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여름, 거제 시청 앞에서 독극물을 들이킨 이씨 할머니의 소식이 전해졌다. 할머니의 유서에는 ‘살아가기 힘든데 기초생활 지원금 지급이 중단된 게 원망스럽다’, ‘법이 사람을 위해 있어야 하는데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말이 쓰여 있었다.

도대체 무슨 법이 할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일까. 할머니는 기초생활수급자였으나 사위의 소득증가로 수급에서 떨어졌다. 기초생활보장제도는 모든 국민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부양의무자가 있을 때에는 부양의무자가 그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고 있다.

할머니는 사위에게 부양받을 수 없음을 수차례 읍소했지만 ‘법이 그래서 어쩔 수 없어요’라는 완곡한 거절을 들었을 것이다. 수급에서 탈락한 뒤 혼자 사는 셋방 월세조차 밀렸던 할머니는 결국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이들은 한둘이 아니다. 부양의무자기준 때문에 생긴 비극은 수 없이 반복되어 왔다.

할머니의 죽음 이후 빈곤사회연대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비롯한 빈민, 장애인단체는 서울의 한복판, 광화문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등급으로 장애인의 복지를 제한하는 장애등급제, 가족의 책임으로 복지를 떠넘기는 부양의무제는 장애인과 가난한 이들의 삶을 억압하는 ‘족쇄’임을 선언하고, 이 두 가지를 폐지하는 싸움을 시작했다. 청와대와 경복궁, 광화문으로부터 숭례문으로 이어지는 서울의 동맥 세종로 한복판에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장애인, 빈민들의 작은 거처가 생겼다.

이르면 총선, 아니면 대선을 경유하며 이뤄질 것 같았던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 폐지’라는 소망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대통령의 약속은 전혀 이행되지 않고 있고, 우리는 여전히 광화문을 떠나지 못한다. 다가오는 2015년 5월 17일이면 이 농성장은 1000일을 맞는다. 1000일, 3년의 가까운 시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우리는 광화문 농성장을 지켰다.

광화문에서 농성을 하며 가장 많이 떠올린 얼굴은 나와는 생전 아무런 면식이 없는 ‘최옥란’이라는 한 사람이다. 최옥란 열사는 장애인이고 기초생활수급자였으며 여성이었다. 도시에 사는 빈민으로 기초생활수급자가 되기 전에는 청계천에서 작은 좌판을 여는 노점상이기도 했다. 2000년 12월, 명동성당에서 ‘기초생활보장제도를 제대로 만들어 달라’며 본인의 한 달 기초생활급여 28만원을 국무총리에게 반납하고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했다.

   

▲ 최옥란씨(오른쪽). 사진=빈곤사회연대 제공

 

 

시행된 지 1년 만에 제도 개정을 요구했던 최옥란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는 못했지만 가난한 이들의 삶을 날카롭게 고발했다. 낮은 수준의 최저생계비가 옥죄는 일상, 더 나은 삶을 꿈꿀 수 없게 만드는 복잡하고 강경한 수급자 자격 요건, 현실과는 동떨어진 수많은 행정 규칙 등 최옥란이 맞닥뜨린 높은 장벽은 14년이 지난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생에 대한 강력한 의지로 사회에 나오고 투쟁했던 최옥란은 농성을 마친 다음 해 3월, 37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수 없이 겪어야 했던 좌절이 그녀를 결국 집어삼킨 듯 했다. 마치 그녀의 투쟁과 죽음을 보듯 지난 3년간 농성장에는 영정사진이 빼곡하게 들어섰다. 활동보조인이 없는 시간 화재를 피하지 못한 고 김주영님, 고 송국현님. 장애등급 탈락에 이은 수급탈락을 염려하다 죽음을 선택한 고 박진영님. 엄마아빠가 직장을 찾으러 나간 사이 아이들만 남아 있던 집에 불이나 목숨을 잃은 파주남매 지우, 지훈이. 호흡기가 빠졌지만 이를 바로잡아 줄 한 사람이 없었던 고 오지석님. 죽음이 얼마나 우리와 가까운지를 실감하는 매일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옥란은 2001년 12월 명동성당에서 농성에 돌입하며 이런 글을 썼다. “비록 지금은 저 혼자 텐트 농성을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저와 함께하리라는 믿음으로 시작합니다. 저와 같은 사람들이 분명 많을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흔히 빈곤층을 ‘취약계층’이라고 한다. 광화문 농성장까지 오기 위해 오지 않는 저상버스를 기다리고, 장애인 콜택시를 기다리고, 가난한 지갑을 털어 지하철을 타고, 광화문 근처 밥값이 너무 비싸 맛있는 가게들을 옆에 두고도 삼각김밥으로 점심을 때워야했던 우리는 확실히 취약했다. 광화문 농성장을 알리기 위한 유인물을 만들 때에도 얼마의 돈이 들지 수없이 계산해야 했고, 미안한 마음을 애써 숨기며 뻔뻔한 얼굴로 지인들에게 후원을 요청하고 티셔츠를 강매했다. 이런 정성이 모인 농성장이 성과없이 끝나면 어떡하나, 불안함과 죄책감을 갖는 것마저 스스로의 몫이었다.

   

▲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

 

1000일을 이어온 광화문 농성이 누군가에게는 지루하고 ‘너무 우직한’ 일일 수 있다. 투입 대비 산출을 매 순간 고민해야하는 ‘효율’이 최고의 가치인 사회에서 이렇게 비효율적인 일이 또 있을까. 변화를 요구하는 좀 더 혁신적이고 세련된 방법이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광화문을 지키고 있다.

서명을 요청하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들, 분홍종이배를 한 장 한 장 접는 손길이 1000일의 시간을 지나며 단단해졌다.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이 기적같은 사람들이 꾸역꾸역 광화문의 1000일을 채워왔다. 최옥란 열사가 이야기했듯, 그녀와 같은 사람들은 분명 많았다. 그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그녀의 바람이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폐지 공동행동>과 함께 광화문에서 이뤄지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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