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러블메이커’가 KBS 문을 두드리고 있다. MBC 대주주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8·9기 이사로 활동한 차기환 이사가 KBS 차기 이사로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전례 없는 공영방송 이사의 ‘3연임’(9년)이 실현될 조짐이다. 

KBS·방문진 이사 선임 권한을 쥔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는 지난달 31일 차기 이사회 추천·선임 의결을 마무리하려 했다. 하지만 방통위 야당 추천 상임위원들은 이사 인선 기준을 마련하지 않은 상태에서 의결을 강행할 경우 기존대로 여야 7:4(KBS이사회), 6:3(방문진) 구도로 ‘정파적 나눠먹기’가 될 것이라고 우려를 나타냈다. 이에 이사 선임은 연기된 상태다. 

야당 위원들은 “특정인의 이사 3연임을 금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3연임 가능성이 점쳐지는 인사는 KBS·방문진 이사직에 각각 지원한 차기환, 김광동 방문진 이사뿐이다.

BH, 이사 자질보다 정치적 판단에 골몰

두 인사 가운데 보다 유력한 인물은 차기환 이사다. 청와대가 그를 밀고 있다는 얘기가 적잖이 흘러나온다. 새누리당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관계자 다수는 “정치권이 추천하는 각 방송사 이사의 여당 몫은 원내대표나 상임위원장과 청와대에서 협의해 결정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방통위 속사정을 보더라도, 차 이사를 두고 여야 힘겨루기가 한창이다. 야당 위원들은 ‘문제적 인사 이사 임명 강행 시 의결 거부’라는 배수진을 쳤다. 이에 대한 최성준 방통위원장의 반응에 주목해야 한다. 그동안 여·야 합의를 중시하던 최 위원장이 협의 시도도 좀체 하지 않는다는 데서 차 이사의 ‘청와대 낙점설’에 무게가 실린다. 차 이사가 단순 추천 인사라면 최 위원장이 나서서 협상하려 할 텐데 ‘BH 오더’가 내려진 인사이니 진척 없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다. 

   
▲ 지난해 세월호 유가족 대리기사 폭행 사건과 관련해 대리기사 이아무개씨 측 김기수, 차기환 변호사(왼쪽)가 9월 29일 오전 서울 신정동 남부지검에서 새정치민주연합 김현 의원에 대한 고소장을 접수하고 민원실을 나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차 이사가 6년 동안 방문진 여당 이사로서 방송장악 ‘미션’을 제대로 수행했다는 점을 청와대가 높이 샀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MBC 내 한 인사는 “청와대에서 KBS 역시 장악해야 한다는 취지로 그를 특파한 것인데, 이는 차 이사가 방문진을 맡으면서 MBC를 장악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판단한 것”이라며 “이사로서의 자질을 따진다기보다 정치권이 오로지 정치적 판단에만 골몰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이사가 ‘MB계’ 인사로 인식된다는 점도 차 이사의 ‘비교우위’다. 두 사람 모두 ‘뉴라이트 계열’ 인사다. 그러나 김 이사는 2006년부터 MB의 비공식 자문역을 맡으며 당선 이후 대통령인수위 정무분과위 전문위원으로 활동했다. 김 이사는 사석에서 “MB정부 이동관 전 청와대 대변인 추천을 받아 방문진에 오게 됐다”고도 말한 바 있다. 

차 이사가 박근혜 대통령의 수첩에 적혀 있는 것일까. 몇 가지 추론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 언론계의 또 다른 인사는 현 정부의 ‘아킬레스건’인 세월호 얘기를 꺼냈다. 그는 “차 이사는 현재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비상임 조사위원”이라며 “현 정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세월호의 진상규명이라는 점에서 이번 인선은 주목할 만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지난해 7월 자신의 트위터에 “세월호 일부 유족들의 요구가 너무 지나치다. 사망자 전원 의사자 인정(의사자 개념에 맞지 않는다), 피해자 형제자매까지 특례입학 인정, 유가족 평생 생활 지원을 요구. 진상규명에 동의하는 여론을 저 무리한 요구에 동의하는 걸로 확장 해석하는지 점검이 필요하다”며 잘못된 사실을 전파하기도 했다. 또 세월호 희생자 고(故) 김유민 양의 아버지 김영오씨에 대해서도 트위터에 일부 언론의 왜곡을 사실인양 썼다. 그런데도 차 이사는 지난해 12월 새누리당 몫 세월호 조사위원으로 선출됐다.

한 유가족은 “여당 위원의 방해공작을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게 참으로 답답하다”며 “차 이사는 시간을 끌어 특조위 조사를 지연시키는 사실상 ‘방해세력’이었다. KBS 이사로 간다는 데 앞으로 세월호 보도가 KBS에서 제대로 나올지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의 목소리는 외면하고 방해공작만 일삼았다는 것이다. 
 

