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 송충이이며, 화약쟁이가 어떻게 설탕을 들여옵니까? 난 갈잎이 아무리 맛있어도 솔잎이나 먹고 살거요.” 

한화그룹(옛 한국화약그룹)의 창업주 김종희 회장의 말이다. ‘다이너마이트 김’이란 별칭으로 불릴 정도였던 김종희 회장이 화약 산업에 얼마나 큰 관심을 보였는지 알 수 있다. 

김종희 회장은 1922년 충남 천안에서 출생했다. 경기도립상업학교에 유학했으나 일본 학생들과의 패싸움에 휘말리면서 퇴학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당숙 김봉서와 지인인 고이께 쓰루이치 원산경찰서 서장의 도움을 받아 원산공립상업학교로 전학했다. 

김종희 회장은 고이께 서장 집에서 하숙하며 학교를 통학했다. 조선화약공판에 입사한 것도 졸업 후 서울로 전근 온 고이께 서장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둘의 인연이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화약공판은 1942일 일제의 기업정비령으로 생겨난 일제 치하 국내에선 유일한 화약 판매 독점 기업이었다. 일제는 이와 함께 전국의 화약 공장 4개를 통폐합했고 각 공장의 원료 및 생산품을 모두 조선화약공판을 통해 구매·유통하도록 했다. 태평양전쟁 중이던 일제가 식민지 내의 물자를 원활하게 수탈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김종희 회장은 이 회사에 입사한 첫 한국인 관리 사원으로 구매부와 생산부 계장 등을 거쳤다. 조선화약공판은 1945년 일제가 패망한 후 김종희 회장에게 경영권이 넘어갔으나 3일만에 미군정의 적산으로 편입됐다. 김종희 회장은 전쟁 중인 1952년 부산에서 조선화약공판을 불하받았다. 그의 나이 29세였다. 

   
▲ 한화그룹 지배구조(2015년 6월30일 기준)
 

 

적산불하는 당시 친일파나 고위층과 연줄이 닿은 사업가에게 주어지던 특혜였으나 유독 조선화약공판만은 유찰이 이어졌다. 화약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는 후문이다. 감정평가사 역시 같은 이유로 현물 확인 없이 서류 검토만으로 감정을 끝내 당시 인수 가격이 높게 책정됐던 이유도 있다. 

김종희 회장은 기준 가격보다 3만원 높은 23억4568만원을 적어 내 낙찰 받았다. 한국전쟁 당시 발 빠르게 움직이며 모은 달러와 헐값에 구입한 농지증권을 판 돈으로 불하대금을 충당했다. 살인적인 전시인플레 상황에서 기피 산업이던 화약 산업은 김종희 회장 손에서 한국화약주식회사로 재탄생했다. 

한국화약은 이어 1955년 조선유지 인천화약공장을 인수했다. 앞선 인수자가 인천화약공장 재건은커녕 공장을 수수방관하자 당시 강성태 상공부장관이 직접 나섰다. 김종희 회장은 인천화약공장 복구 비용을 전액 지원받는 조건으로 인천화약공장을 인수했다. 

일본에서 어렵게 인천화약공장 설계 도면을 구해왔으나 일본과의 교역이 전면 금지됐다. 설상가상으로 공장 복구를 지원해주기로 했던 강성태 장관이 현직에서 물러나면서 김종희 회장은 어렵게 인천화약공장을 복구했다. 

인천화약공장은 당시 남한에서 유일하게 화약 생산이 가능한 공장이었다. 이미 조선화약공판의 판매권을 독점했던 김종희 회장은 인천화약공장 인수로 독점 생산권도 갖게 되면서 기업 확대의 발판을 마련했다. 

생산시설까지 갖추게 되자 김종희 회장은 본격적인 화약 국산화에 나섰다. 국내 화약 기술자인 고 이종현·이성구·유영수씨를 영입했고 1957년 다이너마이트 원료인 니트로글리세린 실험에 성공했다. 1년 뒤에는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로 다이너마이트를 생산해 냈다. 

