따위의 경박스런 구호가 아니라 상대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포용적 지도자의 자세가 무엇보다 절실하다.

병정놀이의 수괴였던 김일성, 김정일, 이승만, 박정희는 이 세상에 없다. 전쟁 경험 없는 전후세대 김정은과 박근혜가 집권하고 있는 남북의 현실이건만, 아직까지도 냉전시대의 병정놀이가 계속되고 있는 것은 70년 세월을 움츠리고 살았던 남북의 동포들에게 커다란 죄악이다. 언제 이 병정놀이를 끝낼 것인가. 남북 지도자들의 통 큰 결단을 보는 것은 요원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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