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지난 28일 성소수자들의 문화행사인 ‘퀴어문화축제’가 열렸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퀴어문화축제보다는 퀴어 문화축제에 참가한 이들의 옷차림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국민일보는 28일 퀴어문화축제 현장 스케치 기사에서 “반나체 참가자들이 대거 등장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일각에서 “퀴어문화축제는 좋지만 꼭 야한 옷차림을 해야 하나”는 의견도 분명 있습니다.

미디어오늘은 퀴어문화축제 참가자인 ‘스팸’(활동명)씨가 자신의 SNS에 올린 글을 전재합니다. 스팸씨는 국민일보에 ‘검은 색 망사 옷을 입은 여성’이라 보도된 인물입니다. 그는 왜 망사옷을 입고 퀴어문화축제에 참가했을까요.

나는 지난 28일 시청 서울광장에서 열린 2015 퀴어문화축제에 전신 망사스타킹을 신고 갔다. 망사스타킹을 신고 집 밖을 나서는 건 몇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실 스무 살 즈음엔 운동화에 무릎길이의 멜빵 치마를 입고 망사스타킹을 곧잘 신고 다녔다. 망사에 유독 애착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스팽글 혹은 비즈가 달려있어 반짝이거나, 리본이나 끈이 달랑거리거나, 촉감이 부드러운 레이스가 화려하거나, 무릎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청(Jeans)이거나 혹은 알 수 없는 패턴이 프린팅 되어 있거나 그 밖에 세상에 존재하는, 내가 아직 못 입어본 옷이라면 어떤 것이든 한 번쯤 입어보고 싶었을 뿐이다. 교복을 벗어 던지고 나서는 내게 뭐가 잘 어울리는지 몰랐고 나는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최대한 다양한 것을 경험해본 후에 결정하고 싶었다. 망사스타킹은 그 중 하나의 시도였을 뿐이다.

난 늘 옷 덕분에 주변 친구들과 어른들로부터 특이하다는 말, 옷을 잘 입는다는 말, 옷을 못 입는다는 말, 이상하다는 말을 골고루 들었다. 내가 강남 한복판에 빨간 민소매 한복을 입고 나타났을 때, 한 친구는 예쁘다고 해주었지만 같은 옷을 보고서도 다른 친구는 촌스럽다고 인상을 찌푸렸었다. 이처럼 사람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어떤 말은 때때로 날 기분 좋게 해주고 자신감을 느끼게 하였지만 어떤 말은 상처와 스트레스를 주었다. 어떤 사람들의 폭력적인 언어들은 내 성격까지 바꾸어 놓았다. 

   
▲ 28일 서울 시청광장에서 열린 퀴어문화축제 풍경. 사진=이하늬 기자
 

하지만 특이하게 옷을 입은 덕분에 겪을 수 있는 최악은 뭐니 뭐니 해도 바로 신체적 위협이었다. 스무 살 초반 잠시 속해있던 어느 집단에서는 내가 입는 옷이 ‘남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놀림의 대상이 되어 심한 괴롭힘을 당했다. 구성원들과의 싸움이 잦자 그 집단의 장(長)은 나를 불러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물었고 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내 얘기를 다 들은 그 사람은 “네가 망사스타킹 같은 걸 입고 다니니 그런 일이 생기는 거다. 옷을 똑바로 입어라.”라고 말했다. 

순간 나는 너무나도 큰 상처와 충격을 받았다. 다양성, 남과 다름, 차이, 개성이 가장 존중받을 수 있는 예술이라는 분야에서 대체 왜 획일성, 같음, 동질성만을 강조하느냐고 그에게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그는 예상치 못한 내 태도에 당황했는지 잠시 멍을 때리다가 나를 달래주었다. 사과는 받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그곳을 나와 버렸다. 이것은 내 인생에서 옷 때문에 겪게 된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 일 이후 난 망사스타킹을 신지 않았다. 머리로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게 없더라도, 그 스타킹을 신고 건물에 들어섰을 때 내 다리를 봤던 동료들의 따가운 시선은 날 움츠러들게 했다. 일부러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당당한 태도로 그 시선을 무시하려고 했지만 뜨거워졌던 내 얼굴은 쉬이 식지 않았다. 그 기억 때문에 다시는 망사 스타킹을 신을 수가 없었다. 그걸 입는 게 잘못이라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걸 입는 기쁨보다 입었을 때 겪어야 하는 스트레스가 상대적으로 너무 컸기 때문에 그냥 포기했던 것이다. 

난 매우 슬펐다. 단지 내가 좋아하는 망사스타킹을 신을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가장 자유롭고 생각이 깨어있고 또 타인의 다름을 인정해 줄 것 같은 ‘예술’이란 분야에 속해 있는 사람들조차 겨우 망사스타킹 하나에 난리를 친다고 생각하니, 앞으로 대한민국 사회에서 살아갈 내 앞날이 캄캄하다 느껴졌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비교적 평범한’ 옷들만 입으며 아무에게도 불편함을 초래하지 않는 ‘비교적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 물론 하루아침에 평범한 사람이 되었던 건 아니다. 또 지금 어떤 이들의 눈에 난 여전히 특이하며 늘 평범하기만 한 건 아닐 테지만 어쨌든 20대 초반의 경험은 나를 많이 바꾸어 놓았다. 그 경험에 대해 딱 누구를 꼬집어 탓할 수가 없다. 

