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누군가의 후견인으로 활동해야 생존한다는 식의 후진적 구조가 합의된 사회다. 여당추천 이사나 야당추천 이사나 극명하게 반대하거나 찬성하는 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보여줄 뿐이다.” (정준희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교수)

“MBC를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중립지대로 출발한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가 오히려 정파적 이해를 막무가내로 관철시키는 통로로 악용되고 있다. 방문진의 존재 이유를 근본부터 다시 따져봐야 한다.” (김혜성 언론노조 MBC본부 홍보국장)

오는 8월 KBS·MBC·EBS 등 공영방송 이사의 3년 임기가 끝난다. 당장 7월부터 차기 이사 선임 절차가 진행된다. KBS는 7대4, MBC·EBS는 6대3 비율로 여야가 이사를 추천한다. 여당에게 무조건 유리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시절 공영방송 지배구조개선 논의를 약속했으나 흐지부지 끝났다. 전국언론노조 등 언론·시민사회단체 19곳은 지난 6월 24일 공영언론이사추천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이명박·박근혜정부에서 무너진 공영방송의 공정성과 신뢰도를 바로잡기 위해 공영방송을 감시·감독하는 이사 개개인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서다. 

지난 6월 30일 전국언론노동조합·공영언론이사추천위원회·방송기자연합회 등이 공동주최한 ‘공영방송 이사회 활동 평가와 과제’ 토론회에서는 지난 3년간 공영방송 이사들의 무능과 무책임함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김혜성 언론노조 MBC본부 홍보국장은 “MBC사안을 처리하는 방문진을 바라볼 때마다 MBC구성원들은 매번 답답함과 한계를 느꼈다”고 밝혔다. 김혜성 국장은 “MBC가 공정성·신뢰도에서 끝없이 추락하고 있는데 이에 책임져야 할 방문진 이사들은 MBC 관리감독을 위한 아무런 권한을 행사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 6월30일 프레스센터 19층 국화홀에서 진행된 '공영방송 이사회 활동 평가와 과제' 토론회. ⓒ언론노조
 

MBC본부에 따르면 170일 파업 이후인 2012년 9월 27일 부당인사와 징계가 난무하던 시점 야당이사진은 김재철 사장 해임안을 꺼냈으나 가결도 부결도 되지 않았다. 그해 10월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과 이진숙 MBC기획홍보본부장의 비밀 회동 논란 이후 해임안이 제출됐지만 부결됐다. 당시 여당 이사들이 김재철사장과 MBC노조 집행부의 동반 퇴진안을 주도했지만 정치권 외풍에 무력화됐다는 게 MBC본부 측 설명이다. 김혜성 MBC본부 홍보국장은 “MBC의 대주주는 방문진이지만 정작 방문진 이사들은 거짓 주인 행세만 한다.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홍정배 언론노조 EBS지부장은 “EBS 이춘호 이사장은 친박성향이 강한 시민단체 대표를 맡는가 하면 KT사외이사를 겸임하기도 했다. 이종각 이사는 주먹다툼을 벌이기도 했다”며 이사진의 자질을 문제 삼은 뒤 “EBS는 정부교육정책에 대한 비판기능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국가사업을 대행하는 산하기관처럼 움직이는 경우가 갈수록 늘고 있다”며 “피해는 고스란히 시청자에 가고 있다”고 우려했다. EBS이사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 결과 EBS 사내분위기가 관료화되고 3년 임기의 사장 비위만 맞추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 때문에 공영언론이사추천위원회를 통한 공영방송 이사 선임 여론화작업에 공영방송구성원들이 거는 기대가 적지 않다. 남철우 언론노조 KBS본부 정책실장은 “KBS이사회는 2008년 정연주 사장 해임과 2014년 길환영 사장의 해임을 통해 실질적으로 KBS사장을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을 보여줬다. 당장 새 이사회가 구성되면 올해 11월 임기가 끝나는 조대현 사장의 후임을 뽑게 될 것”이라고 지적한 뒤 “이사회의 위상과 역할이 절대적인만큼 아래로부터의 민의가 반영된 이사추천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철우 정책실장은 “이번에 발족한 공영언론이사추천위원회는 지배구조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의미 있는 실천”이라고 덧붙였다.

   
▲ 남철우 언론노조 KBS본부 정책실장(가운데)이 토론회 중 발언하고 있다. ⓒ언론노조
 

공영방송 새 이사진을 잘 뽑는 것만큼 중요한 논의는 지배구조 개선이다. 영국BBC전공자로서 공영방송지배구조를 연구해 온 정준희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교수는 “정치의 입김이 차단되어있는 BBC구조가 최선이겠지만 대단히 예외적인 경우”라고 전한 뒤 “공영방송사가 정치적 입김을 단절할 수 없다면 차선책으로서 정치입김이 여야의 세력에 맞게 비례적으로 반영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정준희 교수는 이어 “다수세력이 늘 이기는 폐해를 막기 위해 주요한 사안에서는 특별다수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특별다수제는 박근혜정부에서 논의된 공영방송지배구조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였지만 새누리당의 반발로 사실상 무산됐다.  

이와 관련 한국방송학회 소속 122명 언론 학자는 최근 설문조사에서 한국의 공영방송에 대해 “공정하지 않다”(77.9%)고 답변했으며, 방송의 공정성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소로 “정치권력”(69.7%)을 꼽았다. 현행 지배구조가 개선돼야 한다는 의견에는 74.6%가 “매우 동의한다”, 17.2%가 “약간 동의한다”고 답했다. 언론학자들의 심각한 문제인식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반면 한국언론정보학회가 1100명의 전국 성인남녀를 대상으로 6월 26일부터 29일까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4%는 공영방송 이사를 정부산하 방송통신위원회에서 추천·임명하는 것에 대해 ‘모른다’고 답했다. 현재 KBS와 MBC의 프로그램에 대해선 “공정하다”는 답이 18.3%, “공정하지 않다”는 답이 39%로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났다. 공영방송사장 또는 이사 추천 방식 개선에 대해선 “동의한다”는 응답이 53.6%, “동의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9.7%에 불과했다. 이번 조사의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최대허용오차 ±2.95%p다.  

김언경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은 “국민 다수가 공영방송의 지배구조를 잘 모른다. 공영방송 이사들은 후견인 입맛에 맞게 행동하며 정족수만 채운다. 수준 이하의 이사들을 비판하면서 이사회 구조의 구조적 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알려 나가야한다”고 밝혔다. 김언경 사무처장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이사회 회의내용을 매주 보도하듯 공영방송 이사회 회의도 면밀히 보도하는 식의 감시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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