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임기 최고의 순간을 보내고 있다. 자신이 역점을 둔 법안이 대법원의 판결을 통해 살아남았고, 임기를 1년 반 정도 남겨둔 시점에서 50퍼센트라는 환상적인 지지율을 기록하며 온갖 언론들의 찬사를 받고 있다. 그런 오바마에게 임기 최악의 순간은 언제였을까? 모르긴 몰라도 2013년 10월 1일을 꼽을 것이다. 지금은 웃으며 회고할 수 있는 옛날 일이 되었겠지만, 그 날 오바마와 오바마 행정부는 끔찍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아니, 최악의 몇 주가 시작되는 첫 날이었다고 하는 게 맞겠다.

그 날로 돌아가보자.

2013년 연초부터 오바마와 민주당은 하원의 다수당을 차지하고 있는 공화당과 세출삭감 문제를 두고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3월에 이미 정부폐쇄라는 극단적인 사태를 아슬아슬하게 피했으나, 가을이 되자 백악관과 공화당의 대립은 다시 고조되었다. 핵심은 오바마가 대선후보시절 부터 외쳐온 의료보험 개혁안이었다. 미국은 선진국들 중에서 최악의 의료보험제도를 갖고 있다는 오명을 벗어나기 위해 수 십년 간 노력해왔으나 번번히 보수파의 반발에 밀려 실패했다. 어떤 정권도 해내지 못한 그 일을 해내기 위해 칼을 뽑은 오바마에게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하원은 공화당에게 빼앗겼고, 그런 공화당은 내부적으로 세수증가와 복지정책에 극도로 반대하는 티파티(Tea Party)세력에 휘둘리고 있어서 협상의 여지도 없었다.

공화당 의원들은 오바마에게 의료보험개혁을 포기하지 않으면 연방정부를 폐쇄할 수 밖에 없다고 선을 그었지만, 이번에 못하면 앞으로 수 십년 간 의료보험 개혁의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을 안 오바마는 정치적인 독배를 선택했다. 그렇게해서 클린턴 행정부 이후로 한 번도 없었던 연방정부폐쇄가 결정되었다. 앞서 말한 10월 1일은 정부 폐쇄의 발효일이었다.

오바마가 독배를 선택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의료보험개혁안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비록 공화당의 힘에 밀려 정신이 많이 훼손되고 빈약한 법안이 되었지만, 그것만 발효되면 미국 국민의 대다수는 큰 혜택을 보게되고, 비록 정부를 멈추게 만든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쓰게 되어도 궁극적으로는 불사조처럼 부활할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 개혁안에 따라 국민들이 의료보험을 골라서 살 수 있는 편리한 웹사이트(HealthCare.gov)도 만들었다. 공교롭게도 10월 1일은 그 웹사이트의 개통일이기도 했다. 모든 게 계획대로 되면, 그래서 웹사이트에 첫 날부터 사람들이 몰려들어오고 가입자가 늘면 정부폐쇄를 선택한 정치적 부담도 줄어들고, 최후의 승자는 오바마가 될 것이었다.

   
▲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 ⓒ pixabay
 

그렇게 운명의 10월 1일이 되자 예정대로 정부는 문을 닫았고, 웹사이트는 문을 열었다. 결과는? 대재난이었다. 잔뜩 기대를 가지고 웹사이트에 접속한 사람들은 자꾸 뜨는 에러 메시지에 보험가입을 못하고 분통을 터뜨려야 했다. 그날 가입을 시도했던 사람들 중 1퍼센트만이 성공을 했을만큼 최악의 상황이었다. 여론과 언론은 일제히 정부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몇 년을 준비했다더니 겨우 이따위 웹사이트를 만들었느냐” “미국의 전자정부가 고작 이 수준이었느냐” "정부폐쇄의 댓가가 결국 이거였느냐”는 질책이 쏟아졌다. 대통령 후보시절부터 블랙베리를 들고 다니고, 실리콘밸리 기업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테크놀로지에 능숙한(tech-savvy)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준 오바마였기 때문에 충격은 더욱 컸다.