그냥 누군가가, 이 사회가 혹은 어떤 이데올로기라고 불리는 것이 나에게 이것은 좋은 것이고 저것은 나쁜 것, 이것은 정상이고 저것은 비정상이라고 주입시켰다. 한 가지 기준으로만 세상을 보는 습관을 지니게 했다. 그럴 때마다 다시 진짜 내가 원하는 것, 내가 편안한 것은 무엇인가,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찾고 생각하는 데에 매우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비단 옷뿐만이 아니다. ‘내가 어떤 성별의 사람을 좋아할 수 있는가’와도 연결된다. 결국 ‘나만 특이하고 남과 다르다’는 생각은 ‘세상 모든 사람이 특이하고 남과 다른 점이 있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물론 사람들 간에는 공통점도 참 많다. 누구를 어떤 것으로 묶느냐에 따라 서로 엮이기도 하고 나뉘기도 한다. 그래서 수많은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나조차도 이 차이를 잘 인식하지 않고 살아가며, 타인의 차이를 인식하는 순간 불편해할 때도 잦다. 그리고 이성애자냐 동성애자냐, 시스젠더냐 트렌스젠더냐를 떠나 이러한 서로 간의 차이가 유일하게 아름답게 빛날 수 있는 자리가 바로 퀴어 문화축제라고 생각했다.

   
▲ 28일 서울 시청광장에서 열린 퀴어문화축제 풍경. 사진=이하늬 기자
 

퀴어문화축제 날짜가 다가올수록 망사스타킹을 꺼내고 싶다는 욕망이 커졌다. 내가 포기했던 것을 다시 입고 싶었다. 이왕이면 전신을 덮는 망사를 걸치고 싶었다. 이런 나에게 누군가는 네 몸이 대상화가 되지 않느냐고 비판했다. 여성이 옷을 벗으면 그 여성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 몸이 대상화가 된다는 것이었다.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여성을 떠나 남성의 몸마저 대상화가 되는 현실에서 자꾸 여성의 몸이 대상화가 된다는 말을 계속하는 것이 대체 무슨 소용이며 어떤 의도일까? 어떤 불편함이 있는 것일까? 내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주체가 느끼는 자유이고 이것을 입으면서 드러내는 나의 의지였다.

나는 평소에 나체로 거리를 활보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다. 삶은 계속 이어져야 하니까. 하지만 내가 ‘평소’의 ‘평범한’ 모습으로 퀴어 문화축제에 갔다면 너무나 당연하게‘이성애자 여성’으로 인식되었을 나의 정체성이 의심 받았다는 것은, 적어도 내 몸이 ‘대상화되기’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실제로 나를 모르는 많은 수많은 이성애자와 퀴어, 한국인과 외국인, 일반인과 기자들이 전신 망사 스타킹의 복장을 한 내게 물었다.

“저, 혹시 당신은 트렌스젠더 입니까?”

처음엔 아니라고 했다가 질문이 반복되자 난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이성애자로 보이지 않았다면 참 다행이다. 내가 트렌스젠더로 보였다니 참 다행이다. 내 엉덩이와 망사 때문에 누군가가 불편했다면 참 다행이다. 불편한 것들이 더 많이 끊임없이 발생했으면 좋겠다. 퀴어 문화축제가 하루뿐인 게 아쉬울 정도다.

만약 내 가족들이 내 글이나 사진을 본다면 많이 놀랄 것 같고 설명할 것이 참 많겠지만, SNS에 이런 두서없는 글을 끄적인다고 내 삶이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퀴어들이 퀴어 문화축제를 하루쯤 즐긴다고 해서, 동성혼이 합법화가 된다고 시스젠더 이성애자의 삶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과 같다. 

하지만 성소수자 차별이 없어진다면, 성소수자의 삶은 아주 크게 달라진다! 성소수자도 이성애자와 동등하게 가족을 만들고 세금 혜택을 받고 직장에 취직하는 데 어려움이 없고 합법적으로 아이를 입양할 수 있는 권리가-애초에 있었어야 마땅한 그 권리들이-생긴다면 성소수자들은 당연히 기뻐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성애자들의 삶에 손해가 생기는 것은 없다. 엄밀히 말해 달라지는 것은 거의 없다. 

아니, 감히 말하건대 오히려 이성애자의 삶 또한 윤택해질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최소한 어떤 다른 타인의 삶이 행복해지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굳이 타인의 행복을 반대할 이유가 있을까? 각자가 자기 행복을 찾을 여유도 없이 바쁜 이 세상에서? 잠깐 한눈팔아도, 아니, 정신 똑바로 차려도, 내가 누구인지, 나는 어디에 있는지, 메르스에는 안 걸렸는지 신경 써야 할 것이 너무 많은 이 세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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