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를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 설치된 ‘소녀상’으로 이해해도 될까? 현재 한국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일본제국이 전 세계를 향한 전쟁을 수행하면서 철없고 순진한 조선인 소녀들을 강제로 잡아가 성노예로 삼았지만 일본은 현재까지 사과 한 마디 없다. 물론 가끔 반성하는 일본인들도 있다.’

하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이렇게만 봐선 안 된다. 박유하 세종대 교수(일어일문학)의 ‘제국의 위안부’는 위안부의 문제가 더 복잡하다고 주장한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해방 이후 전범국이자 우리를 식민지배 했던 일본의 악행을 알리는 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위안부가 누구인지, 가해자가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논쟁이 시작된 것이다. 사실 한국 사회는 ‘어떤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일본인·조선인·대만인 ‘위안부’의 경우 ‘노예’적이긴 했어도 기본적으로는 군인과 ‘동지’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다시 말해 같은 ‘제국 일본’의 여성을 군인을 ‘위안’하는 것이 그녀들에게 부여된 공적인 역할이었다. 그들의 성의 제공은 기본적으로는 일본 제국에 대한 ‘애국’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남성과 국가의 여성 착취를 은폐하는 수사에 불과했지만, ‘일본’군인만을 위안부의 가해자로 특수화하는 일은 그런 부분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초판 137쪽) 

   
▲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지음/ 뿌리와 이파리 펴냄
 

박 교수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위안부 문제는 ‘조선인 소녀’와 ‘일본군’의 대립구도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일본군이 배후에 있긴 했으나 실제 위안부를 모집했던 이들은 친일 관료나 민간인 업주들이었고, 위안부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대다수가 소녀가 아닌 20대 이상의 여성이었다. 성노동자들이 참여한 경우부터 포주가 팔아넘긴 경우까지 다양하며 일본군과의 관계도 다양하다.

박 교수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이 중심이 된 위안부 운동이 민족주의화 됐다고 비판했다. 위안부 소녀상의 이미지로 위안부 문제를 단순화했다는 것이다. 정대협 탓에 일본을 용서하고 화해할 의향이 있는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묻혔고,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박 교수의 주장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개인적 청구권을 박탈한 한국정부와 위안부를 모집한 업주들에게도, 혹은 그들에게 더 많은 책임을 지우고,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아시아여성기금)을 받거나 일본 정부의 보상금을 받고 일본을 용서한 뒤 화해를 하자는 것으로 해석된다.  

박 교수는 이 책에서 ‘매춘’, ‘동지적 관계’ 등의 표현을 사용해 일본 우익의 주장을 대변하고 위안부 할머니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위안부 할머니들과 그들의 쉼터인 나눔의 집 소장과 고문변호사에게 지난해 6월 민·형사 고소를 당했다. ‘매춘’은 조선민족의 소녀의 순결한 성을 빼앗긴 것이 위안부 문제의 전부가 아님을 알리는 표현이었고, ‘동지적 관계’는 조선인 위안부의 국제적인 지위가 일본인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이었다고 박 교수는 설명했다.

고소 이후 일각에서는 박 교수를 ‘일제의 창녀’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런 논쟁이 빚어진 첫 번째 이유는 박 교수의 위와 같은 표현이 학문적이라기 보단 문학적인 표현, 즉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크게 보면 일본군이나 위안부나 생사여탈권을 일제에 빼앗긴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다. 동지의식을 느꼈을 수 있다. 이 사실을 이해할 필요는 있지만 ‘동지적 관계’로 규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둘째로는 ‘일본 정부의 법적책임’을 계속 묻기보다는 개인적 청구권을 박탈한 한국정부와 위안부를 모집한 조선인 업주의 책임을 더 강조했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오히려 일본 정부의 문제를 제국의 보편적인 문제로 봤다. 일제가 친일파들의 자발적인 악행을 가능케하기 때문에 일제도 책임이 있는 것 아닐까? 당시 조선에서는 공창과 유사한 위안부 시스템이 구축돼 굳이 일본군은 직접 나설 이유가 없었다. 이는 현재 일본 정부가 자신들이 ‘강제 연행’하지 않았다며 책임을 회피하는 근거다.

   
▲ 서울 종로구 일본 대사관 앞에 있는 소녀상. 사진=민중의소리 제공
 

지난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이후 한국사회는 위안부 문제를 ‘민족의 순결한 딸’이 더러운 일본 군인들에게 착취당한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의 일부일 뿐이다. 물론 이런 사실이 일본군과 정부의 책임을 줄이진 못한다. 혹 자발적으로 성노동에 참여했더라도 인권을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겁탈당한 순결한 소녀’가 아닌 위안부들은 위안소에서 뿐 아니라 지금도 입을 열 권리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이런 민족주의와 가부장문화에 기반한 위안부 문제 규정은 한국전쟁 당시에도 위안소를 운영했다는 사실에 대해 침묵하게 되는 부작용을 가져온다.  

이 책에 대한 소송에서 원고(위안부 할머니 측)는 첫 고소장에서 지적하던 109군데를 소송이 진행되면서 53군데로 줄였고 그 중 재판부는 34군데를 삭제해 출판할 것을 결정했다. 재판부는 삭제하지 않은 19군데에 대해서는 학문의 자유, 표현의 자유 영역이라고 봤다.      

지난 6월 발간된 ‘제국의 위안부’ 삭제판 서문에서 박 교수는 자신을 고소한 이유가 표현상의 문제 뿐 아니라 자신의 사회적 활동 자체를 억압하려 한 고소라고 주장했다. 고소장에는 “박유하의 활동을 방치한다면 왜곡되고 오염된 일본군 피해자의 상이 한국과 일본 사회에 각인될 것”이라고 돼 있다. 생각이 다른 자는 사회적으로 매장당해야 한다는 논리, 반대세력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박 교수는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서술했다. 올해는 한일협정(1965년) 50년이 된 해다. 일본 정부는 이 한일협정과 1990년대의 사죄한 사실을 근거로 끝난 사실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따라서 박 교수는 일본 정부의 이런 입장 탓에 아베 총리의 망언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이 부분은 또 다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아베 총리가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안다’는 의미를 ‘아베총리를 지지한다’고 해석한 결과다. 하지만 책을 읽어보면 박 교수는 “일본 정부의 그간 보상이나 협정은 전쟁에 대한 처리였을 뿐 애초부터 불법이었던 식민지배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며 “한국이 식민지배 자체에 대한 비판을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 일본군 위안소. 올해 광복절에 맞춰 개봉할 영화 '마지막 위안부'의 한 장면.
 

박 교수는 지난 2005년 ‘화해를 위해서’라는 책을 냈었다. 그의 주장처럼 위안부 문제는 ‘화해’해서 해결할 문제일까? 화해의 주체는 누구일까? 일본을 화해한 위안부 할머니의 의견과는 별개로 한국사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한국 사회는 또 다른 제국이라고 비판받는 미국 하원에 위안부 결의안을 기대하는 기존 민족주의자들이 위안부 문제해결을 주도하고 있고, 한국전쟁에서도 위안소가 운영됐다는 사실을 드러나기 부담스러워 하며, 제3세계에서 신부들을 사실상 돈을 주고 사오는 사회다. 이런 논의까지 확장시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 책이 아쉽다.      

역사는 기억의 투쟁이다. 기억을 지배하는 자가 현재를 지배한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편한 지점을 말하지 못한다면 지배자의 기억이 곧 역사가 될 것이다. 광복 70주년, 부족하지만 다시 박 교수의 불편한 질문을 다시 꺼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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