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클래식 음악도 역사 속에서 탄생하여 진화하고 소멸하는 음악이란 뜻이다. 클래식은 문턱이 높은 고급음악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음악이 결코 아니다. 클래식 음악이 어느날 진화를 멈춘다 해도 우리에게 남겨진 수많은 작품들은 여전히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이다. 클래식의 전모를 한눈에 파악하려면 그 진화의 역사를 단순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클래식을 객관화시켜 놓고 바라볼 때 ‘클래식 콤플렉스’ - 이는 올해 방송대상 TV문화예술부문 작품상에 선정된 다큐멘터리(MBC경남 전우석 PD 연출)의 제목이기도 하다 - 를 벗어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둘째, 클래식 음악의 범위를 가급적 좁게 놓고 보아야 접근하기가 쉽다. 나는 클래식 음악이 최초의 오페라 <오르페오>(몬테베르디)와 함께 1607년에 시작됐다고 본다. 칼로 두부 자르듯 어느 한 해에 클래식 음악이 갑자기 탄생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피렌체의 카메라타를 중심으로 소나타, 칸타타 등 여러 종류의 음악 양식이 진화하고 있었으며, 만토바에서 <오르페오>가 탄생한 1607년은 상징적인 랜드마크일 뿐이다. 그 이전의 교회음악인 그레고리안 성가와 한국음악,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음악도 클래식의 범위에서 일단 제껴놓자. 그 음악들의 가치를 폄하하자는 건 결코 아니다. 우리가 보통 클래식이라 부르는 근대 유럽의 음악에 한정하여 고찰을 시작하자는 것이다.  

   
 
 

유럽이 전세계를 지배하게 된 ‘대항해의 시대’는 클래식이 발전할 물적 토대를 만들었다. 콜럼버스의 항해, 코르테즈와 피자로의 정복 등 대항해시대에 유럽은 아메리카 대륙의 금과 은을 약탈하고 아프리카 노예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으며 자본주의의 토대를 만들어 갔다. 클래식 음악은 이러한 역사적 조건 아래서 잉태된 것이다. 또 하나는 요인은 종교개혁이다. 유럽은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변화해 갔고, 이 분위기 속에서 개인의 자유와 존엄에 대한 자각도 싹트기 시작했다. 마녀사냥이 횡행하고, 조르다노 브루노가 화형당하고,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부인하여 가까스로 죽음을 면한 암흑의 시대였지만 인본주의의 여명은 이미 피어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르네상스였다. 기독교가 유럽을 지배하기 이전의 그리스 문화를 다시 발견하여 인간성의 회복을 꾀하는 움직임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은 그리스 비극이 음악과 함께 공연됐음을 발견하고 이를 지금 시대에 맞게 재현하려고 했다. 최초의 오페라는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1781년 6월 8일은 또 하나의 랜드마크가 된다. 모차르트(1756~1791)가 잘츠부르크 통치자 콜로레도 대주교에게 쫓겨난 그날은 음악사상 최초로 자유음악가가 탄생한 날이었다. 이 날이 음악사의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주장한다면 웃을 사람이 많겠지만, 나는 그 상징적 의미에 주목할 만 하다고 생각한다. 계몽사상이 유럽을 휩쓸었고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이 태동한 시대였다. 비발디, 바흐, 헨델, 하이든 등의 음악도 물론 훌륭하지만 대체로 봉건귀족과 성직자들을 위한 음악으로, 지금 들으면 숙명적으로 과거의 음악으로 들린다. 반면, 모차르트가 마지막 10년 동안 세상에 내놓은 음악은 작곡가 이건용 선생의 지적대로 ‘최초의 현대음악’이라 할 수 있다.

모차르트의 시대는 대중음악과 고급음악의 경계가 사라진 유일한 시대였다. 그 시대의 ‘현대음악’이었던 모차르트의 음악은 즉각 대중의 열광과 환호를 이끌어냈다. 최초의 현대음악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베토벤(1770~1827)도 마찬가지였다. 베토벤에 이르러 자유음악가의 정신은 신분제도를 뛰어넘어 빛나는 도약을 이루게 된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시대는 유럽 역사에서 시민계급이 혁명성을 갖고 있던 유일한 시대였고, 두 위대한 천재는 이러한 시대정신에 걸맞게 인간 정신이 이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었다.

