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는 중세에 실존한 마법사의 이름이다. 인간이 아무 속박 없이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면 어떤 결과에 도달하게 될까? 악마에게 영혼을 저당 잡힐지라도 내면의 열정에 충실하다면 신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파우스트의 전설은 유랑극단의 연극과 인형극으로 18세기까지 전해졌다. 괴테(1749~1832)는 젊은 시절부터 이 이야기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흐린 날 들판’(1772)에서 파우스트를 처음 언급했고, ‘초고 파우스트’(1775), ‘단편 파우스트’(1790), ‘파우스트 제1부’(1808), ‘파우스트 제2부’(1832)를 차례차례 썼다. 23살 때 착상해서 83살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 완성했으니 무려 60년, 어른이 된 뒤 모든 세월을 쏟아 부은 셈이다.

파우스트는 세상의 모든 책과 연금술을 익혔지만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다고 느낀다. 그는 우주, 자연과 합일되는 삶을 꿈꾸지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무력감에 빠진다. 메피스토텔레스가 검은 개로 변장하고 파우스트를 찾아와 영원으로 통하는 초월의 한 순간을 보여주겠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대가가 있다. 영원의 한 순간이 지나면 메피스토텔레스의 노예가 되어 평생 지옥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 파우스트는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지고의 아름다움을 체험하기 위해 모든 고통을 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파우스트의 운명, 후대는 이를 ‘파우스트의 저주’라 불렀다.     

괴테는 시적(詩的) 자서전인 이 작품이 음악으로 재탄생하기를 바랐다. 그는 ‘파우스트’를 음악으로 만든다면 두렵고 끔찍하고 충동적인 대목들이 삽입돼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시간 속에서 진행되는 평범한 음악과는 성질이 달랐다. 괴테는 ‘파우스트’의 음악이 모차르트의 ‘돈조반니’를 닮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낭만시대의 수많은 작곡가들이 ‘파우스트’에 도전했다. 그러나 괴테의 기대수준에 도달한 작품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괴테는 마이어베어 정도가 그 작업을 해 낼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만년에는 그 희망을 포기했다. 그는 1829년 2월 12일 에커만에게 말했다. “모차르트가 파우스트를 작곡했어야 해.” 어떤 음악사가들은 이를 ‘괴테의 저주’라 부른다.

   
▲ “모차르트가 파우스트를 작곡했어야 해.” 이 ‘괴테의 저주’를 넘어 파우스트를 가장 잘 묘사한 작곡가는 리스트와 베를리오즈일 것이다. 두 사람은 파우스트를 닮았다.
 

합리성이 지배하리라는 계몽시대의 꿈이 스러지고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에 눈뜬 19세기, ‘파우스트’는 모든 예술가들의 공통된 운명을 묘사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베토벤과 슈베르트가 ‘파우스트’의 대사를 사용해서 가곡을 만들었다. 이 작품을 본격적인 대편성의 음악으로 처음 만든 사람은 베를리오즈(1803~1869)였다. 하지만, 그가 1828년에 발표한 ‘파우스트로부터의 8개 장면’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괴테 자신도 이 작품을 듣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베를리오즈는 이 작품을 개작하여 ‘파우스트의 저주’란 제목으로 1846년 초연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 작품은 1877년 파리에서 다시 공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베를리오즈가 죽은 지 8년 뒤였다. ‘괴테의 저주’, 그 첫 케이스라고 할까.

이 작품은 무대 공연이 아니라 연주회용으로 만든 오페라다. 베를리오즈는 이 작품을 ‘극적 전설’이라고 불렀다. ‘파우스트’에서 음악적으로 처리하기 적합한 장면 24개를 골라서 3명의 독창자, 합창, 관현악으로 연주하도록 만들었다. 이 가운데 ‘라코치 행진곡’이 귀에 익숙하다.

   
 
 

베를리오즈의 <파우스트의 저주> 중 ‘라코치 행진곡’               
https://youtu.be/fuqu_eNO51M
(연주 마이클 틸슨 토마스 지휘 유투브 교향악단)

 

 

 

 

프랑스의 샤를르 구노(1818~1893)는 이 작품을 5막의 오페라로 만들어 1859년 파리에서 초연했다. 하지만, 화사한 살롱풍의 이 작품은 괴테가 생각한 ‘파우스트’의 음악, 즉 ‘영적(靈的)인 것의 악마적 표현’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이 오페라에 나오는 곡 중 발레 음악, ‘병사들의 합창’, 그리고 파우스트의 3막 아리아 ‘정결한 집’(원제 Salut, demure chaste et pure 안녕, 순결하게, 순수하게 살기를)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프란츠 리스트(1811~1886)는 ‘파우스트’를 교향곡으로 만들었다. 리스트의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꼽히는 이 교향곡은 파우스트, 그레첸, 메피스토펠레스 등 세 악장으로 이뤄져 있으며, 마지막 악장에는 ‘신비의 합창’이 포함돼 있다. 리스트는 연주시간 무려 80분에 달하는 이 대곡을 잉태해서 완성하기까지 50년 세월이 필요했다.

