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 대통령 ‘침묵’으로 더 격렬하게 압박?

박근혜 대통령은 29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정국 최대 이슈인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미 박 대통령의 뜻이 충분히 전달됐고, 새누리당 긴급 최고위원회에서도 많은 논의가 이뤄진 만큼 지켜보겠다는 게 청와대 기류라는 분석이 나온다.

국민일보는 “박 대통령이 이번 회의에서 보여준 모습은 ‘이제 공은 모두 여당에 넘어갔다’는 것”이라며 “이미 유 원내대표에 대한 불신임 의지를 강하게 천명했던 만큼 더 이상의 언급은 무의미하고, 당의 혼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선 당이 알아서 정리해야 한다는 침묵 속의 압박인 셈”이라고 해석했다.

국민일보는 “이제는 당에서 알아서 하는 것 외에 청와대가 나서서 할 게 없다”는 청와대 관계자의 말을 전하며 “박 대통령이 회의에서 일절 언급하지 않은 것은 다시 한번 유 원내대표 거취를 언급하거나 여야 정치권 비판에 나설 경우 대통령이 직접 정쟁에 뛰어드는 양상으로 비칠 것이라는 인식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 국민일보 30일자 5면
 

실제로 박 대통령의 지난 25일 “배신의 정치는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들께서 심판해 주셔야 할 것”이라는 국무회의 발언이 두고 ‘공천학살’을 연상시키는 정치적 ‘문제 발언’이라는 지적이 여권에서도 나오고 있다. 야당은 대통령의 선거개입 의도를 문제 삼으며 공직선거법 위반 논쟁을 키우고 있다.

경향신문은 “새누리당 비주류들은 박 대통령이 언급한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유승민 원내대표를 넘어서 비주류들을 겨냥한 발언”이라며 “‘선거에서 심판해 달라’는 것은 비주류에 대한 공천학살을 예고한 발언이라는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다”고 전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박 대통령 발언에 대해 ‘공무원 기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자는 선거에 대한 부당한 영향력의 행사 기타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공직선거법 제9조1항의 위반이라고 비판을 이어가고 있다.

새정치연합 혁신위원으로 활동 중인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지난 28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박 대통령 발언을 두고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가 상당하다. 법적으로 탄핵 사안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왜 이 점을 지적하지 않지? 실명을 거론하지 않았다 이건가?”라고 했다

   
▲ 경향신문 30일자 4면
 

“친박의 ‘과잉충성’, 결국 내년 공천이 목표”

새누리당의 친박계가 ‘유승민 찍어내기’에 총력을 쏟는 것은 당내 비주류로 밀려난 상황을 역전시키고 내년 4월 총선 공천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려는 의도라는 게 지배적인 해석이다.

한겨레는 “새누리당 의원 160명 가운데 친박으로 분류되는 이는 넓게 잡아 40~50명 선으로, 상대적으로 소수다. 이런 외형적 열세에도 유승민 원내대표를 뿌리째 흔들 수 있는 것은, 박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있기 때문”이라며 “박 대통령도, 친박도 이번 기회가 열세를 만회할 마지막 결정적 기회라고 보고 있는 것으로, 내년 총선 공천을 앞두고 당 주도권 쟁탈전에 나선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국일보는 “여당 의원들이 표결로 선출한 원내대표를 향해 ‘무조건 나가라’고 밀어내는 일부 친박계 의원들은 1인 헌법기관의 품위도, 책임도 저버리고 스스로를 청와대 거수기로 전락시켰다는 비판이 무성하다”며 “길게 보면 이들의 과잉 충성이 박 대통령의 불통 이미지를 강화하고 다음 총선·대선 승리를 위해 합리적·개혁적 보수가 목소리를 낼 공간을 아예 막아버릴 것이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고 꼬집었다.

한국일보는 이어 “정치권에는 유 원내대표 몰아내기에 앞장선 인사들 중 일부가 노리는 것이 결국 내년 총선 공천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면서 “주류에 눈 도장을 찍고 ‘핵심 친박계’라는 타이틀을 확보하는 등 자신의 정치적 입지 강화를 위해 정치권 안팎의 따가운 시선을 무릅쓰고 있다는 것”이라고 전했다.

