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내에 스포일러 있습니다)

최동훈 감독의 <암살>을 두 번째 보면서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어렴풋이 알았다. 그리고 눈물이 났다. 해방이 되고나서 백범 김구가 약산 김원봉을 중국의 임시정부에서 만나 기쁘지 않냐고 할 때, 약산은 고량주에 불을 붙이면서 너무 많은 이들이 죽었다고, 그들의 이름을 하나씩 거론하면서 슬퍼한다. 이것은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죽은 이들의 혼을 부르는 행위이다. 그렇게 살다간 이들을 기리고 추모하는 작업. 함께 독립 운동을 했지만 함께 해방을 맞이하지 못하고 먼저 떠나간 사람들에 대한 최대한의 도리인 것이다. 이 장면을 보고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영화가 모든 끝이 났다고 생각했을 때, 감독은 영화 속의 몇 장면을 편집해 보여주면서 정말로 영화의 끝을 맺는데, 그 가운데 한 장면이 영감이 안옥윤에게 하는 말 “3000불, 우리 잊지마”이다. 이 말은 이 장면보다 조금 앞에 등장했기 때문에 다시 등장하기가 자연스럽지 않지만, 감독은 굳이 이 장면을 넣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해방 직후 약산이 했던 말과 댓구를 이루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독립을 위해 싸운 이들을 잊지 말라는 전언.

속사포와 안옥윤, 최덕삼이 경성으로 와서 1930년대의 문명을 즐기는 모습을 보면, 이들도 당시 사람들처럼 소시민으로 살 수 있었을 것이라는 잔상을 심어준다(이 장면도 엔딩에 다시 사용되었다). 그들이라고 왜 인간적인 욕망이 없겠는가? 목숨을 건 독립운동을 하는 것보다 경성의 문물에 빠져 연애도 하고 즐기는 삶을 싫어할 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목숨을 걸고 싸웠고 대부분은 대의를 위해 죽어갔다.  

   
▲ 영화 <암살> 포스터
 

그래서 이 엔딩이 있기 직전의 장면은 더욱 가슴 아프다. 염석진이 반민특위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 받았을 때, 판사는 신경질적으로 방망이를 던져버린다. 염석진이 밖으로 나오자 그를 환송하려는 경찰이 있고, 그 뒤로 북진통일이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하는 이들이 있다. 반민특위는 빨갱이들이 하는 짓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것이 와해될 것이라는 사실을 이 한 컷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친일 경찰은 대한민국의 경찰이 되었다.
 
다시 앞으로 가보자. 이 장면의 몇 장면 앞. 거사에서 저격을 당한 안옥윤을 하와이 피스톨이 병원으로 데리고 간다. 이때 안옥윤에게 하와이 피스톨이 묻는다. 이렇게 친일파 몇 죽인다고 독립을 이룰 수 있겠냐고? 안옥윤은 대답한다. 독립을 이루려는 게 아니라 이렇게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그런다고. 이 장면에서 나는 정말, 참을 수 없는 눈물이 났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조선도 나라인데 전쟁 한번 없이 식민지가 된 것이 어이없다던 어머니의 당찬 물음에 대한 딸의 옹골찬 대답 아닌가!

   
▲ 영화 <암살> 스틸컷
 

그러나 이 장면에 대한 진짜 대답은 마지막 장면에 있다. 염석진이 경성 거리를 걷다가 미츠코를 보고 따라간다. 이윽고 나타난 외딴 빈민가. 염석진은 상하이에서 자신이 죽였다고 생각했던 부하 명우를 이곳에서 만나면서 미츠코가 안옥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왜 변절했냐고 물으니, 답이 돌아온다. 해방이 될 줄 몰랐으니까. 해방될 줄 알았으면 변절했겠느냐고 오히려 소리를 지른다. 아, 숱한 친일파들이 했던 대답. 바로 그것이다. 해방이 될 줄 몰랐으니 친일파가 되었다가 해방이 되자마자 친미파로 신속하게 이동한 이들의 생존전략.

염석진이 일제의 밀정이라면 죽이라는 백범 김구의 명령을 명우는 16년이 지나서야 실행한다. 이때 카메라는 쓰러지는 염석진을 따라 밖으로 나가는데, 그곳은 허허벌판이다. 빨래줄에 하얀 적삼 같은 것이 걸려 바람에 펄럭이는 허허벌판. 순간, 나는 이곳이 만주의 벌판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곳에서 죽어간 무명 독립군들의 혼이 하얀 적삼에 펄럭이는 것처럼 보였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그들의 죽음이 결코 헛된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이 마지막 장면이 알려주고 있었다.

   
▲ 영화 <암살> 스틸컷
 

이렇게 보면 영화 <암살>은 처음부터 끝까지 암살을 다루고 있다. 김구와 김원봉이 거사를 준비하는 과정부터, 밀정을 처단하는 모습, 경성에서 친일파와 조선주둔군 사령관을 살해하는 모습까지 모두가 암살이다. 마지막으로 일제의 밀정이자 친일 경찰이었던 염석진을 죽이는 방법도 암살이다. 반민특위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리자(증인을 살해해 버렸다), 결국 암살을 통해 복수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 이후 나라를 되찾아도 합법적인 방법이 아니라 암살을 통해서만 죄값을 물을 수 있었던 시대에 대한 이 암울한 영화적 재현.

상해 임시 정부의 김구는 언제나 암살의 대상이었다. 그를 노리는 숱한 사람이 있었기에 그는 안전할 수 없었다. 김원봉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일제, 일제의 밀정, 현상금을 노리는 이들 등등에게 암살의 표적이 된 것은 사사로운 일 때문이 아니었다. 김구와 김원봉은 친일파나 일제 고위층을 암살하는 계획을 세웠고 이를 실행했다. 그래서 일부에서 김구를 두고 ‘테러리스트’, 또는 ‘테러리스트의 수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시대, 암살 외에 다른 방법이 있었을까? 영화에 등장하지만,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대첩 이후 간도에 살고 있는 조선인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잔혹하게 살해한 이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암살 외에는 없었다. 내가 본 영화 <암살>은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암살을 실행하다가 죽은 독립군을 잊지 말라고 한다. 영화 <암살>은 상업적으로도 재미있고, 스토리적으로 할말도 많으며, 스타일적 매력도 충분하지만, 나에게는 먼저 이 점이 강하게 다가왔다. <암살>은 단지 좋은 영화라고 하기에는 아쉬운, 그 범위를 넘어서는 영화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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