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노동OTL’ 기사는 7년이 지난 지금도 읽힌다. 기자들이 한 달 간 기자란 직업을 숨기고 가전제품 공장, 감자탕집, 가구공장, 대형마트에서 임금노동자로 겪고 느낀 시간들이 숨 막히게 담겼다. 5개월 간 연재된 기사는 통계가 아닌 땀과 노동으로 채워졌고, 비정규 노동현장을 현실적으로 묘사하며 사회적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일할수록 가난한 ‘워킹푸어’의 현실이 르포르타주의 형식으로 구현됐던 이 시리즈는 <4천원 인생>이란 책으로 나왔다. 이 책은 13쇄가 나갔다. 

2005년 시사저널 830‧831합본호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언론계에 회자되고 있다. 잡지 한 권이 모두 삼성 관련기사로 채워졌던, ‘삼성전면 특집호’라는 유일무이한 도전이었다. 이건희 리더십에 대한 비평부터 삼성 구조본과 세리(삼성경제연구소)에 대한 해설, 무노조 경영의 비밀과 삼성 임원 1639명 분석에 삼성가혼맥까지 정리했다. 흩어져있던 삼성에 대한 정보를 한 권에 모아 삼성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맥락저널리즘을 선보이며 호평을 받았다.  

디지털미디어시대가 도래한 이래로 우리는 휘발성 기사가 넘쳐나는 온라인저널리즘 속에 살고 있다. 흩어진 정보의 양만큼, 정보가 전환되는 속도만큼, 우리는 시공간을 벗어난 정보의 타임라인, 늘 가치 있는 에버그린(Evergreen)콘텐츠를 갈망하고 있다. 

   
▲ 2009년 한겨레21의 기획기사 '노동OTL' 시리즈.
 

에버그린 콘텐츠는 2014년 뉴욕타임스 혁신보고서에 등장하며 언론계에 회자되기 시작한 개념이다. 에버그린 콘텐츠는 수많은 휘발성 기사들의 모음이다. 기존의 텍스트에 콘텍스트를 입힌 콘텐츠다. 마가렛 대처가 사망했을 때, 가디언은 수작업을 통해 과거 대처와 관련한 기사를 정리, 대처의 삶을 입체적으로 조명했다. 강정수 연세대 커뮤니케이션연구소 박사는 “에버그린의 핵심은 언론사의 누적된 지적자산을 재활용하기 쉽게 만들자는 것에 있다”고 설명한다.

오늘날 언론은 방대한 정보를 누적하고 있다. 이미 정리된 ‘정보의 도서관’이 있다면 필요한 기사만 쉽게 끄집어내 재가공하면 사건의 타임라인을 구현할 수 있다. 강정수 박사는 “독일 슈피겔의 경우 1960년대부터 취재내용을 정리해왔지만 한국은 자료정리에 역량을 투여하지 않고 보관만 하는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강 박사는 “자료정리 시스템이 아날로그에 머무르면 자료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게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핵심은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디지털 자산관리다.

에버그린 콘텐츠는 기존의 취재문법과 다르다. 보도 자료와 스트레이트 기사형식으로 당일 이슈를 쫓아가고, 전문가와 관련자의 코멘트를 받는 기존 문법과 달리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기사형식도 자유롭다. 에버그린 콘텐츠의 핵심은 맥락저널리즘, 다른 말로 구조화된 저널리즘이다. 구조화된 저널리즘은 개별 뉴스정보가 생성될 때 태그(tag)를 추가해 저장하고 이를 기초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과정(강정수, 2014)을 의미한다.

뉴욕타임스는 혁신보고서에서 “디지털 세상에서 우리의 풍부한 기사 아카이브가 다른 경쟁자들에게 없는 분명한 장점”이라고 강조하며 “1851년부터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기사는 1472만개”라고 자랑했다. 뉴욕타임스가 자랑하는 이 데이터를 구조화해 맥락을 묶어내면 누구도 쓸 수 없는 기사가 나온다. 수십 년 전, 수백 년 전 기사가 타임라인을 타고 사건의 맥락과 사회변화의 흐름을 짚어내게 된다. 

