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두 곳을 운영하는 것도 힘들 텐데 하루에 책을 한두 권 이상 읽는 건 기본이고 하룻밤에 글을 다섯 편씩 쓰기도 한다. 새벽이 될 무렵까지 술을 먹고 집에 들어간 걸 봤는데 아침이면 한기호 블로그에 글이 한 편 올라가 있다. 새벽에 쓴 글이다. 도저히 사람이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데 한기호 소장은 그런 일을 30년째 하고 있다.”

어제 ‘작은책’ 안건모 발행인이 ‘오마이뉴스’에 내 책 『나는 어머니가 산다』에 대한 서평을 올린 것을 알았다. (관련기사 링크 : “‘6년째 간병중’ 아들,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이 서평을 읽는데 괜히 눈물이 났다. 나는 뭐지? 글에 언급된 내가 ‘괴물’처럼 보였다. 저렇게 살아도 되나? 하긴 나는 영업자 시절에 책을 더 많이 읽었다. 자유로웠다. 아무 책이나 읽으면 됐으니 말이다. 8박9일의 출장을 다녀오면 50권쯤 읽었다. 주로 베스트셀러나 가벼운 책이었다. 글을 쓰지 않았으니 부담도 없었다.

문득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평론가 역할을 하면서는 책을 더 읽을 수가 없다. 늘 바쁘다. 여러 사람을 만나니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그래서 서평 청탁이 오면 일부러 거절을 하지 않았다. 그게 족쇄가 돼야 책을 읽으니 말이다. 읽은 책 모두에 대해 서평을 쓰는 것은 아니다. 서평 연재를 하면 좋은 책을 고르기 위해서라도 많은 책을 읽게 된다. 그게 일이었고 그냥 편했다. 그런데 이제 지친다. 오래 앉아있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이번 주에 직원 몇 사람과 면담했다. 미안했다. 일은 잔뜩 벌여놓고 수습도 하지 못하니 직원들에게 별다른 비전도 보여주지 못하면서 고생만 잔뜩 시키는 것 같았다. 도망가고 싶다. 하지만 그러지도 못한다. 한 친구는 한 달만 쉬겠단다. 그러지 말라고 할 수도 없다. 속으로 나부터 쉬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런 말을 꺼낼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나는 신사업 기획안을 만들어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벌여놓은 일도 많다.

새벽에 ‘기획회의’ 397호를 읽었다. 이제 내가 만드는 잡지 같지가 않다. 내 글도 들어 있지만 왠지 생소하다. 깔딱 고개를 수없이 넘지 않고 헬리콥터를 타고 산의 정상에 오른 기분이랄까? 특집이 “바야흐로 웹툰 전성기다”다. 활동 작가 2000명, 1일 1000만 독자 시대를 연 웹툰을 다뤘다. “2018년 국내 만화산업 매출 1조 원 시대”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때 단행본 시장 전체 매출이 1조원이 될까? 웹툰을 게재하는 매체가 40여개란다. 해외 시장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단다. 특집의 총론「왜 사람들은 웹툰에 열광하는가」를 쓴 만화평론가 박석환은 웹툰의 ‘무료 가격 정책’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전통적 만화산업계에서는 ‘공멸의 길’이라며 비판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포털 웹툰의 무료 가격 정책은 소비자를 ‘급 확대’시켰고 주변 시장의 관심을 ‘급 집중’ 시켰으며 콘텐츠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역할을 했다. 종이책 판매가 주 매출원이었던 전통적 만화산업계 입장에서 보면 만화를 무료로 제공하고 광고 수익을 주 매출원으로 보는 포털의 비즈니스 모델을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포털이 종이책 판매액을 상회하는 광고 매출을 올리고 무료 서비스를 통해 얻은 콘텐츠에 대한 인지도를 기반으로 다양한 라이센스 사업을 전개하면서 수익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하자 입장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일부 웹툰을 중심으로 점진적이고 안정적인 ‘유료 전환’을 현실화 시키면서 전통적 만화산업계도 웹툰 플랫폼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포털이 바꾼 경쟁의 규칙 안에서 포털이 조성한 소비자 그룹을 위한 만화를 내놓게 됐다.”

“과거 한국의 만화가 ‘Manhwa’라는 이름으로 유럽과 미주 시장에 진출했다면 지금 세계 만화시장에서 한국만화를 대표하는 명칭은 ‘Webtoon’이 됐다”고 한다. “미국의 저명한 만화 이론가 스콧 맥클라우드, 영국의 만화평론가 폴 그라빗, 일본의 만화 이론가 오쓰카 에이지도 한국이 탄생시킨 세로 스크롤 방식의 디지털만화 ‘웹툰’에 집중하고 있다. 웹툰이 곧 전통적인 만화의 형과 식을 바꾸고 디지털화 된 사용자의 콘텐츠 이용환경에 맞춰 발전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판을 만들고 새로운 경쟁의 규칙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다. 출판도 디지털에 맞는 비즈니스 모델을 찾아내야 한다. 그게 아니면 이제 승산이 없다. 한 친구는 1조3000억 원에 불과한 단행본 매출이 곧 7000억 원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했다. 새로운 독자를 발굴하지 않으면서 줄어드는 시장에서 과당경쟁만 하다가 지쳐서 쓰러지는 사람들이 급격하게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매출액 규모가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흐름만큼은 정확하게 짚었다.

