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반발을 부를지 짐작하지만 한 마디 하고자 한다. 노무현정신을 계승하는 것과, ‘노빠’는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 노빠는 이른바 ‘참여정부 무오류주의자’들인데, 합리적 계승자라 칭하기에 불편한 대목이 적지 않다. 그런데 노빠는 자신들을 전자, 즉 노무현정신의 합리적 계승자라고 확신하는 경우가 많다. ‘열렬히 지지하는’ 정도라고 생각들 한다는 얘기다. 불필요한 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무리를 무릅쓰고 단순화해보겠다. 노무현을 호평하고 그의 유지를 받드는 것과, 참여정부의 공과(功過)를 가리는 걸 혼동하면 노빠고, 혼동하지 않으면 정신 계승자라 구분코자 한다.

유가족이나 추모식 주관처에 사전에 정식으로 알리지도 않고 언론에만  슬쩍 흘린 채 경찰 450명의 호위 속에 들이닥치듯 참석한 여당 대표에게, 고인의 아들이자 제주(祭主)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을 했다. 오죽했으면 제주가 그렇게 직설 토로했을까. 세상을 떠난 지 6년이 지나서도 제주로 하여금 그런 말을 대놓고 할 수 밖에 없게 만든 책임은 고인의 정치적 반대파에게 일차적으로 있다. 고인의 계승자를 자처한 사람들 몫도 적지 않다.

그러나, 통제되지 않은 일부지만, 물병 던지고 야유하는 것, 노무현정신 계승은 아니다. 비판과 공격은 다르다. 운집한 그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이가 바로 그 노무현이었으니 행여라도 공격으로 비칠 행동은 억눌렀어야 했다. “최루액 섞은 물대포를 얼굴에 정면으로 쏘아대는데 물병 정도가 뭐 공격이냐”고 말하고 싶은 심정 다 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추모하러 온 사람 포위하고 모욕주고 공격했다”고 여기는 빌미를 주기 때문이다. 순간적 카타르시스는 줄지 모르지만, 그건 말 그대로 순간적 후련함이다. 내년에는 계란이라도 던져야 직성이 풀릴까? 길 가로막고, 차에 몇 시간 잡아두면 분이 다 풀릴까? 상대와 같은 저열한 방식으로 대거리하면 결국 똑같은 수준이 되고 만다. 허탈함만 남길 뿐이다. 자칫 되로 주고 말로 받을 수도 있다. 돌려줄 건 물병이 아니라 선거 승리다. 속울음 삼키고 어금니 깨물며 철저히 승리를 준비하는 게 옳다. 물병 몇 개 던져 후련해하면 결국 노무현이 또 이용당하고, 또 패대기쳐진다. 그런 식의 대응은 결과적으로 사후의 노무현을 자승자박케 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숭모 대상이 누구이건 간에 ‘빠’는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계승자와 환자는 완전히 다르다. 환자들은 계승자를 “뜨뜻미지근하다”며 가짜 취급하거나 때론 핍박하기도 한다. 자신과 지지 강도가 다르다 싶으면 몰아세우거나 회색분자 취급한다. 그리 되면 종내는 그 추종 대상이 곤경에 빠진다. 누군가를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좋아하는 것, 참 어려운 일이다. 그가 특히 노무현이라면. 그는 벗어나기 힘든 매력이 철철 넘친다. 그래도 구분할 것은 구분해야 한다.

   

▲ 백중기 화백 ‘노란 5월’

 

 

 

   

▲ 이강윤 국민라디오 ‘이강윤의 오늘’ 앵커

 

 

강원도 영월에 백중기라는 화가가 있다. 그의 작품 중에 <노란 오월>이라고 있다. 고 노무현 대통령 노제 장면을 꼼꼼한 필치로 그린 작품이다. 그 그림 상단에 조그맣게, 아주 조그맣게 사람 하나 그려져 있다. 어떤 사내가 밀집모자 쓰고 자전거 타고 가고 있다. 이제 노무현을 백 화백 그림 속 ‘자전거 탄 아저씨’처럼 놓아주면 어떨까 싶다. 그의 죽음 만큼, 그의 생일을 기억하고 기리면 어떨까 싶다. 그의 최후가 비통하고 억울하기 그지 없지만, 그래서 더 치 떨리겠지만, 그럴수록 어금니 깨물고 속울음 삼키며 승리를 준비하는 게 맞지 싶다. 공격 대신 의연한 비판에서 멈출 때, 노무현은 더욱 찬연해지지 않을까 싶다.  

다만, 그에 기대거나 그를 타박함으로써 이득을 보려는 자들, 차별 정치 깨부수려던 노무현의 이름으로 걸러내야 한다. 제 논에 물대기 식으로 지역 민심 왜곡하는 각지의 토호들 걸러내야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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