모차르트는 본질적으로 오페라 작곡가였다. <피가로의 결혼>, <돈조반니>, <마술피리> 등 대표적인 오페라에서 모차르트는 자기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제시했다. 그것은 사랑과 자유의 음악혼이었다. 베토벤은 교향곡에서 자신의 모습을 한껏 드러냈다. 교향곡의 혁명이자 혁명의 교향곡인 3번 <에로이카>, 운명과의 투쟁과 승리를 그린 5번 C단조, 자연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감사를 노래한 6번 <전원>, 춤과 리듬의 대향연이자 디오니소스의 축제인 7번 A장조, 그리고 인류의 형제애와 환희를 찬양한 9번 <환희의 송가>는 세월이 흘러도 변치않는, 클래식 음악의 최고봉이다. 모차르트의 오페라와 베토벤의 교향곡은 클래식 음악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이자, 클래식 음악의 진수라 할 수 있다.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메테르니히 체제가 성립한 1815년 무렵 시민계급 또한 보수화되었고, 고독해진 베토벤은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했다. 그의 마지막 피아노소나타들과 현악사중주곡들은 대중들에게 어려웠다. 대중들은 클래식 음악과 다시 멀어지기 시작했고, 창조적인 작품들은 즉시 이해되고 수용되기 어려워졌다. 일종의 ‘타임 래그’가 다반사가 된 것이다. 낭만시대의 천재들은 베토벤을 극복하려고 새로운 실험을 계속했는데, 이 과정은 대중들이 클래식 음악과 점점 더 멀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말러(1860~1911)에서 교향곡은 하나의 정점에 도달했는데, 대중들은 이 거대한 작품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말러는 “나의 시대는 올 것”이라고 말했는데, 1970년대를 지나며 말러의 시대가 왔다.          

1908년 12월 21일은 음악사에서 또 하나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다. 이날 초연된 쇤베르크의 현악사중주 2번에서 무조음악이 전면에 등장했다. 음악에서 조성은 감정을 표현하는 그릇이었다. 조성을 배제한다는 것은 감정을 배제한다는 뜻이 된다. 쇤베르크 이후 20세기 음악은 감정을 담지 않은 순수한 사운드의 세계로 질주했다. 쇤베르크는 “나의 음악을 대중들이 흥얼거리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했는데, 100년이 지나도록 그 시대는 오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100년전 음악을 ‘현대음악’이라고 부르는 이상한 시대를 살고 있다. ‘현대음악’은 이해할 수 없는 음악과 동의어가 되고 말았다. 쇤베르크는 훗날 자기의 무조음악 실험이 조성음악의 발전을 저해한 게 아닌가 되물었는데, 음악사의 큰 흐름은 돌이킬 수 없었다.

그러나 무조음악의 탄생을 클래식 음악의 종말로 단정할 수는 없다. 쇤베르크 이후에도 위대한 천재들은 새로운 작품들을 계속 내놓았다. 사회주의권의 쇼스타코비치(1906~1975), 쿠르트 바일, 한스 아이슬러, 파울 데사우를 빼놓을 수 없다. 음악에 인간의 영혼을 되살려 놓은 메시앙(1908~1992), 서양의 음악어법에 동양사상을 담은 윤이상(1917~1995)을 외면한 채 우리 시대의 음악을 얘기할 수 없다. 따라서 클래식 음악의 진화과정을 요약하려면 20세기말까지 살펴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가 태어난 1607년부터 윤이상 선생이 돌아가신 1995년까지 대략 400년을 클래식 음악의 생애라고 정의하려 한다. 이 사이사이에 무수히 다양한 변주가 있었음을 부인하는 게 아니다. 빈필 신년음악회, 앙드레 리외, 한국의 열린음악회 등 대중들이 즐길 만한 가볍고 편안한 비더마이어 전통도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20세기, 막다른 골목에 도달한 클래식 음악의 주류에서 이탈하여 영화음악 등 실용음악으로 방향을 돌린 분들도 간과할 수 없다. 이 모든 변주를 인정하되, 큰 흐름만 요약하면 ‘클래식 400년’이 된다.

클래식 음악의 탄생과 진화 과정을 하루라고 치자. 몬테베르디에서 하이든에 이르는 기간은 오전에 해당되고,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음악은 정오의 음악이며, 말기 베토벤과 슈베르트부터 20세기 음악까지는 음악의 오후다. 해뜨는 새벽부터 해저무는 저녁까지, 클래식 음악의 하루는 인간의 시간으로 환산하면 40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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