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 6일 세월호 희생자 구조에 나섰던 민간 잠수사 이광욱씨가 사망했다. 다음날인 7일 고명석 범정부사고대책본부(범대본) 대변인은 “해경이 작업 현장에서 전체적으로 총괄 책임을 쥐고 있다”며 해경의 책임이라고 밝혔다. 몇 달 뒤 잠수사 이씨의 사망에 대해 책임지는 해경 관계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민간 잠수사 공우영씨가 검찰에 기소됐다.

공씨는 세월호 참사 당일 구난업체 ‘언딘’으로부터 “함께 세월호를 인양하자”는 요청을 받았다. 서둘러 목포에 내려갔더니 전원 구조됐다는 언론 보도는 오보임이 밝혀지고 실종자가 약 300여명이라는 소식을 듣고 공씨는 “인양이 아니라 실종자 수습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공씨에 따르면 국가에서 보유하고 있는 바지선은 17m×40m 규모였다. 해경에서는 빨리 준공도 나지 않은 언딘 리베로호(22m×60m)를 요청했다. 세월호가 145m나 되기 때문에 큰 바지선이 필요했고, 뒤늦게 온 리베로호 역시 잠수사들이 누울만한 침대조차 마련되지 않은 채 실종자 수습을 위해 투입됐다. 작업이 시작됐다. 24명의 민간 잠수사들은 물때를 맞춰 일하기 위해 거의 잠도 자지 않고 실종자를 수색했다.  

   
왼쪽 빨간 펜을 들고 있는 잠수사 공우영씨. 공씨가 동료 잠수사들과 세월호 희생자 수습 업무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사진=공우영씨 제공.
 

당시 현장에서 공씨는 해경과 민간잠수사의 중간다리 역할을 맡았다. 35년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경에서 권한을 주는 것도 없다. 그냥 내가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으니까 잠수사들을 리드하게 된 거고 잠수사들도 자연스럽게 의지하게 됐다.” 동료 잠수사들도 공씨가 해경의 지시를 전달하는 역할에 그쳤다고 말했다.

공씨와 잠수사들은 바지선에 TV도 놓지 말고 스마트폰으로 뉴스도 보지 말자고 했다. 물론 그럴 시간도 없었다. 현장에서 실제 잠수에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민간 잠수사’라는 이름으로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것을 보면 화가 났기 때문이다.

“영웅담처럼 인터뷰를 하더라고요. 말이 되나요? 하루에 수십구의 시신을 손으로 더듬어가며 찾아 하나하나 직접 껴안아서 올라와야 합니다. 세월호 복도가 매우 좁아요. 아픔이고 트라우마죠. 한번이라도 물에 들어가 봤다면 영웅담처럼 인터뷰하고 그걸 보도하지 못합니다.” 공씨와 함께 당시 현장에서 실종자를 수습했던 잠수사 김관홍씨의 말이다.

지난해 5월 초 범대본은 공씨에게 민간 잠수사를 50명까지 확충하라고 지시했다. 공씨는 “이 정도 인원이면 괜찮다고 했다”고 해경에 전했다. 하지만 범대본 고명석 대변인은 지난해 5월 4일 잠수사들의 피로누적을 이유로 ‘검증된’ 민간잠수사 13명을 추가로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세월호 참사 발생 51일 째인 6월 5일 전남 진도군 세월호 사고해역에 정박한 언딘 바지선에서 해군 해난구조대 심해잠수사가 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공씨는 “그날(지난해 5월 4일) 그쪽(범대본)에서는 VIP가 와야 하니까 잠수사를 50명을 맞추라고 했다. 그런데 일당이 정해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힘든 일하러 갑자기 올 사람이 어딨겠냐?”고 말했다. 이날은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현장을 두 번째로 방문한 날이다.

잠수사들은 먼저 임금 계약을 하고 고용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몇몇 언론에서 ‘자원봉사하러 온 잠수사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이 때문이다. 수습 작업이 한창 진행되는 중에 민간 잠수사들의 일당이 95만원으로 책정됐다. 국제 기준 1200달러(약 135만원)에 못미치는 수준이다.

잠수사 이광욱씨는 이날 투입됐다. 공씨는 “이씨가 정확히 언제 투입됐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잠수사 이씨가 사망한 뒤(지난해 5월 6일) 공씨는 해경 수사과에 출석해 참고인 조사를 한 차례 받았다. 이후 다시 연락이 와 조사를 받아야 된다고 해서 갔더니 공씨는 참고인이 아니라 ‘피의자’ 신분으로 변해있었다. 공씨는 “난 피의자가 처음엔 무슨 말인지도 몰랐다”고 했다.   