이 작품의 산파는 다름 아닌 베를리오즈였다. 1830년, 파리에 살던 리스트는 ‘환상 교향곡’의 초연을 하루 앞둔 베를리오즈를 방문한다. 베를리오즈로부터 ‘파우스트’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그는, 프랑스어 번역본으로 ‘파우스트’를 읽자마자 심취하게 된다. 인간의 욕망, 인생의 의미, 구원의 문제를 파고든 그 내용은 그의 뇌리를 평생 지배하게 된다. 리스트는 ‘파우스트’를 오페라로 만들 생각을 했으나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는 1852년, 바이마르에서 베를리오즈가 ‘파우스트의 저주’를 직접 지휘한 연주회에 참석했다. 비로소 용기를 낸 리스트는 1854년 이 작품을 완성하여 이듬해 초연했고, 베를리오즈에게 헌정했다. (참고 : 황장원 ‘리스트, 파우스트 교향곡’, 네이버캐스트 2011. 10. 24)

이것이 ‘파우스트’ 교향곡의 제1버전인데, 리스트는 여기에 만족할 수 없어서 대폭 손질했다. 1857년에 완성한 제2버전에서는 트럼펫과 트롬본, 오르간과 타악기 등의 악기들이 추가로 편성되었다. 여전히 이 작품에 만족하지 못한 리스트는 결국 1861년과 1880년 두 차례에 걸쳐 제2버전을 수정 보완하고 나서야 ‘파우스트’ 교향곡에서 손을 뗄 수 있었다. 그의 나이 69세 때였다. 베를리오즈를 통해 ‘파우스트’를 알게 된 지 꼭 50년만이었다. (참고 : 최은규 ‘리스트의 파우스트 교향곡’, 네이버캐스트 2015. 8. 14)

   
 
 

리스트 <파우스트> 교향곡                              
https://youtu.be/m30ybpo3MUY
(연주 : 블라디미르 유로브스키 지휘 런던 필하모닉 관현악단 연주)

 

 

 

 

낭만시대의 전형적 작곡가인 리스트가 파우스트를 닮았다는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화려한 여성 편력을 거쳐 말년에는 사제로서 신과의 사랑을 이루고자 했던 프란츠 리스트. 그러나 그는 방대한 지식을 섭렵하고도 만족하지 못했던 파우스트처럼 계속해서 사랑과 예술을 향한 끝없는 열망을 불태웠다. 그토록 파우스트와 닮았던 리스트가 파우스트에게 이끌려 교향곡을 작곡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최은규, 같은 글)

‘파우스트’에 도전한 작곡가는 수없이 많다. 슈만도 ‘파우스트의 장면들’이란 대곡을 썼다. 100년 이상 잊혀졌던 이 작품은 1970년대에 발굴되어 이제는 슈만의 초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말러의 교향곡 8번 ‘천인’(千人)의 2부가 ‘파우스트’를 텍스트로 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낭만시대 작곡가들이 아름다움을 위해 모든 고통을 껴안은 파우스트의 모습을 자신과 동일시한 건 자연스런 일이었다.

8월 25일, 음악으로 탄생한 괴테의 ‘파우스트’가 한국의 청중들을 만나는 소중한 연주회가 열렸다. 임헌정씨가 지휘하는 코리안 심포니가 베를리오즈, 구노, 리스트의 작품들을 연주하고 음악칼럼니스트 최은규씨가 해설한 ‘토킹 위드 디 오케스트라’. 인문학적 주제를 음악과 연결해서 소개하는 이 기획은 작년 10월 31일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개 말했다’로 문을 열었고, 두 번째 주제로 괴테의 ‘파우스트’를 선정한 것이다.

낭만시대의 심각한 곡들은 자주 듣기 어렵다. 바쁘고 피곤한 일상을 살며 이 대곡들을 감상하려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이렇게 판을 깔아 주면 기꺼이 들을 수 있다. 코리안 심포니의 참신한 기획은 이런 희귀한 기회를 제공했다. 열과 성을 다한 연주, 그리고 최은규씨의 성실한 해설은 음악을 좀 더 잘 이해하며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베를리오즈, 슈만, 리스트, 말러가 표현한 파우스트를 좀 더 들으며 ‘괴테의 저주’가 맞았는지 틀렸는지 확인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참신한 기획으로 파우스트를 공부할 기회를 준 코리안 심포니 관계자들께 감사드린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