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리영희 선생님께서 생전에 백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날도 무더운 여름이고 지금보다 몸무게도 몇 근 적게 나가고 해서 젊음의 만용으로 깡총 짧은 핫팬츠를 입고 병문안을 갔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녹즙 배달을 하고 있었는데, 몸에 좋은 샘플을 가져가서 빨대에 꽂아 드리면 20ml짜리를 몇 개씩 잡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그날은 내 바지를 보자마자 선생님의 흰 눈썹이 버럭 하고 찌푸려졌다. 원래도 말씀이 많은 분은 아니었다. 그래도 문병을 갈 때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곤 했다. 반야바라밀이라던가 문화대혁명의 진정한 의미라던가 NLL경계선의 정확한 정의 같은 거였다. 하지만 그날 선생님의 말씀은 달랐다.

- 여기는 생명을 다루는 곳인데 그 옷차림이 뭐야!

- 아니 그러니까 다들 힘 좀 내시라고…

- 여기가 굳이 병원이기 때문이 아니야! 나는 학교에 있을 때도 여학생들이 그런 차림을 하는 걸 아주 싫어했어!

- 다시는 안 입을게요. 절대 안 입을게요. 제발 화 좀 내지 마세요!! 뇌졸중 걸리신 분이 왜 이러세요!! 다 제가 잘못했어요!!

한바탕 역정을 듣고 나중에 혼난 걸 갖고 툴툴댔더니 마침 그 자리에 계시던 문부식 선생님이 깔깔 웃으며 ‘그건 나이든 내게 왜 이러냐, 하시는 거지’ 하고 농으로 달래 주셨지만 나는 그 이후 진지하게 그 숏팬츠를 봉인해 버렸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상의 오빠’가 그리도 싫다는데 굳이 핫팬츠를 입을 게 뭐람. 선생님이 가신 지 혼자 3년상을 치르고 오 년이 지나서야 초여름답지 않게 더운 날씨에 오랜만에 짧은 바지를 꺼내 입었다. 하늘에서 ‘넌 옷차림이 그게 뭐야!’ 하는 목소리가 들려 올까봐 잠시 찔끔했지만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아 안심하고 매일 개를 데리고 천변을 산책할 때 자주 입는다. 그런데 그 때의 기억인지 아침 일찍 운동하는 어르신들이 뭐라고 할까봐 쫄곤 하는데, 아직 뭐라고 야단을 들은 적은 없다. 개를 데리고 버스터미널까지 가서 터미널 화장실에서 물을 먹이고 오는 코스인데 터미널 관리인 아저씨가 다다다다 달려오기에 개를 왜 데리고 오냐, 혹은 넌 입고 있는 게 왜 그 꼬라지냐, 하는 소리를 들을까봐 쫄았더니 단지 개에게 장난을 치기 위해서였다. 그 경비 아저씨만 그런 것도 아니고 다른 아저씨들도 다 장난꾸러기였다. 할아버지들은 나이도 지긋한 양반들이 좀 띨띨하게 생긴 우리 개를 보면 하나같이 장난을 걸려고 다다다다 달려왔다. 그러고 보니 서울의 할아버지들과 시골 동네 아저씨들이 참 다른 게, 서울의 경비 아저씨들은 다들 얼굴이 심통 나 있는 경우가 많다.

   
▲ 김현진 에세이스트
 

작은 가게나 회사라도 사장님, 부장님 소리 듣던 분이 많아 그렇지 싶은데, 시골의 경비 아저씨들은 그런 ‘왕년의 내가 뭘 하던 사람인데’ 하는 느낌이 없는 게 좋다. 그저 개를 놀려댈 뿐이다. 그런 분들이 내 개를 놀려대면 기분나쁘지 않다. 촌동네의 매력이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이 너무 출세 맛, 돈 맛 본 경험 있는 것도 아주 좋지만은 않겠다 싶다. 녹즙 배달 다닐 때 경비 아저씨들은 ‘반장님’이라고 부르라며 때마다 무슨 놈의 ‘인사’(녹즙 세트 좀 가져오라는 얘기다)를 그렇게나 요구하던지! 알바하던 호프집 주방 이모는 누가 자기를 이모라 부르면 불같이 화내며 원래 나 내 가게 하던 사람이야, 하는 소리를 손님에게 몇 차례나 해대며(고종석 선생께서도 한번 오셔서 정중하게 주방장님, 이라고 불렀다가 내가 대신 달달 볶였다) 발을 동동 구르는 폼이 온몸의 털이 서도록 무서웠다. 여기는 그런 사람들도 없고, 사람들이 마구 무단횡단도 하니 핫팬츠 따위는 실컷 입을 수 있다. 앞으로 몇 킬로는 빼야 민폐가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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