광주지검 목포지청은 지난해 8월 26일 공씨를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했다. 공소장에는 이씨가 공씨가 기술이사로 있는 회사 ‘유성수중개발’ 소속이라서 공씨에게 관리 책임이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공씨와 유성수중개발 회사 관계자에 따르면 이씨는 유성수중개발 소속이 아니다.

공씨는 “사고자를 비롯해 모든 잠수사들은 유성수중개발 소속 잠수사가 아니”라며 “사고자 이씨는 범대본에서 부른 잠수사”라고 했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충분한 휴식과 안정을 취하게 하지 않은 점, 수중작업에 대한 충분한 교육을 하지 않은 점, 전문잠수자격증 보유 여부를 확인하지 않은 점, 공씨가 현장을 이탈했다는 점” 등을 들어 업무상 과실치사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공씨는 “당시 현장 여건상 충분한 휴식은 불가능했다”며 “실종자 수습을 위해 무리하게 자원했고, 그나마 사고자는 다른 잠수사들에 비해 충분한 휴식을 취한 편”이라고 말했다. 공씨는 수중 작업에 대한 교육은 전날에도 진행했으며 전문잠수사자격증은 해경에서 불렀으니 해경에서 확인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대통령의 팽목항 방문을 준비하느라 바빴던 탓일까? 해경은 추가 투입 잠수사들의 자격증을 확인하지 않았다.

공씨는 “현장에서 전화도 잘 되지 않는데 잠수자격증을 어떻게 파악하느냐”며 “내게 그럴 권한이 있었다면 애초에 5월 4일 이후에 잠수사를 추가로 투입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5월 4일 고명석 대변인도 ‘검증된’ 민간 잠수사를 투입하겠다고 했으니 이씨의 잠수 실력은 범대본에서 확인했어야 할 문제다.  

현장에서 이탈했다는 검찰의 주장에 대해서 공씨는 “언딘 리베로호는 22m인데 절반은 해군이 사용하고 절반은 민간이 썼는데(11m) 민간은 두 개 조로 나눠 5.5m씩 썼다. 5.5m면 조금만 큰소리로 불러도 들릴 정도의 거리인데 어떻게 현장을 이탈했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10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한 달에 한두 번 공씨는 목포까지 오가며 재판을 받았다. 돈을 바란 것도, 언론 인터뷰에 나서 영웅이 되고 싶은 생각도 없었던 공씨는 292명의 실종자를 수습한 민간 잠수사들의 리더였다는 죄(?)로 잠수사 이씨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게 생겼다. 4·16연대, 이씨의 유족은 잠수사 이씨 죽음에 책임지지 않고 동료 잠수사 공씨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행위에 대해 비판하며 지난 5월 해경을 고발했다.

공씨는 지난 1월 쓰러지기도 했다. “병원에서는 정확한 병명은 잘 모르는 것 같더라”며 공씨는 지금도 매끼 약을 챙겨먹는다. “감정조절이 어려울 때 술을 함부로 먹으면 안 된다”며 술도 끊었고, “몇 달간 끊은 게 아까워 못 피겠다”며 담배도 피지 않는다. 공씨 주변 사람들은 “결국 열심히 헌신하다가 살인자로 몰린 스트레스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공씨와 민간잠수사 20여명은 지난해 7월 11일, 범대본으로부터 ‘당신들의 수색 방식이 잘못됐다’는 통보를 받고 현장에서 쫓겨났다. 이들이 철수한 뒤 수색이 종료되는 11월까지 추가로 수습한 시신은 2구에 불과했다. 헌신만 하고 쫓겨난 셈이고 남은 것은 공소장 뿐이었다.

공씨는 현재까지 해경과 검찰의 괴롭힘에 시달리고 있지만 정작 책임져야 관계자들은 영전했다. 지난해 당시 수색현장을 총괄했던 해경경비안전국장은 현재 국민안전처 해양경비안전국장으로, 해경의 지시사항을 민간잠수사에게 전달했던 해경경비과장은 현재 국민안전처 중앙해양특수구조단장으로 일하고 있다.

“지난 1년간 너무 괴로웠다. 정의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상식적인 판단만 해도 무죄가 나오더라도 검찰이 항소를 할까 걱정이다. 항소를 하면 2~3년 더 고생해야하는데, 항소 못하게 언론에서 이제라도 도와줬으면 좋겠다. 상을 줘도 모자랄 사람이다. 국민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공씨의 재판을 함께 지켜온 잠수사 김관홍씨의 말이다. 다음 재판은 오는 20일이다.

 

장슬기 기자 w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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