게다가 상황을 파악해보니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하루 이틀 안에 고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최소한 한 달 이상이 걸릴 것이고, 그렇게 해서 완벽하게 고쳐진다고 장담하기도 힘들다는 내부보고가 나왔다. 사람들이 12월 23일까지 등록을 하지 않으면 이듬 해에는 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할 상황이었다. 정권의 모든 것을 걸고 추진한 일이 그렇게 웹사이트 하나로 끝장나게 생긴 것이다.

사람은 위기를 만났을 때 비로소 본색을 드러낸다는 말이 있다. 그 말 그대로 오바마의 진가는 위기의 순간에 발휘되기 시작했다. 문제의 발단은 복잡한 정부의 입찰절차 때문에 작고 능력있는 실리콘밸리의 회사가 아닌, 정부 사업으로 먹고사는 실력없는 큰 회사들에게 일이 돌아가는 구조였다. 하지만 오바마는 당장 책임자를 파면하라는 압력에 굴하지 않고 캐슬린 시벨리어스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끝까지 남아서 문제를 해결하라고 지시했다. 충분히 능력이 있다고 믿고 맡긴 사람이라는 것이 하나의 이유이고, 이제껏 일을 추진했던 사람을 해고 하면 문제의 해결은 더 늦어진다는 것이 또 하나의 이유였다.

그리고 자신은 국민 앞에서 직접 비난을 받았다. 백악관에서 행한 기자회견에서 “이 사태는 좋게 포장할 수 없다”는 말로 시작한 오바마는 “웹사이트는 너무 느리고, 하고 싶어도 등록이 되지 않는다”고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 그러는 동안 실무진은 웹사이트를 담당하는 회사를 교체해가며 밤낮없이 작업을 했고, 한 달여 만에 웹사이트는 천천히 제 기능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백악관은 또한 공화당과의 정치적인 타협을 통해 연방정부의 업무를 16일 만에 재개했다.

그 과정에서 쇼도, 매직도 없었다. 급작스런 파면도 없었고, 사나운 여론을 피해서 숨지도 않았다. “모든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다(The buck stops here)”는 트루먼 대통령의 유명한 경구대로 쏟아지는 비난에 한 번도 부하의 핑계를 대지 않았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각종 SNS와 미디어에 뛰어들어서 사과했고, 분노한 사람들에게서 심한 소리도 다 들었고, 무엇보다도 그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계획인지를 진지하게 설명했다. 누구에게 설명을 시킨 것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물음에 답했다. 그만큼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대안도 가지고 있었다.

그게 오바마의 본색이었고, 진가였다. 한국에서는 오바마가 “쇼맨쉽”이 있다는 평가가 있는 듯 하지만, 그건 정치 외적인 부분일 뿐이다. 오히려 업무와 관련해서 오바마는  지나칠 정도로 모든 문제를 정석대로 해결하려는 성격을 갖고 있다. 절대로 깜짝쇼를 하지 않고 지루하리만치 원칙을 따른다고 해서 “드라마 없는 오바마(No-drama Obama)”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렇게 원칙만 고수하다가 중요한 법안을 하나도 통과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비난 여론이 쏟아졌던 것을 필자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차라리 힐러리가 당선되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지금은? 지난 주에 미국의 대법원은 오바마의 의료보험 개혁을 뒤집으려는 공화당의 시도에 쐐기를 박았고, 각종 진보적인 법안들은 이미 통과되었으며, 레임덕(lame duck)이 되어야 할 임기 말 대통령의 지지도는 오히려 치솟고 있다. 진보매체들은 “시어도어 루즈벨트 이후 100년 만에 나온 최고의 진보 대통령”이라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 이 정도면 절뚝거리는 오리가 아니라 비상하는 독수리(soaring eagle)다.

2년 전을 돌이켜 보면, 그 때의 힘없던 오바마를 지금의 독수리로 만들어준 것은 위기를 대하는 그의 솔직하고 진지한 자세였다. 최악의 하루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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