   
▲ 인천화약공장에 있는 성디도 채플. 김종희 한화그룹 창업주는 성공회 신자로 그의 세례명을 따왔다. 매주 금요일 인천공장 임직원들의 안전을 기원하며 미사를 드렸다고 한다. 인천공장은 2006년 이전됐고 현재는 한화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한국화약이 생산한 다이너마이트는 전후 재건 사업과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 제1차 경제개발계획에 일조했다. 화약산업이 번창하자 김종희 회장은 1960년대 신한베아링을 인수하면서 사업다각화에 나섰고 1970년대 무역과 건설·정유·기계 등 기간산업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기간산업과 어울리지 않는 유업·호텔업까지 
화약과 무역 건설 등으로 활로를 넓혀가던 한국화약은 1970년대 초반 식음료 사업으로도 발을 딛는다. 김보현 당시 농림부장관의 ‘낙농가를 도와달라’는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결국 대일유업을 인수해 아이스크림 공장 건설에 나섰다.  

1973년에 생산을 시작한 아이스크림은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이 무렵 대일유업 이름을 빙그레로 교체했다. 

김종희 회장은 이 무렵 소공동 일대의 땅을 사들였다. 당시 소공동 일대에는 슬럼가가 형성돼 있었다. 1882년부터 서울로 들어온 화교들이 모여들면서 차이나타운이 형성됐는데 남루하고 낡은 동네였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후 화교들의 입지가 줄어든데다 한국은 일제와 마찬가지로 1970년대까지 탄압에 가까운 정책을 통해 소공동 차이나타운을 와해시켜 나갔다. 

화교들은 화교회관 건립 등을 논의했으나 이 마저도 지지부진해지면서 서울 한복판에 형성된 차이나타운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해체됐다. 김종희 회장은 감정가가 평당 30만원 가량이던 땅을 현금 107만원에 몽땅 사들였다. 

김종희 회장은 땅을 구입할 당시 사옥 건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서울시는 관광호텔을 계획하고 있었다. 김종희 회장은 초기에 반대했으나 주변의 설득을 받아들여 1973년 12월 프라자호텔 기공식을 단행했다. 

한국화약은 이 무렵 건설업에도 뛰어들게 된다. 경제개발과 재건 분위기 속에서 건설업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던 터라 신규 건설면허를 내기는 어려웠다. 김종희 회장은 당시 690여개 건설업체 중 도급순위 하위권인 533위 동원공업주식회사의 토건업 단종면허를 인수하는 우회적인 방식으로 건설업을 시작했으며 이후 태평영건설주식회사로 키워갔다.   

김승연 회장은 “선친이 당시 91억원을 재건 예산으로 내놨다”고 기억한다. 당시 정부가 이리시 재건을 위해 책정한 필요 예산은 총 130억원이었다. 

현재 한화를 이끌고 있는 김승연 회장이 2세 경영에 나선 것은 급작스러웠다. 1981년 7월 김종희 희장이 별세한 후 가업을 승계했다. 김승연 회장 29세 때였다. 풋내기 회장은 취임 후 회사 중견 간부는 물론 신입사원들과 대화에 나서는 등 새로운 면모를 보였다. 

   
▲ 김종희 한화그룹 창업주가 한국화약을 방문한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회사를 소개하고 있다.
 

 

김승연 회장은 ‘젊은 혈기로 무리한다’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회사 간부들을 설득해 석유화학산업과 에너지 사업에 뛰어든다. 1982년 한양화학 인수, 합작사인 경인에너지 경영권 확보 과정에서 김승연 회장은 ‘뚝심 경영’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레저·유통 분야 등 3차 산업으로 사세를 확대했다. 