웹툰 시장을 우리 출판계가 왜 주도하지 못할까? 일본의 고단샤, 소각칸, 슈에이사 등은 매출의 절반이 만화다. 그런데 우리는 만화를 백안시했다. 나는 ‘기획회의’에 늘 만화 서평을 실었고, 『만화책 365』『만화가 담아내는 세상』도 펴냈다. 우연이겠지만 만화를 한국출판문화상 수상작으로 최초로 선정할 때에도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이 특집을 읽으니 내가 다른 세상에서 온 것처럼 생소하기만 하다. 특집도 이제야 꾸리다니? 하긴 후배들에게 넘겨주니 이런 특집도 나온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알겠다. ‘편집위원의 말’을 쓴 홍순철 BC에이전시 대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경험을 털어놓고 있다. 저작권 에이전트인 그는 태국의 한 유명 출판사에서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45권이나 되는 게임판타지 시리즈에 관심이 있다며, 권당 3000달러의 선인세를 제시하면서 번역 출간 의사를 밝혀와 놀랐던 경험을 털어놓고 있다. 그는 이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출판 프로세스에 대해 회의를 느껴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고, 이미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밝히는 30대 초반의 자신감이 넘치는 경영자로부터 많은 시사점을 얻은 것 같다.

홍 대표는 만감이 교차했다고 말한다. “단행본 출판 시장은 콘텐츠 시장 전체에서 보면 참 미약하구나” “단행본 출판사들이 모르는 또 다른 세계가 있구나”하고 말이다. 그는 “구로디지털미디어단지 내에는 베일에 가려진 채 24시간 오피스텔 내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집필에 열을 올리고 있는 수많은 작가 집단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고도 했다. 그는 게임판타지 소설에 목숨을 걸었다는 이가 했다는 다음의 말도 전한다.

“기존 작가들은 온라인 연재 시장에서는 성공할 수 없을 겁니다. 우리들은 이미 온라인 환경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여긴 작법이 완전히 달라요. 언제 어떻게 마무리해야 다음 연재에 독자들이 다시 찾아올지 우리는 그걸 알고 있습니다.”

홍 대표는 또 이렇게 말한다.

“게임판타지 소설과 웹툰의 공통점은 ‘플랫폼’입니다. 힘이 있고 돈이 있는 업체들이 플랫폼으로 나서주면서 ‘콘텐츠 파워’가 생겨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통적인 단행본 출판 시장의 현실은 어떤가요? 물론 단행본 출판도 전자책이라는 포맷을 통해 플랫폼 변화에 대응해가고 있다지만, 태생부터가 다른 단행본 콘텐츠는 온라인 플랫폼에서 살아남기가 쉽지 않습니다. 단행본 콘텐츠를 나누고, 쪼개고, 잘라서 온라인에서 팔아보겠다고 하지만, 이미 온라인 플랫폼용으로 만들어진 콘텐츠와 경쟁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모든 주도권이 온라인으로 넘어간 세상에서 전통적인 단행본 출판사들이 돌파구를 찾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나는 ‘동아일보’ 2000년 5월 29일자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이런 식의 준비로는 e북이 성공할 수 없다는 의미다. 종이책이냐 e북이냐, 아날로그냐 디지털이냐 죽기살기의 양자택일을 넘어 상생(相生)을 모색해야 한다. 디지털은 디지털에 맞는 콘텐츠를, 아날로그는 새로운 아날로그로 탈바꿈하는 것이지 전자책이 일시에 종이책의 자리를 대체할 수는 없다. 반대로 아날로그의 콘텐츠를 디지털로 장소이동만 하면 된다는 생각 역시 디지털에 대한 모독이다.”

어쩌다 출판계는 온라인 플랫폼의 주도권에서 완전 소외되었을까? 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내가 대안연구공동체가 기획한 작은 책 시리즈 ‘인문학, 삶을 말하다’를 새로운 브랜드 ‘길밖의길’을 만들어서 출간해준 것은 새로운 플랫폼 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책이라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 물론 저자들의 글은 온라인에 맞게 쓴 것이 아니다. 그런 한계가 있지만 앞으로 강의 영상과 함께 모바일로 서비스할 수 있는 세상이 곧 올 것이다. 그래서 콘텐츠부터 확보해둘 필요가 있다. ‘기획회의’ 397호 특집의 아이디어를 낸 것으로 보이는 홍 대표는 ‘편집위원의 말’을 이렇게 끝내고 있다.

“얼마 전 인기 웹툰 ‘패션왕’ ‘조선왕조실톡’ 등을 제작하고 있는 콘텐츠 제작 전문회사가 모 투자자문회사로부터 30억 원의 투자를 유치했다는 소식을 언론 보도를 통해 들으셨을 겁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을 대표하는 한 출판사가 자중지란 가운데 수백억 원대의 송사에 휘말렸다는 보도가 대형 일간지의 사회면을 장식했는데요. 상반된 두 기사가 현재 대한민국 웹툰시장의 현실과 단행본 출판 시장의 현실을 압축해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해집니다.”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너무 안일하게 살아왔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대처해야 한다. 그래야 후배들이나 직원들에게 제대로 멍석을 깔아줄 수 있다. 이제 멍 때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정신 차리고 제대로 그리고 열심히 뛰어야 한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의 블로그 글을 필자의 허락을 얻어 기고 형태로 전재했습니다. 편집자 주. http://m.blog.naver.com/khhan21/220442456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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