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이 뉴스 사이트 접속에서 구글을 앞질렀다. 뉴스 사이트들의 웹 트래픽을 분석하는 파슬리(Parse.ly)에 따르면 페이스북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SNS에서의 접근이 43%로 구글 검색을 통한 유입 38%에 비해 뚜렷하게 많았다. 이를 ‘미국 인터넷 대기업들 사이의 힘겨루기가 그렇답니다’하는 정도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그 소식이 가진 함의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어쩌면 우리가 뉴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을 완전히 바꿔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이 뉴스산업을 삼키고 있다는 우려는 진작부터 미디어 업계를 긴장시키고 있었다. 뉴스산업의 재편은 그 자체로도 중요한 뉴스지만, 전혀 무관한 줄 알았던 뉴스산업에서 승승장구하는 페이스북을 보면, ‘뉴스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왜 뉴스를 읽고, 보고, 듣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질문에 단순히 “새 소식을 알고 싶어서”라고 대답하는 것은, ‘왜 식당에 가는가?’라는 질문에 “배가 고파서”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다. 즉, 틀린 대답은 아니지만, 그게 전부도 아니고, 본질도 아니라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경험이 있다. 신문읽기를 좋아하던 필자가 미국으로 건너와 살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인터넷이 보편화되었던 시점이라서, 미국에서도 한국 뉴스를 실시간으로 접하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당연히 한국 언론사 웹사이트를 매일 방문해서 읽곤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의 뉴스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고, 미국의 뉴스에 관심이 더 생기기 시작했다. 물론 자기가 물리적으로 거주하는 곳의 소식에 더 관심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뉴스에 등장하는 정치, 연예, 사건, 사고가 나와 아주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는 점에서는 한국 뉴스나 미국 뉴스나 내 일상생활에 중요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세상 돌아가는 일 잘 모르면서도 자기 일 열심히 하며 사는 사람들 많지 않은가).  뉴스를 읽고 듣는 이유가 순전히 “새로운 소식/지식을 알고 싶어서”라면 굳이 나의 관심이 한국 뉴스에서 미국 뉴스로 바뀔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어느 쪽이든 흥미로운 새 소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생각해봐야 할 것이 뉴스의 “시장가치”이다. 남들이 모르는 소식을 나만 알고 있을 때 내가 가진 뉴스의 사회적(소셜) 가치는 높다. 물론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 나와 이야기하는 상대방이 그 뉴스에 비슷한 관심을 갖고 있어야 가치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실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날씨 같은 소식도 있지만, 내 직장과 상관없는 어느 대기업의 경영분쟁, 어느 가수의 열애소식은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사용할 수 있는 사회적 가치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필자가 알고 있는 한국 소식은 미국에서 만나는 미국인들과의 대화에서는 거의 가치를 갖지 못하는 재화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 사람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소식을 업데이트해서 알고 있어야 했던 것이다.

미국의 공영라디오 방송인 NPR이 재미있는 실험을 한 적이 있다. NPR의 웹사이트 담당자가 독자들이 기사 밑에 댓글을 달면서 벌어지는 토론을 보면 ‘도대체 기사를 읽기는 했는지’ 의심스러운 내용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어느 만우절에 장난을 쳐 보기로 한 것이다. 특정 기사의 중간에 “사람들이 기사를 안 읽고 댓글을 다는 것 같다. 혹시 이 글을 보신 분들은 댓글을 달지 말아달라.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자”는 내용을 살짝 삽입했다. 결과는… 다른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풍성한 댓글이 넘쳐났고 토론도 벌어졌다. 하지만 그렇게 만우절 장난으로 시작한 일이 언론인들 사이에서는 “사람들에게 뉴스란 무엇인가”라는 진지한 성찰을 하는 계기로 발전했다.

그리고 그 성찰의 결과는 단순히 “사람들이 더 이상 글을 안 읽는다”는 성급한 결론이 아니라, “우리가 뭔가 크게 착각하는 게 아닐까”하는 본질적인 고민이었다. ‘사람들은 소식을 알고 싶은 게 아니라, 그저 그걸 핑계로 서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같다’는 데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결국 뉴스가 가지는 중요한 가치 중 하나는 내 주위의 사람들과 나를 연결해주는 ‘소통의 도구’로서의 가치이다. 전직 총리가 구속, 수감되었다는 뉴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장 먹고 사는 데에는 큰 관련이 없지만, 우리들은 그 뉴스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면서 정치, 경제, 사회적 동질성이나 세계관의 이질성을 확인하는데 사용한다. 하나의 뉴스를 가지고 어떤 이들은 함께 분노하고, 어떤 이들은 함께 기뻐하며, 어떤 이들은 전에는 모르던 서로간의 의견차이를 발견하고 언성을 높이기도 한다. 뉴스는 결국 그런 소통을 돕는 중요한 도구이고, 사회적 인간의 필수 어휘이다.

길에서 만난 친구와 “언제 밥 한 번 같이 먹자”고 하는 것은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이고, 음식은 그런 사회적 만남을 돕는 매개체일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지 않는다. 모인 사람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좋은 음식은 여전히 중요하다. 뉴스도 마찬가지이다. 상대방이 꺼내는 뉴스와 그걸 들은 매체는 좋은 음식만큼이나 중요하다. 하지만, 식당이 과연 ‘영양의 공급처’이냐 ‘소셜의 장소’이냐를 굳이 선택하라면 후자에 좀 더 무게가 실리는 것처럼, 뉴스가 ‘정보의 원천’이냐 ‘소셜의 도구’이냐를 선택하라면 그 동안 전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후자에 중요성이 더 실리는 것이다. “검색의 지존”이라는 구글이 뉴스부문에서 페이스북을 위시한 SNS에 밀리게 된 이유에는 바로 그런 ‘뉴스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가 정보에 눈이 멀어(?) 착각했을 뿐, 뉴스는 인류역사 내내 소셜의 도구였는지도 모른다. 일간 신문이 등장하기 전에는 편지가 뉴스의 전달방식이었고, 우편제도가 발달하기 전에는 말로 전달하는 것이 유일한 방식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뉴스의 원형은 ‘입소문’이다. 그리고 이제 페이스북이라는 빠르고 글로벌한 입소문 통로가 마련되면서 뉴스는 한동안 의존해왔던 종이신문이나 웹사이트 같은 미들맨을 거치지 않고 원초적인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새로운 미디어의 발전과 함께 재편되는 뉴스산업의 구도 속에서 언론사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고, 이제껏 축적해온 취재와 보도의 기술을 새로운 소통방식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격변하는 환경에서 언론의 고민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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