동아일보는 30일 <새누리당, 유승민 사퇴 밀어붙여 ‘박근혜 黨’ 만들 텐가>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유 원내대표는 여당의 원내대표로서 국정 추진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 확대에 더 열심이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하지만 박 대통령도 당에 법안 처리만을 일방적으로 주문했지, 소통하려는 노력을 얼마나 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 조선일보 30일자 사설
 

조선일보도 “박 대통령이 공무원연금 개편을 비롯한 주요 국정 현안을 다루는 과정에서 여당 지도부와 자주 머리를 맞대며 소통해왔다면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대통령은 야당 시절인 2002년 ‘총재 1인 지배 체제 종식’을 주장하며 탈당까지 감행할 만큼 정당 민주주의를 강조해했는데 집권당을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는 이번 사태를 보며 국민이 느끼는 실망감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조선일보는 “대통령 말 한마디에 자신들도 참여한 경선에서 당선된 원내대표를 내치겠다고 우르르 달려든 친박계의 행태도 뒷골목 왈패들과 다를 게 없다”며 “조선왕조 시대에도 없었던 특정인의 성씨를 딴 정파(政派)가 21세기 세계 경제 10위권을 오르내리는 대한민국 집권당에 있다는 것 자체가 코미디”라고 힐난했다. 

박근혜의 ‘유승민 찍어내기’ 박정희 ‘코털 사건’과 닮은꼴

아울러 박 대통령의 ‘유승민 찍어내기’ 시도는 40여 년 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소위 ‘4인방 축출’과 닮은 점이 많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박 대통령의 여당 통제·관리를 놓고 2인자들의 도전을 가차 없이 응징하며 ‘1인 권력 강화’에 몰두한 박 전 대통령의 ‘권력통치’와 닮았다는 분석이다.

이종걸 새정치연합 원내대표는 29일 최고위원회에서 “(박 대통령에게선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이 유정회(유신정우회)를 만들어 (소속) 국회의원에게 직접 지시하던 시절의 행동양식이 보인다”며 “(지금은) 대통령이 국회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종속물처럼 지배할 수 있는 체제가 아니다”고 비판했다.

추미애 최고위원은 “박정희 대통령이 내무장관 해임안을 막지 못한 김성곤 공화당 의원 등을 중앙정보부를 시켜 코털을 뽑아버린 사건이 있었다”며 “‘아버지 뜻을 살리겠다’는 박 대통령이 고작 이런 방식을 답습하느냐”고 지적했다. 

   
▲ 한겨레 30일자 3면
 

한겨레는 “추 최고위원이 언급한 ‘코털 사건’은 1971년 야당 의원들이 제출한 오치성 내무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공화당 의원 일부가 동조해 통과시키자, 대통령의 특명을 받은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공화당 의원 23명을 중앙정보부에 끌고 가 고문한 사건을 가리킨다”고 설명했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1971년 여당인 공화당의 ‘실세 4인방’으로 통하던 김성곤·길재호·김진만·백남억 의원은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건의안 가결을 주도한 ‘10·2 항명 파동’을 일으켰다. 노발대발한 박 전 대통령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시켜 4인방을 비롯해 해임에 찬성표를 던진 공화당 의원 23명을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고가 초주검을 만들었다.

경향신문은 “한때 박 대통령 최측근으로 통했던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도 청와대 정책 기조에 반박하는 등 대통령의 권위에 도전하면서 ‘미운털’이 박혔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라며 “박 전 대통령이 항명 파동을 진압하고 당을 청와대 하부기관으로 만들었듯이, 박 대통령은 이번 파동을 계기로 수직적 당·청관계 구축을 노린다. 40여 년 전에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나섰지만, 지금은 골수 친박들이 돌격대로 나선 형국”이라고 해석했다.

   
▲ 경향신문 30일자 5면
 

이흥우 국민일보 논설위원은 “박근혜 대통령은 잦은 배신을 경험했다. 오랜 기간 가까이서 접해 누구보다 권력의 속성을 잘 아는 박 대통령의 ‘배신 트라우마’는 깊다”고 밝혔다.  

이 위원은 “측근의 배신으로 아버지를 잃었고,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권력이 사라지자 그 많던 추종세력이 자신을 기피인물로 멀리하는 모습을 보며 서글픔을 넘어 분노를 느꼈을 것”이라며 “정인숙 사건 등 아버지와 관련된 부정적 언론보도를 보고 ‘피가 거꾸로 솟았다’고 했던 박 대통령”이라고 설명했다.

박 대통령은 2007년 펴낸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에서 “사람을 배신하는 일만큼 슬프고 흉한 일은 없을 것이다. 상대의 믿음과 신의를 한번 배신하고 나면 그다음 배신은 더 쉬워지며 결국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한 상태로 평생 살아가게 된다”고 적었다. 

이 위원은 “박 대통령이 한때 자신의 비서실장이었던 유 원내대표를 ‘배신자’로 낙인찍었다. 대통령의 뜻을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나와 뜻이 다르다고 배신 운운하는 것은 다름과 틀림을 동일시하는 편협함의 다른 말이다. ‘배신의 정치’는 박정희정부의 공작으로 야당 소속으로 3선 개헌에 찬성한 성낙현 조흥만 연주흠 의원 같은 경우에나 해당한다”고 덧붙였다.

   
▲ 국민일보 30일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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