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원의 영화에는 죽음의 흔적이 강렬하게 녹아있다. 단지 죽음의 흔적이 아니라 죽음을 직접적으로 다루면서 삶의 고통과 죽음의 유혹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럼에도 죽음의 어둠을 넘어 생의 의지를 그리고자 힘겹게 싸우기도 한다. <명왕성>에서 보여주었던 그 어두운 비밀조직도 결국 죽음으로 파멸하고 마는데, 그 파멸을 통해 우리는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에 탐구하게 된다. 이 역설.

오해하면 안 된다. 신수원이 죽음만 그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생명을 그린다. 이상하게도 신작 <마돈나>를 보고 불현듯 그의 단편 <순환선>이 생각났다. <순환선>은 직장을 잃은 남편이 만삭의 아내에게는 말하지 않고 직장에 나가는 척 하면서 순환선을 타고 하루를 보내는 내용이다. 아내에게 아이가 좀 늦게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한 말을 아내는 남편이 아이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상황. 지하철에서 헤매던 남편에게 아내가 병원에 있다는 연락이 온다. 나오지 않는 아이 때문에 아이도, 아내도 죽은 것인가? 실제 영화에는 고교생이 지하 선로에서 가위바위보 게임을 하면서 질 때마다 선로에 다가가는 아슬아슬한 장면이 있고, 남편도 직장 부하와 그 게임을 벌이는 환영으로 본다.  

마지막 장면은 어두운 터널을 뚫고 나오는 기차의 모습과 함께 들리는 아이의 왕성한 울음소리이다. 마치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오는 아이처럼 지하철도 어둠에서 세상으로 나오고 남편도 나온다. 그리고 카메라는 지하철을 타고 가는 사람들을 지하철 안에서 보여주다가 이윽고 밖으로 나가 지하철 안의 사람들을 비춘다. 힘들고 어렵더라도 생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매일 순환하는 삶처럼 단순하고 힘겹지만 포기하지 않는 이들의 모습을, 경쾌한 음악과 함께 담아낸다.

   
▲ 영화 ‘마돈나’ 포스터터
 

<마돈나>의 엔딩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그 고통을 넘어 결국 아이는 태어난다. 죽어야 하지만 의미 없이 생명을 연장하고 있던, 그것도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아들의 돈 욕심 때문에 억지로 연명해야 하는 목숨을 거두고, (이와 정반대로) 어머니와 함께 죽을 것 같았던 아이는 태어난다. 아이의 출생을 통해 이 힘들고 괴로운 세상이지만, 세상은 그래도 살아가야 하고 또 살만한 것이라고 감독은 말하는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우린 이런 세상에서도 살아야 하는가?

<마돈나>는 신수원의 영화 가운데 가장 비참하고 복잡하고 구조적으로도 탄탄하게 짜여있다. 영화는 단지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좀 거창하게 이야기하면, 영화가 어떻게 인간과 사회의 윤리 문제를 다룰 수 있는지, 사회적 폭력을 소재로 처절하게 직시한다. 마돈나라는 판타지의 대상이면서 남성의 성적 욕망의 대상인 여 주인공, 그러나 전혀 마돈나와는 다른 외모의 여성이 겪는 비참한 이야기. 그녀의 삶은 소외의 연속이고 사회적 차별의 연속이다.

   
▲ 영화 ‘마돈나’ 스틸컷
 

할머니와 자란 환경, 교육 제도에서도 받는 차별, 직장에서도 여전한 차별과 소외, 무엇보다 괴로운, 남성 중심 사회의 구조적 폭력, 여성에게도 소외 받고 착취 당하는 현실. 어느 것 하나 마돈나와 같은 삶을 살지 못한다. 그런 삶에서 그녀는 예기치 못한 임신을 하고 도망 다니듯 살아가다가 의식 불명의 중태에 빠진다. 그녀의 삶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녀를 노리는 또 다른 험악한 세상이 존재한다. 정말 그녀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는 것인가? 영화 속 인물의 말처럼, 마돈나는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더 괴로울까?

신수원은 징글맞을 정도로 처절하게 마돈나의 고통스런 상황을 직시하면서 우리 사회를 해부한다. 곳곳에 녹아있는 사회적 차별과 육체적 정신적 폭력을 보여주며 영화가 판타지가 아니라 우리의 모습을 그릴 수 있는 매체이면서 윤리적으로 우리에게 삶과 죽음, 폭력에 대한 태도 등에 대해 물을 수 있는 좋은 매체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래서 영화를 본 관객들은 대답해야 한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대처했을 것인지.

신수원은 지독히도 현실적이고 어두운 이야기를 그리고 있으면서도 영화 곳곳에 판타지적 요소를 배치시켜 놓았다. 그러고 보니 신수원은 데뷔작 <레인보우>에서부터 <순환선>, <명왕성>에 이르기까지 판타지적 요소를 곳곳에 배치해 놓았다. 신기하게도 그녀가 배치한 판타지는 현실의 어려움을 벗어나게 만드는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의 고통으로 자각하게 만드는, 즉 현실의 고통 속으로 오히려 들어오도록 만드는 판타지였다.

   
▲ 영화 ‘마돈나’ 스틸컷
 

<레인보우> <순환선> <명왕성> <마돈나> 모두 지독히도 리얼리즘의 스타일로 촬영되었고 실제로 그런 내용이지만, 영화 안에는 다양한 판타지와 꿈이 존재하는 기묘한 영화가 되었다. 리얼리즘과 환영주의의 묘한 동거. 신수원은 예술적 욕망 때문에 내러티브를 비틀거나 편집의 순서를 바꾸는 식의 얕은 수를 쓰지 않는다. 정직할 정도로 이야기는 하나를 향해 흘러가지만, 그 안에 산재해 있는 판타지와 꿈이 리얼리즘과 기묘한 관계 속에서 배치되어 있어 볼수록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이런 구조를 어떻게 볼 것인가? 굳이 선택을 하자면, 나는 영화를 보는 순간조차 숨이 막힐 정도로 고통스럽게 현실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감독의 자세 또는 태도가 좋았다. 피하지 않고 정면승부를 벌이는 그 자세. 영화를 보고나면 뭔가 강하게 한 대 맞은 것 같은 묵직함을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정도로 강한 느낌의 영화는 분명 흔치 않다.   

사족을 달자면, 신수원은 남성의 세상은 거칠고 폭력적이지만 여성의 세상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일부 여성은 남성과 연대해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지만, 그 반대편에는 언제나 남성의 폭력을 거부하거나 연대하지 않으려는 여성이 존재한다. 그런 여성이 폭력에 노출되어 고통 받거나 죽을 수도 있지만, 바로 그 여성들 때문에 희망이 있다고 말한다. 생명의 잉태와 탄생을 희망으로 보는 태도 역시 여성의 중요성과 다르지 않을 것인데, 이것을 페미니즘으로 명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런 영화적 재현의 매혹을 거부할 힘이 나에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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