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국회법 개정안이 결국 새누리당에 의해 폐기됐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본회의에 참석하면서도 투표는 거부하는 희한한 방식으로 국회법 개정안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6일 열린 국회 본회의의 첫 번째 안건은 박근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국회법 개정안이었다. 새누리당은 국회법 개정안을 재의에 부치지 않는 방식으로 박 대통령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야당이 재의를 요구하고 정의화 국회의장이 본회의에 국회법 개정안 재의안을 상정하기로 하면서 새누리당은 본회의에 참여하되 표결은 하지 않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에 야당 의원들이 여당인 새누리당 의원들의 표결 참여를 독려하는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졌다. 이춘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반대토론에서 “재적의원 과반이 모였다. 전에 국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던 것처럼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전과 같이 의결하면 확정이다”며 “여야 의원 211명의 찬성으로 통과시킨 지 38일 만에 왜 이렇게 입장이 달라졌나”라고 말했다.

이 의원은 또한 “지금 국정혼란을 가져오는 것은 국회법 개정안이 아니라 시행령이다. 국민 304명이 수장됐는데 진상조사는 시작도 못하고 있다. 어렵게 통과된 세월호특별법을 뒤집어놓은 시행령 때문”이라며 “오늘 새누리당이 표결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를 대통령과 함께 책임져야할 것이다. 여러분이 앉아 있는 곳은 당정청 협의장이 아니라 본회의장이다”라고 강조했다.

   
▲ 박근혜 대통령의 거부권행사로 국회법 개정안 재의를 앞둔 5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의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 빈 자리. 직원들이 시설 점검을 위해 켜놓은 모니터에는 '국회법 일부 개정법률안 재의의 건'이 안건으로 올라와 있다. ⓒ연합뉴스
 

진선미 새정치연합 의원 역시 반대토론에서 “이 자리에 있는 김무성 대표, 유승민 원내대표 등 지도부를 포함한 95명의 새누리당 의원이 찬성표를 던졌다. 불과 38일 전 일이다”라며 “대통령이 법에 보장된 거부권을 행사했다면 국회는 국민의 대표기관으로서 헌법이 보장한 국회의원 권한을 책임있게 행사해야 한다. 이것이 대통령에게는 배신의 정치가 될 수 있어도 국민에겐 소신의 정치”라고 지적했다.

진 의원은 “국회법 개정안이 부결될 경우 시행령이 법률을 넘어서는 입법의 비정상화가 만연할 우려가 크다”며 “국회법 개정안이 국정마비를 가져온다는 주장은 대통령이 법률과 관계없이 행정입법으로 통치하겠다는 의도이자 헌법체계 부인하는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침묵으로 일관하며 언제 퇴장할지 타이밍을 재는 것처럼 보였다. 정부를 대표해 출석한 황교안 국무총리에 대한 질문도 야당 의원 세 명만이 신청했다. 찬반토론 역시 처음에는 네 명의 야당 의원만 신청했다가 나중에 이정현 새누리당 의원이 유일하게 반대토론을 자청했다.

이정현 의원은 “우리 국회가 행정부의 입만 바라봐야만 하나. 우리 헌법은 국회로 하여금 행정부를 통제하는 장치를 마련했다”며 국정감사, 국정조사, 대정부질문, 예결위질의 및 상임위질의 등을 예로 들었다.

이 의원의 발언에 야당 의원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야당 의원들은 “뭘 알고나 이야기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그럼 표결에 참여해서 반대하세요” 등의 비난이 쏟아졌고 이 의원은 “내가 비난이라도 했나. 이 정도도 이야기도 수용을 못하나”라고 반발했다. 

찬반토론이 끝나고 표결이 시작됐지만 감표 위원이 선정되는 과정부터 논란이 일었다. 정의화 국회의장이 투표 감표 위원으로 강동원‧장하나‧이개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등 야당 의원들만 지목한 것. 이에 이종걸 새정치연합 원내대표가 직접 단상으로 나가 “왜 야당만 감표위원이냐”고 항의했다. 야당 위원만 감표위원으로 설정한 것이 투표를 거부하려는 여당의 꼼수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이에 정의화 국회의장이 새누리당 권은희‧황인자 의원, 새정치민주연합 강동원‧장하나 의원 등 네 명을 감표위원으로 다시 선정했다.