   
▲ KBS 이사직에 지원한 차기환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왼쪽)과 이인호 KBS 이사장. (사진 = 미디어오늘, 연합뉴스)
 

KBS를 ‘이념의 도가니’로?

차 이사는 ‘박원순 저격수’를 자처한다. 지난해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서울시는 친환경제품이라는 이유로 시중가보다 30~50% 비싼 가격으로 수의계약을 하고 풀무원으로 납품을 받았다”는 극우사이트 일베 글을 퍼나르며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자를 공격했다. 

현재는 박원순 시장의 아들 주신씨에 병역 의혹을 제기한 양승오 박사의 변론을 맡으며 자신의 SNS 등을 통해 관련 의혹을 전파하고 있다. 검찰은 지난해 양 박사를 허위사실 유포 혐의를 기소했고 공판이 진행되고 있다. 차 이사는 지난달 28일 <시사저널>과 인터뷰에서 “박(주신)씨가 1시간만 내서 척추 사진을 찍으면 모든 의혹이 풀린다”며 “만일 귀국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우리가 판사·검사·의사를 대동해 영국으로 찾아가 그곳에서 촬영할 의향도 있다”고 했다. <관련기사 : “95㎏ 35세 이상 남자가 병역 비리 도왔다”>

언론계의 또 다른 관계자는 “차기 권력에 대해 연일 의혹을 제기하는데, 현 정권 입장에서는 이런 인사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 손해 보는 장사가 되진 않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차 이사가 KBS 이사가 됐을 때 긴장해야 할 곳은 MBC다. MBC 쪽 한 인사는 “방문진에 6년이나 있었기 때문에 MBC 내부 사정을 꿰고 있을 것”이라며 “그가 경쟁사인 KBS로 가서 MBC 편성 전략 등을 발설하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방문진에서 KBS로 옮기는 것을 MBC 구성원들이 우려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KBS 내부도 현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KBS의 한 관계자는 “방문진 이사를 6년이나 한 사람이 KBS로 옮겨 온다는 것에 대해 사내 직종과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거부감이 심하다”며 “자존심 상해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전했다. KBS노동조합도 지난달 30일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에 매진해도 모자랄 판에 KBS 이사까지 겸임하겠다는 것은 누가 봐도 과욕이요 상식에도 맞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뉴라이트 인사 이인호 KBS 이사장과 함께 KBS를 ‘이념·정쟁의 도가니’로 만들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고삼석 방통위 야당 상임위원은 “이념·정치 편향성으로 무장한 인사들을 이사로 임명해 공영방송을 전쟁터로 만들겠다는 것이냐”며 “지금이라도 국민 여론을 경청해서 무모하고 잘못된 인사를 포기해야 한다”고 했다. 

   
▲ 언론노조 MBC본부는 지난 2012년 공정방송 사수를 위한 총파업을 결행했다. 파업 과정에서 MBC는 박성호 기자회장을 비롯해 정영하 MBC본부장, 강지웅 사무처장, 이용마 홍보국장, 박성제 기자, 최승호 PD 등을 해고했다. 정권의 방송 장악 ‘상흔’은 여태 아물지 못하고 있다. (사진=언론노조 MBC본부)
 

“앞으로도 ‘공영방송 망가뜨리기’ 계속될 듯”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 여론을 경청해 무모하고 잘못된 인사를 포기’하기란 쉽지 않을 전망이다. 현재 박근혜 정부는 보수 언론과 종편의 비호 속에서 아슬아슬한 30%대 지지율로 국정을 수행하고 있다. 공영방송이 그간의 스탠스와 달리 현 정부에 비판적으로 나온다면 상황은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 수 있다. 

무엇보다 공영방송 정상화에 대한 권력의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박 대통령은 지난 2012년 대선 후보 시절 MBC노조의 파업 과정에서 김재철 사장 퇴진과 방송 정상화를 약속했지만 파업 철회 후 돌변했다. 

세월호 국면에서 KBS에 보도 압력을 가한 곳도 청와대였다. 지난해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이 외압의 주체로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목하며 “정부 쪽에서는 해경을 비난하지 말 것을 여러 번 요청했다”고 폭로한 사실은 국민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공영방송 정상화’ 약속은 허울에 불과했다.

MBC의 한 기자는 “MBC와의 약속도 당선이 되고 나니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며 “정권 유지 측면에서 지금과 같은 ‘공영방송 망가뜨리기’ 계속 그런 길로 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결국 박 대통령의 선택한 것은 지난 정권이 키운 ‘트러블메이커’였다. 그들은 여전히 공영방송을 배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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