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벤져스2>가 모든 관객을 ‘흡입’하면서 1000만이라는 거대한 숫자를 헤아리고 있는 이 시점에서, 하루 고작 100명 조금 더 관람하거나 그럴 가능성이 농후한 영화를 소개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라고 먼저 자문해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은 명확하다. 소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영화이기에 반드시 소개해야 한다는 것. 단지 ‘소중한 의미’라는 추상적 용어를 사용하면 안 될 것 같다. 2015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를 가장 치열하게 다루고 있는 영화들.

오늘은 두 다큐를 소개한다. 아는 것처럼, 다큐는 픽션이 아니다. 때문에 다큐를 보는 것은 때로 고통스럽다. 대부분의 다큐에서 다루는 사건은 그리 반길 만한 것이 아니다. 많은 다큐는 현실을 고발한다. 권력의 폭력, 자본의 악행, 역사의 아픈 상처. 그뿐인가? 다큐 안에는 수많은 상처가 오롯이 녹아있다. 그래서 다큐를 보는 것은 불편하고 힘겹지만 그만큼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다큐의 맛에 빠져들면 허구인 극영화가 시시해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황윤 감독의 <잡식가족의 딜레마>는 우리가 먹는 식단을 점검한다. 꾸준히 환경 문제를 다루었던 이 뚝심 있는 감독이 이번에는 돼지 사육 문제를 마치 현미경으로 정밀하게 바라보듯이 관찰한다. 구제역 파동이 일던 때 감독은 우연히 살아있는 돼지를 집단적으로 폐사하는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하긴 멀쩡하게 살아있는 동물을 한꺼번에 매장하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지 않는다면 어디 정상적인 사람이겠는가?

   

▲ 영화 <잡식가족의 딜레마>와 <명령불복종 교사> 포스터

 

 

자칭 돈까스 매니아라는 감독은 이후 돼지 사육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우리가 가장 즐겨 먹는 돼지가 어떻게 길러질까? 어렵게 허가를 받은 ‘돼지 공장’은 말 그대로 돼지 ‘공장’이었다. 각자 칸막이가 있는 지독히도 좁은, 햇볕도 없는 공간에 돼지를 가둔 채 약물을 투입하고 유전자가 변형된 사료를 먹여 사육하다가 결국 죽이는 것. 모든 공정이 공장처럼 진행되는 이곳에서 돼지는 동물이 아니었다. 해서 감독은 99.9%의 돼지가 생산되는 공장이 아니라 0.1%의 방식으로 돼지를 기르는, 너무도 순박한 아저씨를 찾아간다. 영화의 대부분은 친환경적 공간에서 자라는 돼지를 보여준다. 분명 그렇게 돼지를 기를 수 있다.

이후 감독은 채식주의자가 되어버렸다. 돼지 공장에서 나오는 고기를 도저히 먹을 수 없어서. 감독의 물음은 간단하다. 우리 밥상에 올라오는 돼지를 어떻게 사육해야 하는가? 야생동물을 관리하고 치료하는 감독의 남편은 말한다. 지나치게 싼 가격에 돼지고기를 먹으려 하니까, 지옥 같은 공간에서 온갖 방법을 동원해 최대한 빨리 길러낼 수밖에 없다고. 그렇다. 우리가 ‘저질의’ 돼지를 먹어야만 하는 것은 제 값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그 지옥 같은 공간에서 돼지가 사육된다는 것을 알아버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역시 다큐를 보면 생각이 많아진다. 감독처럼 채식주의자가 될 수 없는 나 같은 인간은 돼지를 안 먹을 수도 없으니 걱정이 더 많아진다. 현명한 소비자가 되는 방법은 없을까? 친환경적이고 유기농적인 돼지를 믿고 구입할 수는 없을까? 그 길이 쉽게 보이지 않으니 답답하다. 인간이 다른 동물을 죽여서 그 시체를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괴로운 요즘이다. 이 다큐를 보면, 나무처럼 스스로 물을 빨아들여 영양분을 만들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황당한 생각마저 든다.

   

▲ 영화 <잡식가족의 딜레마> 스틸컷

 

 

<잡식가족의 딜레마>가 먹거리에 대한 고민을 담았다면, 서동일 감독의 <명령불복종 교사>는 교육 문제를 다룬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2008년 10월에 발생한 일제고사를 다루고 있다. 이 시험을 앞두고 일부 교사가 일제고사를 원치 않을 경우 체험학습을 선택할 수 있다는 편지를 학부모에게 보냈는데, 이 이유, 단지 시험 대신 체험학습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는 것 때문에 ‘국가공무원으로서 국가의 명령에 불복종했다는 이유’로 해임, 파면되었다. 성 추행이나 비리를 저지른 교사들이 고작 3개월 정직 같은 처벌을 받은 것에 비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중징계인 것.

이제부터 선생님들의 눈물겨운 이야기가 전개된다. 학교장, 교감, 동료 교사들은 이 선생님들에게 아예 학교에 오지 못하게 하거나 교실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해서 그 안타까움을 법에 호소하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닫힌 교문을 열며’ 다가서려 해도 이 사회는 받아주지 않는다. 심지어 교육청의 변호사는 재판장에서 교육공무원으로서 명령을 듣지 않으려면 그만두고 학원을 차리라고 친절하게 권하기도 한다. 이 미친 세상의 모습.

   

▲ 영화 <명령불복종 교사> 스틸컷

 

 

다큐는 현장에서 떠나지 못하는, 또는 떠나지 않으려는 선생님들의 마음을 전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이 영화는 두 가지 면에서 뜨겁게 가슴을 때렸다. 먼저 선생님들의 태도, 또는 교육자로서의 자세.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교육을 사명으로 여기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영화 속의 선생님들은 달랐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정말로 즐거운 분들. 그래서 이 선생님들이 파면되고 해임되었을 때, 학부모들이 나서서 선생님을 옹호하고 지켜주려 한다. 떠나라고 윽박지르고 학교에 못 들어오게 하는 학교와, 그 선생님을 지켜주려는 아이와 학부모와 선생님이 함께 하는 장면을 보면 눈물이 저절로 흐른다. 결국 선생님들은 복귀한다.  

둘째, 우리 교육이 정말 이래도 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한다. 일제고사로 아이들을 줄 세우는 것이 과연 올바른 교육인가? 그것도 초등학생을. 우등생도 긴장하면서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그 시험을 도대체 왜 치러야 하는가? 박근혜 정부에서 다시 일제고사를 부활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더욱 참담해진다. 근원적인 질문. 우리는 정말 아이들을 교육하고 있기는 한 것일까? 학원으로 아이들을 몰고 있으면서 학교에는 왜 보내는 것일까? 교사나 학부모나 모두 반성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 영화 <명령불복종 교사> 스틸컷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기본 조건은 음식과 교육이다. 전자는 생명을 유지하게 만들고, 후자는 영장동물로 성장하게 만든다. 때문에 인간에게 두 요소가 결핍되면 더 이상 인간이 될 수 없다. 슬프게도 이것은 문학적 수사가 아니라 ‘사실적 서술’이다. 두 다큐는 치열하게 살아가는 인물들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믿을 수 있는 먹거리가 없고, 아이들을 인간으로 교육을 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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