막상 표결이 시작되자 새누리당 의원들은 표결에 참석하지 않았다. 몇몇 의원들은 본회의장에서 퇴장했고, 몇몇 의원들은 자리를 지켰지만 투표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정의화 의장은 투표가 시작된 지 15분이 지난 3시 57분 의원들을 향해 “투표가 시작된 지 15분이 지났지만 77명 밖에 하지 않았다. 가능한 빨리 투표를 해달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30분이 지난 4시 10분경까지도 투표 인원은 늘어나지 않았다. 이에 야당 의원들은 “여당이 투표 안 하는 법이 어딨냐” “빨리 투표합시다” “반대하면 반대표 던지면 되잖아요” 여당 의원들을 향해 투표를 독려했다. 몇몇 야당 의원들은 “김성태 의원님 투표하세요” “이노근 선배님 투표하실거에요, 안 하실 거에요” 등 여당 의원 이름을 직접 거론해가며 투표를 촉구했다.

급기야 이종걸 원내대표가 여당 의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 투표를 독려하기에 이르렀다. 이 원내대표는 “반대해도 좋으니 투표해달라. 어떻게 이렇게 집단적으로 일사분란하게 의사를 동원할 수 있나”라며 “집단파업 아닌가. 국회의원이 돼서 국민 앞에 불법파업하면 국회 꼴이 어떻게 되겠나. 여기가 무슨 북한이냐”라고 강력히 항의했다.

야당 의원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투표 종료를 선언하려는 정 의장에게 시간 연장을 요구했다. 그러나 여당 의원들은 움직이지 않았고 정의화 의장이 투표를 시작한지 55분이 경과한 4시 40분 경 투표 종료를 선언하며 국회법 개정안은 ‘투표 불성립’으로 폐기됐다.

   
▲ 정의화 국회의장이 6일 열린 본회의에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투표 불성립'을 선언하자 이종걸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가 결과에 항의하고 있다. 사진=CBS 노컷뉴스
 

 

정 의장은 “헌법 53조 4항에 따라 재의가 요구된 법률안을 처리하려면 150인 이상의 의원이 투표해야한다. 55분의 시간을 드렸지만 (투표 수가) 128인에 그쳐 재적 과반수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며 “상식적으로 판단하건대 더 이상 기다려도 재적 과반수를 충족하기 어려울 것 같다. 재적에 필요한 과반수 출석에 미달하기 때문에 이 안건 투표는 성립되지 않았음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130명, 정의당 5명에 달하는 것을 고려할 때(새누리당 의원은 160명) 몇몇 야당 의원들도 여당의 투표 불참에 항의해 투표에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정두언 새누리당 의원은 투표에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두언 의원은 본회의 전 기자들에게 보낸 입장을 통해 “헌법에 대통령의 재의 요구가 있을 때 국회는 재의에 붙이라고 규정하고 있어 표결이 성립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헌법에 반하는 행위다. 따라서 저는 표결에 임하여 이번 국회법 개정안은 위헌이라는 평소의 소신대로 반대표를 던질 것”이라고 밝혔다. 

폐기 선언에 야당 의원들의 항의가 이어졌고, 정의화 의장은 야당의 요구대로 30분 간 정회를 선언했다. 새정치연합은 40분 간의 의원총회를 통해 향후 대응 및 법안 처리 여부 등을 논의할 계획이다. 

한편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폐기된 직후 입장 발표를 통해 “사실상 폐기된 것에 대해 과정이야 어쨌든 국민 여러분께 송구하다는 말씀 드린다. 앞으로 입법활동에 신중을 기하고 국민과 민생을 위해 매진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용 관련해서 여당은 강제성 없다고 해석했지만 야당이 강제성 있다고 계속 주장함으로써 갈등과 혼란이 지속돼 왔다”며 책임을 야당에게 전가하는 태도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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