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에 관한 명예보호의 엄정성을 기하기 위해 사법부에서 명예훼손과 관련, 유죄판단을 내린 경우에 한하여 제3자의 신고를 허용하면 좋겠다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최근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인터넷상 명예훼손 글에 대해 제3자의 신청 또는 직권으로 삭제할 수 있는 심의규정 개정을 추진하면서 논란이 커지자 박효종 위원장이 규정 개정 이유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밝혀 주목된다.

박 위원장은 지난 17일 오후 서울 목동 방송회관 회견장에서 열린 ‘인터넷 명예훼손 심의제도 개선 토론회’ 인사말을 통해 “정치인이나 유명인 등 공인은 일정 수준 비판을 감수해야 할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책무가 있는 이상, 심의규정을 개정함으로써 부당한 혜택을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서 공인에 대해선 제3자 신청으로 인한 명예훼손 심의가 남용되지 않도록 제한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현행 방통심의위 ‘정보통신에 관한 심의규정’이 “명예훼손 등 타인의 권리 침해와 관련된 정보는 당사자 또는 그 대리인이 심의를 신청해야 심의를 개시한다”고 돼 있어 상위법상 명예훼손죄가 ‘반의사불벌죄’인 만큼 당사자가 아닌 제3자의 요청이나 직권으로도 시정조치할 수 있게 하자는 당초 주장에서 한 발 물러선 것이다. (관련기사 : 당사자 신고 없이도 방통심의위가 글 삭제한다고?)

결국 박 위원장이 현행 심의규정을 개정 이유로 든 것은 공인이 아닌 개인, 인터넷 사용이 힘든 컴맹, 노인이나 장애인, 미성년자 등 사회적 약자가 사이버 폭력으로 명예훼손을 당하지 않도록 구제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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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재 규정으로도 미성년자와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가 대리인(법정대리인·후견인 등)을 통해 얼마든지 명예훼손 피해 구제를 받을 수 있는데, 굳이 공인에게만 제3자 신청을 제한해 인터넷 심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의도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사회적 약자 핑계를 대지만 심의규정 개정 착수 배경 등 궁극적으로 정부여권이 심의위에 ‘준사법적’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선거를 앞두고 여론통제에 나서려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손지원 고려대 인터넷투명성보고팀 연구원(변호사)은 18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박 위원장은 공인에 대해선 제3자의 신고를 제한하겠다지만 이를 심의규정에 명시하지 않고 내부규칙으로만 정하면 강제성도 없고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며 “예를 들어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 행적 의혹에 대해 산케이신문 측이 명예훼손 유죄판결을 받게 되면 그와 관련된 의혹들은 모두 심의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방통심의위 관계자는 “정치를 하다가 정치를 그만둔 국회의원 등 공인의 범위도 어디까지 설정하느냐에 따라 여전히 논란이 될 수 있다”며 “가령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을 일반인으로 볼 경우, 그와 관련된 정치인과 대통령에 대해선 얘기를 못 하게 막을 수 있는 우려는 여전히 살아 있다”고 밝혔다. 이에 따르면 일반인이나 일부 명예훼손 부분이 포함됐다는 이유로 나머지 비판이 사실이어도 전체 글이 차단될 수 있다.

김동찬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처장은 “박 위원장이 처음 내놓은 개정 이유는 상위법과 불일치였는데 그것만 갖고는 타당성이 없어 공인보다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다는 논리를 편 것은 어떡하든 규정을 바꾸겠다는 의도”라며 “단순히 통신심의규정 하나를 바꾸는 문제가 아니라 포털 정책과 뉴스제휴평가위원회 등 전체적 맥락에 인터넷을 통제하려는 다른 기획자가 있고, 심의위는 규정 개정을 위한 명분 쌓기를 하는 중”이라고 주장했다.

   
박효종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장이 지난 17일 오후 서울 목동 방송회관 회견장에서 열린 ‘인터넷 명예훼손 심의제도 개선 토론회’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방통심의위 제공
 

17일 박 위원장은 “여성들의 사생활 침해나 성행위 영상 유포 등은 더없이 참담하고 목불인견의 사안”이라며 “사이버 성폭력, 또는 학교폭력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법정대리인 외에 관련 학교나 선생님, 혹은 상담기관의 요청을 인정하도록 하는 등 제3자의 신고를 허용함으로써 친고죄의 요건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재 규정으로도 민법상 법정대리인이나 후견인 등을 필요로 하는 미성년자나 법률상 무능력자만 대리인을 통해 신고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일반인도 당사자의 위임장만 받으면 대리인을 선임할 수 있다. 미성년자나 금치산자 등도 법정대리인 등의 위임을 받으면 학교 선생님이나 관련 기관에서 대신 신고해 줄 수 있다. 심지어 대통령이나 정치인이라도 경찰청장이 대리인이 돼 명예훼손 심의를 신청할 수 있다. 

이날 토론회 토론자로 나온 양홍석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변호사는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명예훼손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 직접 심의나 제3자 신고에 의한 심의가 필요하다면 법정대리인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을 통해 신고할 수 있도록 보완하면 될 것”이라며 “사이버 성폭력은 음란물 등 불법정보로 간주해 대응할 수 있고, 학교폭력도 당사자가 신고하지 않으면 제3자가 나서서 신고하는 것이 과연 최선인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손지원 변호사는 “정말 사회적 약자들은 본인의 의사를 확인하기도 힘든데 어떤 제3자가 나서 주겠으며, 본인 의사 확인조차 어려운 사람들은 제3자 또는 심의위가 어떻게 명예훼손임을 판단해 심의가 가능한지도 모르겠다”며 “성행위 동영상은 지금도 제3자가 신청하면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따라 불법정보로 시정조치할 수 있다”고 밝혔다. (관련기사 : “명예훼손 글 제3자 삭제, 법적 근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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