1920년대 대공황 당시와 2007년 서브프라임 사태 당시의 상황을 기사로 비교할 수도 있다. 역대 미국 대통령의 쿠바 정책을 타임라인으로 보여줄 수도 있다. 오늘날 디지털미디어환경이 가져온 선물이다. 독자는 과거 국면과 현재 국면을 비교하며 시공간을 넘어 입체적으로 사건을 이해할 수 있다. 에버그린 콘텐츠 구현에 최적화된 콘텐츠관리시스템(CMS:Content Management System)의 혁신이 관건이다. CMS만 제대로 구성된다면 기자들은 거인 위의 난장이처럼 시야를 넓힐 수 있다는 게 강정수 박사의 설명이다.

   
▲ 2013년 아시아경제의 기획기사 '그 섬, 파고다'.
 

일회성 실험 넘어 상시적으로 생명력 강한 콘텐츠 필요 

한국도 에버그린 바람이 불고 있다. 에버그린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언론사는 경남도민일보다. 경남도민일보는 지난해 7월부터 2000년 이후 작성한 46만7000여건의 기사와 6600여 명의 인물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경남 지역의 중요한 이슈를 재정리하는 ‘지난기사 새로쓰기’ 기획을 선보였다. 첫 아이템이었던 ‘남해안 적조’ 기사는 한반도에서 최초로 적조가 일어난 시기가 삼국사기에 기록된 서기 161년이며, 경남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힌 적조가 1995년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끌어냈다. 

경남도민일보는 ‘4대강 사업 찬성·반대 인사 및 단체 총 정리’ 기획을 통해서는 가장 적극적으로 4대강 사업을 옹호한 인사(김태호 전 경남지사, 안상수 전 한나라당 대표 등)와 지자체(창녕군) 등을 분석해 독자들의 호평을 받기도 했다. 해당 기사를 작성한 임종금 기자는 “팩트를 모아보면 하나의 흐름이나 경향이 나타나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과거 기사들을 정리했다”고 밝혔다.

임종금 기자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이 기획은 약간의 노력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임 기자는 “수백 개의 기사를 다 본다고 생각하면 아찔할 수 있겠지만, 막상 해 보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하루에 2시간, 3~4일만 하면 1000개의 기사를 훑어볼 수 있다”며 “언론사 홈페이지는 데이터의 보고다. 우리는 이걸 그대로 묵혀 두기만 했을 뿐이다. 혁신은 새로 거창하게 만들 필요 없이 있는 것부터 잘 활용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에버그린 콘텐츠 실험을 제안한 김주완 경남도민일보 출판미디어국장은 “지금까지 뉴스라고 하면 그날그날 발생하는 현안과 사건 보도 위주로 생각하는 관념이 많았다. 하지만 시의성과 관계없는 역사·문화·인물·자연환경 등 원래 갖고 있던 자원에 대해서도 스토리텔링으로 콘텐츠화하면 얼마든지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오마이뉴스의 인터랙티브 뉴스도 속보나 진행 중인 사건을 지속적으로 접하고 있는 독자들에게 기사 속 사건의 문맥과 중요성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독자의 뉴스 접근성과 이해도를 높였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세월호 생존자들의 참사 당시 증언을 발굴하고 세월호 침몰과정을 인터넷과 모바일에 입체적으로 구현한 ‘4월16일 세월호, 죽은 자의 기록 산 자의 증언’ 기획기사가 한 예다. 

서울에서 전·월세를 구하는 1~2인 가구가 필요한 정보를 담은 스페셜 페이지 ‘실전! 셋방 찾기’도 화제였다. 상근기자 1명과 시민기자 7명, 개발자와 디자이너가 각각 2명씩 투입돼 서울 시내 공인중개사들이 지난 2월 말부터 3월 초까지 포털 사이트 ‘네이버 부동산’에 올린 5~18평대 매물들을 모두 수집해 분석했다. 구별로 나뉘어 그 지역의 특징을 소개하는 현장 기사도 실어야 했다. 당장 거창한 수익으로 연결되지는 않지만, 언론사의 전문성과 신뢰도가 쌓이게 된다.

   
▲ 2014년 오마이뉴스 '세월호, 죽은자의 기록 산자의 증언' 인포그래픽.
 