한가지 우스개 소리처럼 전해지는 일화가 있다. 한화가 한국화약으로 그룹명을 변경하게 된 사연이다. 1990년대 초반 사업차 방문한 중국에서 환영 플래카드에 적힌 ‘남조선폭약집단’을 보고 명칭을 변경했다는 후문이다. 중국은 그룹의 영문명인 ‘Korea Explosives Group’을 그대로 번역했다. 서구권에서도 한국화약의 영문 명칭을 보고 테러집단으로 오해하는 일이 잦았다는 것이다. 한화는 1992년 현재로 그룹 명칭을 변경했다. 

김승연 회장이 가업을 이어받는 모양새였지만 동생 김호연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동생 김호연은 “형이 자의적으로 재산을 가로챘다”며 그룹 지분을 요구했고 1993년부터 31차례 재판을 진행했다. 

김승연 회장과 김호연은 1995년 조모 장례식에서 재산분할에 합의했고 빙그레 회장을 맡은 김호연은 1997년 외환위기 직후 계열분리를 통해 빙그레를 한화그룹에서 독립했다. 

정재계 두루 걸친 인맥 
한국화약이 다양한 기간산업 분야로 확장하며 기업을 키워간 데에는 권력층과의 교류도 한몫했다. 실제로 김종희 회장의 친형은 국민당 총재를 지낸 김종철씨다. 일본 메이지대학 상학과를 졸업한 김종철 전 총재는 김종희 회장과 마찬가지로 고이께 도움을 받아 조선목재주식회사에 근무했다. 

해방 직후에는 우익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단 선전부장으로 활동했으며 1958년 제4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했다. 김종철 전 총재는 1960년 4·19혁명으로 물러났다가 1967년 다시 민주공화당 소속 7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김종철은 1981년 한국국민당 창당 후 총재직을 맡고 제12대 대통령후보를 지내기도 했다. 정김종철 전 총재는 야인시절이나 아우 김종희에게 의탁하면서 회사 일을 도왔다. 실제로 김종철 전 총재는 한화 계열사인 한국베어링과 태평물산 회장을 맡았다.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정계 은퇴 후에는 다시 한국화약 고문으로 활동했다. 

혼맥 또한 화려하다. 김종희 회장은 1946년 강태영씨와 결혼해 2남1녀를 뒀다. 장녀인 김영혜씨의 남편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최고 실세로 꼽히는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차남 이동훈 전 제일화재 회장이다. 

   
ⓒ한화
 

 

사돈댁과의 인연으로 서정귀 전 호남정유 회장(장남 이동진 처 서옥로의 부) 최종건 SK 창업주(5남 이동욱 처 최예정의 부)과 연결된다. 또 최예정씨의 사촌오빠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으로 부인 노소영씨를 거치면 노태우 전 대통령과도 연이 닿는다. 김영혜와 이동훈의 장남 이재환은 손경식 CJ그룹 회장의 장녀 손희영과 결혼했다. 

장남 김승연은 서정화 전 내무부장관 딸인 서영민과 결혼했다. 백두진 전 국회의장의 부인 허숙자의 적극적인 중매로 김승연은 아홉 살 어린 서울대 약대 3학년생 서영민과 결혼했다. 김승연의 장인 서정화는 전두환 정권 시절 내무부 장관과 민정당·신한국당·한나라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서정신 전 대검찰청 차장은 서정화 전 장관 동생이고 서정귀 전 호남석유 회장과는 6촌 지간이다. 

동생인 김호연 회장의 부인은 김미다. 백범 김구 선생의 손녀로 김미의 큰어머니는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미생이다. 김호연 회장의 장인인 김신은 백범선생기념사업회 회장, 교통부 장관, 공군 참모총장,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미씨의 오빠인 김휘는 김석곤 쌍용그룹 창업주의 아들인 김석동 전 굿모닝증권 회장과 동서지간으로 연결된다. 

기업을 맡고 있는 김승연 회장은 서영민과 슬하에 3남을 두고 있다. 동관·동원·동선으로 미혼이다. 

[관련기사 : 미디어오늘 / 미래산업과 가업승계 플랜 동시 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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