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는 2014년 5월 14일 백혈병 피해자 대책에 대한 사과와 재발 방지 대책을 약속했습니다. 그 후 삼성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가 꾸려졌습니다. 조정위는 사과, 보상, 재발방지 대책이라는 3가지 조정 의제에 대하여 7월 23일 권고안을 내놓았습니다.

이 권고안은 피해자 개개인의 아픔을 치유하는 문제부터 거대한 전자산업에서 나타날 수 있는 심각한 직업병 문제까지 어떻게 해결될 것인지를 판가름 할 수 있어 관심이 큽니다.

6월 23일 삼성노동인권지킴이,노동환경건강연구소가 <삼성직업병 문제, 올바른 해결방안 마련을 위한 토론회>를 열어 토론회를 개최해 삼성직업병 문제의 사회적 의미를 다시 환기하고, 재발방지를 위한 조정안 마련과 더불어 삼성의 사회적 책임을 촉구한 적이 있습니다. 이날 발표자와 토론자로 윤충식(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교수), 노상철(단국대학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 강문대(민변 노동위원장) 님이 연속으로 기고문을 실었습니다. 이번에 기고글을 보내준 김신범(노동환경건강연구소) 님은 토론회 발제 내용과 이어 조정위 권고안에 대한 소회를 다음과 같이 밝혀주었습니다. <편집자주>

삼성 직업병에 대한 조정위원회의 마지막 결정을 앞두고 토론회 발제 요청을 받았다. 주제는 <삼성의 직업병 예방 대책>이었다. 지극히 일반론적인 얘기를 준비해서 발제를 마쳤다. 삼성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기 때문이다. 회사를 방문해 둘러본 경험도 없었고, 반도체 산업에 대해 공부를 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발제 요청을 거부하지 않은 것은 바로 모르는 것을 얘기하기엔 내가 딱 적임자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발제 내내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잔뜩 얘기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지 모른다는 말이 있다. 선무당이 사람 잡고,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요,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도 있다. 이 넷은 모두 아는 것 또는 모르는 것에 대한 속담이다. 난 이 속담들이 화학물질 안전관리에 참 잘 어울리는 속담들이라고 생각한다. 위험을 잘 모르면 두렵지도 않다. 독성을 잘 모르면서 아는 척하고 괜찮다 하다가는 누군가에게 꼭 피해를 주게 된다. 화학물질이 위험하진 않은지 알려고 노력하고, 우리가 아는 게 별로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 조심하게 되어야 오히려 미지의 위험에 대비할 수 있고 안전을 도모한다.

   
 
 

인류의 지식은 참 불공정하게 발전해왔다. 우주 저 멀리에 있는 별까지 탐사선을 보내고 생명체를 복제할 정도의 과학기술이 발전했는데, 화학물질의 독성과 안전에 대한 지식은 이제 신석기 시대를 갓 넘은 수준이라고나 할까. 예를 들어 전 세계에 13만 종의 화학물질이 존재하는데, 이 중에서 독성을 알고 대처할 수 있는 화학물질은 채 10%도 안 될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 산하에 국제암연구소라는 곳이 생긴 게 1970년대의 일인데, 지난 40년 동안 발암성을 검토한 물질 수가 겨우 천 개 조금 넘는 수준이니 말을 다했다. 그나마 유럽에서 ‘독성정보 없으면 판매할 수 없다(no data no market)’는 원칙하에 새로운 화학물질 관리 제도가 시행된 것이 2007년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이것을 본 따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이 시행된 것이 2015년 올해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화학물질들의 독성이 무엇인지 한창 파악하는데 열을 올리는 중이다. 그런데, 최근 화평법을 시행하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반도체 전자산업이 연구개발용 신규화학물질을 가장 많이 사용하며, 연구개발을 지원하기 위해 이 물질들은 독성을 몰라도 사용이 허락된다고 한다. 우리가 화학물질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은데, 삼성 같은 기업은 더더욱 독성을 모르는 물질을 더 많이 취급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미지의 위험’이야 말로 삼성의 화학물질 관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열쇳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미지의 위험에 대해 기업이 대응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여야 할까? 지난 토론회 발제를 마무리하며 난 이렇게 제안했다. 전자산업에 대한 연구기금을 조성하여 기업의 영향력 없는 연구가 진행되도록 하고, 그 결과를 기업의 안전보건관리에 적극 수용할 것. 잘 모르는 위험에 대해 직원들에게 알리고 혹시 걱정되는 상황은 없는지 의논하는 분위기와 절차를 마련할 것. 기업의 화학물질 관리 정책과 사업에 대해 주기적으로 평가하고 개선할 것. 독성을 잘 모르는 화학물질 등 미지의 위험에 대해 기업의 자체 기준을 수립하고 공개하여 전체 산업의 안전을 이끌 것. 물론, 여기에서 기업이란 <삼성>을 말했다. 그리고 며칠 전 조정위원회의 의견을 받아보았다. 공익법인을 설립하여 보상은 물론 예방을 위한 연구와 모색을 할 수 있게 하고, 옴부즈만 제도를 도입하여 삼성의 화학물질 관리정책과 체계에 대해 점검하자는 제안이 한 눈에 들어왔다. 삼성이 이 제안을 수용하여 화학물질 관리의 노력을 공개하고 공익법인을 통해 그 노력을 인정받고자 한다면, 우리 사회가 화학물질에 대해 몰라서 용감했던 한 시대를 끝낼 수 있게 될 듯하다. 삼성이 조정위원회의 제안을 멋지게 수용하는 모습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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