에버그린 기사 제작에 참여한 김동환 오마이뉴스 기자는 “에버그린 콘텐츠라고 해서 무언가 대단한 인상을 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동환 기자는 “우리가 새롭게 시도하고 있는 뉴스의 본질은 독자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므로 각종 인터랙티브 도구를 사용하는 것도 독자의 이해를 돕는 부분을 가장 신경써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기자는 “세월호 기획도 우리가 어떻게 하면 기억하기 편한 방식으로 구현할 것인지를 고민하다 인터넷·모바일 뉴스 소비자의 성향에 맞춰서 기자들이 9주 동안 일일이 설계도에 점을 찍어가며 작업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마이뉴스의 에버그린 기획은 독자들이 언제든 필요한 정보를 찾아보기 쉬운 뉴스를 만들려다 보니 산재된 데이터를 수집하고 샘플링 해 새롭게 재가공하는 데 많은 시간과 인력이 필요했다. 

누구나 파편화된 데이터를 모아 재가공해 에버그린 콘텐츠를 구현해낼 수 있다. 하지만 당장 수입이 되고 주목을 끄는 것은 중앙일보의 ‘김종필 회고록’과 같은 기사들이다. 2013년 ‘그 섬, 파고다’ 기획을 시작으로 ‘위안부 보고서55’ 등 ‘스페셜 뷰’ 섹션을 만들어 독자들에게 디지털 스토리텔링 뉴스를 제공하고 디지털 뉴스룸을 신설해 새로운 에버그린 콘텐츠를 기획 중인 아시아경제의 고민도 일회성 콘텐츠를 생명력이 강한 새로운 콘텐츠로 만들며 수익을 내는 방안이다. 

백재현 아시아경제 뉴미디어본부장은 ‘그 섬, 파고다’ 등 일련의 기획에 대해 “콘텐츠를 통한 독자 유입도 그리 높지 않고, 독자 입장에선 과거 뉴스보다 쉽게 소비할 순 있지만 100% 그들의 니즈(needs)를 충족한다고 보긴 어렵다”고 지적한 뒤 “인포그래픽 뉴스가 지금껏 휘발성이 강한 기사를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만들었다면 이제 하루하루 오프라인에 쏟아낸 많은 기사에 어떻게 에버그린 콘텐츠의 성격을 부여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고 전했다.

결국 관건은 구조화된 데이터다. 뉴욕타임스는 혁신보고서에서 “에버그린 콘텐츠를 새롭게 다듬는 방법, 우리 기사를 좀 더 이용하기 좋은 방법으로 정리하고 포장하는 방법, 그리고 독자가 필요로 하는 적절한 콘텐츠를 전달하는 방법을 더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정수 박사는 “구조화된 데이터 확보는 기자의 개인역량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시스템적으로 아날로그적 전통을 디지털로 어떻게 구현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조선일보의 한 관계자는 “사내에서도 에버그린 콘텐츠에 관심이 많다. 100여년 간 축적한 기사를 전부 데이터베이스화해서 계속 이용하고자 한다. 하지만 현재는 부분적으로만 이용되고 있다”고 전했다. 조선일보는 조선닷컴에서 1945년 11월23일자부터 지면보기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경향신문‧한겨레‧동아일보‧매일경제는 네이버 라이브러리에서 지면보기 서비스 중이다. 

미디어오늘은 스페셜페이지를 통해 맥락저널리즘을 시도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세월호, 잊지 않겠습니다’란 주제의 타임라인을 선보였다. 2009년부터 추적하고 있는 천안함 사건 관련 기사를 정리해 ‘천안함의 비밀’ 코너도 마련했다. 이명박정부 이후 MBC를 입체적으로 바라 볼 수 있는 ‘오욕과 굴종의 MBC 7년’ 기획도 타임라인으로 정리했다. 

