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명박 재임 시절 가장 아픈 사건 가운데 하나였던 용산 참사를 영화화했다고 해야 하나? 아니다. 그 사건의 모티프를 가져 왔지만 배경은 아현동으로 옮긴 손아람 작가의 원작을 영화화했으니 픽션이 맞을 것 같다. 당연한 물음. 그렇다면 이 영화는 정말 픽션인가? 누구나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용산 참사가 있으니 그렇게 말하기도 어렵다. 결국 영화는 사실이면서 허구이고 허구이면서 사실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러니 영화는 가시밭길을 간다. 사실이라면 당연히 현실과 비교가 되고 허구라도 역시 현실과 비교가 되니. 허구이되 현실 같은 허구가 되어야 하는 이야기. 영화의 딜레마는 이것이다.

용산 참사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다면 다큐 <두 개의 문>을 보면 된다. 이 다큐에는 당시의 기록을 최대한 참조하고 재판을 재현하면서 경찰의 진압이 왜 문제인지 집중적으로 증명한다. <두 개의 문>의 가장 큰 장점은 이 사건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사건인지 보여주는 것이지만, 다큐는 용산 참사에 시선을 집중하면서 스스로 범위를 한정해 놓았다.  

<소수의견>은 <두 개의 문>과 다른 길을 간다. 단지 다큐와 극 영화의 차이점이 아니라 사건을 재현하고 극화하는 관점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큰 틀로 보면 <소수의견>은 법정 드라마이다. <도가니>나 <부러진 화살>, <변호인>과 같은 길을 가는 것. 이 전략은 간단하다. 재판의 현재를 중점으로 하면서 과거 사건을 재현해 지금 재판하고 있는 사건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 것인지 증명하는 것이다. 큰 틀로는 <소수의견>도 이 전략을 따르고 있다.

   
▲ 영화 <소수의견> 포스터
 

그런데 <소수의견>을 이렇게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 영화 안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오프닝을 보자. 문제의 사건이 발생하는 그날의 재현. 철거현장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러 아들이 왔는데, 마침 그 시간에 침탈이 있었다. 자세한 상황은 보여주지 않고 바로 사고가 발생했다는 외침이 등장하면서 두 명의 인물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린다. 한 명은 경찰이고 한 명은 아들. 공교롭게도 경찰은 아들의 아버지에 의해 죽었고 아들은 깡패에 의해 죽었다. 가해자인 아버지는 수인의 몸이 되었다. 이것이 경찰의 주장이다.

지방대 출신에 보잘 것 없는 국선 변호사가 마지 못해 가해자의 변호를 맡는다. 그런데 가해자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것이 깡패가 아니라 경찰이라고 말한다. 아들을 죽였기 때문에 보호하려는 정당방위라는 것. 일간지 사회부 기자가 이 사건을 취재하면서 조작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제 사건이 복잡해진다. 담당 검사는 사건송치자료 열람을 거부하고, 야당 국회의원은 시행사의 거대한 로비가 있었다는 말을 한다. 이것만으로도 복잡한데 영화는 더욱 나간다.

   
▲ 영화 <소수의견> 스틸컷
 

거대한 음모가 이 사건에 있다는 것을 직감한 변호사는 운동권 출신의 선배인, 이혼전문 변호사에게 사건을 함께 하자고 요청한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하나다. 국가 권력이 깊숙이 개입한, 조직적인 은폐 사건이라는 것. 그들이 숨기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을 밝힐 수 있을까? 두 변호사와 기자는 국민참여재판과 ‘100원 국가배상청구소송’을 진행한다.

여기까지만 서술해도 이야기가 꽤나 복잡하다. 철거, 깡패, 언론, 정치, 재판 등의 단어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재판을 진행하면서 막강한 파워를 지닌 검찰의 일사분란한 모습들이 등장하고, 시민 단체의 기회주의적인 모습도 보이며, 정치인의 정략적 태도도 목도할 수 있다. 심지어 용역 깡패의 의리를 볼 수도 있고, 퇴임한 경찰의 가장으로서의 고통도 보인다. 자식을 죽인 사람과 대면해야 하는 아버지의 아픔도 있고,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경찰을 죽여야 했던 아버지의 눈물도 있다.

자, 어떤가? 영화는 분명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도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나의 영화 안에 모두 담은 것일까? 당연히 영화 초반은 꽤나 산만하다.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갈피를 잡기가 쉽지 않다. 후반으로 가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면 관객들은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이야기가 모아지기는커녕 더 커지고 있으니. 당연히 분산되고 흩어진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런 구성이 오히려 영화를 살렸다는 생각이 든다. 재판 결과 하나만을 위해 모든 영화적 요소가 집중되어야 하고, 그래서 재판 이후 승리의 환호나 패배의 울분으로 끝나야 하는 극 영화와는 전혀 다른 방식이 오히려 다가왔다. 왜일까?

이렇게 물어볼 수 있겠다. 신인 감독 김성제는 연출을 세련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이야기를 분산해 놓은 것인가, 아니면 그는 목적을 지니고 이야기를 흩어 놓은 것인가? 아무래도 나는 후자에 걸고 싶다. 그는 실제 발생했던 용산 참사를 영화화해서 울분을 자아내는 영화를 만들려고 하지 않은 것 같다. 그 목표를 위해서라면 <두 개의 문> 같은 영화를 만들었어야 했다.

   
▲ 영화 <소수의견> 스틸컷
 

그렇다면 그가 의도한 것은 무엇일까? 후반부를 보자. 국민재판은 분명 승리했다. 배심원들은 모두 정당방위로 인정했다. 깡패가 아니라 경찰이 아들을 죽였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그러나 재판장은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형량을 줄이지 않았다. 온갖 불법과 편법을 썼던 검사는 그것이 발각되어 옷을 벗었을 때 우연히 만난 변호사에게 말한다. 국가를 위해 누군가는 봉사를 하고 희생을 한다고. 자신은 국가를 위해 봉사하며 살았는데 당신은 무엇을 했느냐고?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신념을 지닌 보수들의 변호들. 영화의 엔딩인 이 장면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그렇다. 감독은 이 사건을 통해 지금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지방대 출신의 보잘 것 없는 변호사가 의식이 있어 사건 변호를 맡은 것이 아니다. 시민단체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이익 집단일 뿐이다. 권력을 지닌 이들의 조직적인 움직임이야 말해 무엇하랴? 어떻게 보면 영화는 꽤나 시니컬하다.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니다. 둘 다 틀렸다고 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든다.  

이렇게 볼 수도 있겠다. 감독은 재판의 승리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패배를 인정하지도 않는다. 다르게 말하면, 어설프게 승리를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희망도 놓치지 않는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자세가 아닐까? 손쉬운 승리의 환호도 패배의 깊은 수렁도 아니라, 여러 사건이 복잡하게 얽혀 지금의 우리를 구성한다는 것, 그렇지만 기득권의 응집력은 대단하다는 것. 이런 점에서 진실을 재현한 마지막 부분은 오히려 없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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