한겨레는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비문탐구’란 제목의 카드뉴스를 선보였다. 박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 세월호 유가족과 면담 등에서 나왔던 발언을 묶어 타임라인으로 보여줬다. 이처럼 에버그린 콘텐츠는 단순히 시간 순으로 텍스트를 묶어내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시대의 흐름 감지, 현장에 밀착하되 사안의 본질 꿰뚫어야 

에버그린 콘텐츠의 조건은 무엇일까. 노동OTL 기획 당시 한겨레21 사회팀장이었던 안수찬 한겨레21 편집장은 “에버그린 콘텐츠의 공통점은 시대의 흐름을 감지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안수찬 편집장은 “노동OTL은 비정규 불안정 노동이라는 화두를 틀어쥐었다. 생생한 불안정 노동 현장을 보여주며 역사를 표상하는 르포가 됐다. 100년이 지났어도 조지 오웰의 카탈루니아 찬가와 같은 르포르타주가 읽히는 것과 같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한 가지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조성문의 실리콘밸리(sungmooncho.com)의 운영자 조성문씨는 2010월 3월 자신의 사이트에 ‘한국 인터넷에서 잘못 끼워진 첫 단추, 그 이름은 네이버’란 글을 썼다. 운영자는 “최근에도 많은 분들이 공감하며 회자되고 있어 2015년 4월 기준으로 누적 조회 수가 200만을 넘었다”고 밝혔다. 그는 “지금도 네이버의 검색 품질에 대해 아쉬움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라고 전했다. 시대의 흐름을 감지하고 사람들의 관심사를 적확하게 짚어낸 결과 시간이 흘러도 사람들이 찾는 콘텐츠로 거듭났다.

안수찬 편집장은 “인포그래픽은 단기적으로 독자를 끌어들일 수 있지만 이것이 곧 에버그린 콘텐츠가 되지는 않는다”고 지적하며 에버그린의 조건으로 “시대정신을 파악하는 사회과학적 능력과 생생한 현장에 밀착하고 복합적 사안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인문학적 사고력, 그리고 이를 생생히 전달하는 문학적 능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 당장 더 많은 독자가 아니라, 오랫동안 점점 더 늘어나는 독자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시간 지도의 탄생> 저자인 역사학자 대니얼 로젠버그는 “시간 차트(연표)가 추구해온 가장 중요한 목표는 더 많은 자료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뚜렷한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오늘날 에버그린 콘텐츠의 목적도 연표와 마찬가지다. 대니얼 로젠버그는 “타임라인이 오늘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며 어느 곳에서나 등장한 시기는 이제껏 없었다”며 “타임라인은 현재의 사용자 인터페이스에서 가장 핵심적인 구성 체계”라고 강조했다. 휘발성 기사가 범람하는 시대, 이제 언론은 시대를 꿰뚫는 콘텍스트를 타임라인으로 구현해낼 의무가 생겼다. 

<편집자주>

미 디어오늘이 오는 5월 창간 20주년에 맞춰 저널리즘의 미래를 고민하는 20회 연속 기획 시리즈를 내보냅니다. 미디어 산업의 전통적인 수익 기반이 붕괴되고 콘텐츠 플랫폼이 다변화하면서 주류 언론의 의제설정 기능이 약화되고 생존을 위한 경쟁에 매몰되면서 급기야 저널리즘의 근간이 위협을 받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이 기획 시리즈는 한국 언론의 현실을 진단하고 퇴행적인 일련의 변화를 비판하고 혁신과 대안을 모색하는 순서로 진행합니다. 창간 20주년, 미디어오늘은 언론 보도의 이면과 팩트 너머의 진실을 파고드는 정직한 감시자, 언론의 언론으로서의 역할을 강화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지지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 연재 순서 > (아래 제목을 클릭하면 해당 기사로 연결됩니다)

(01) 뉴스, 가격 없는 상품의 딜레마.
(02) 온라인 저널리즘이 불러온 재앙.
(03) 붕괴하는 광고 시장, 추락하는 저널리즘.
(04) 현장에 기자들이 없다.
(05) 퇴행적인 취재 시스템.
(06) 차별성 없는 콘텐츠.
(07) 신문시장의 구조적 위기.
(08) 방송의 통신 종속.
(09) 무늬만 뉴스 도매상, 연합뉴스.
(10) 뉴스 구독 행태의 변화.
(11) 콘텐츠 수익모델 다변화.
(12) 뉴스 다양성과 경쟁력 확보.
(13) 기자 재교육과 전문성 강화.
(14) 기자의 미래.
(15) 공영방송 제자리 찾기.
(16) 신문읽기 교육의 현재와 대안.
(17) 뉴스룸 쇄신, 조직의 동력을 바꿔라.
(18) 대안 언론의 등장과 주류 언론의 틈새 시장.
(19) 에버그린 콘텐츠를 찾아라.
(20) 저널리즘의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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