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1주년 집회에서 태극기를 태운 청년을 단독 인터뷰했다. 인터뷰가 나간 뒤에 적지 않은 언론에서 청년과 인터뷰하고 싶다며 나에게 청년의 휴대전화 번호를 물었다. 하지만 나는 청년의 휴대전화 연락처를 알지 못했고, 그러니 알려주고 싶어도 알려줄 수 없었다. 청년이 인터뷰할 언론을 선택하긴 했으나 그와의 인터뷰는 제3자의 주선으로 가능했다.

미디어오늘 기사로도 이 사연이 짧게 소개됐지만, 취재원(인터뷰이) 연락처를 확보하지 않은 건 의도적이었다. 여당 의원(김진태)이 법무부장관에게 “태극기 불태운 (세월호) 시위대”라는 헤드라인과 청년의 사진이 보이는 조선일보를 손에 쥔 채 태극기 불태운 자를 어떻게 하겠냐고 따지고 이에 법무부장관이 수사하겠다고 답했던 ‘그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도 수사를 공언한 상태였다.

소위 ‘일등신문’과 여당 의원 그리고 법무부장관과 경찰이 나서 무죄추정의 원칙에 반하는 재판 전 ‘유죄’ 확정의 태도를 보이자 더욱 취재원 비닉권(취재원을 숨길 권리)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인터뷰를 발행한 뒤에 당연히 경찰에서 수사협조 요청이 올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경찰에서는 연락이 오지 않은 상태다.

나는 ‘태극기 소각’ 사건 자체에 대해선 큰 감흥이 없는 편이다. 인터뷰를 통해 어느 정도 객관적 실체가 밝혀졌다고 본다. 그저 한 평범한 청년의 울분이 빚은 우발적 해프닝이라 생각한다. 적어도 일등신문에서 1면 헤드라인으로 ‘오보’를 낼 만큼 흥분할 사건은 전혀 아니다.

   

▲ 4월 20일자 조선일보 1면

 

 

“태극기 불태운 세월호 시위대”라는 조선일보 1면 헤드라인이 오보인 이유는 더 없이 단순하다. ‘시위대’(복수)는 태극기를 태우지 않았다. 그저 집회에 참석한 한 명의 청년(단수)이 경찰의 과잉 진압 등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우연히 현장에 있던 종이 태극기를 주워 태웠다. 조선일보의 해당 기사 어디에도 그 청년이 세월호 집회 참석자를 대표하고 있음을 객관적으로 뒷받침하는 구절은 없다. 더불어 청년이 왜 태극기를 태웠는지에 관해선 아예 관심이 없다. 그토록 중대한 사건이라면서 ‘왜’가 빠졌다.

물론 청년의 행위에 담긴 진의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청년 자신뿐이다. 다만 우리는 그 진의를 추출할 뿐이다.

청년이 외부로 표현한 행위를 통해 그 ‘내심상의 의사’(고의와 목적)를 해석할 따름이다. 많은 언론에서 태극기 태운 청년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왜 태웠는지, 어떻게 태웠는지는 묻지 않았다. 성급하게 세월호 시위대와 태극기 소각의 ‘불순한 의도’를 단정해 연결지었고 마치 있을 수 없는 역적과 패륜을 저지른 것으로 기정사실화했다.

죄가 있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수사하고 그 행위를 벌주기 위한 역할을 맡은 건 언론이 아니라 경찰과 검찰 그리고 법원이다. 더불어 권력기관인 검찰에 대한 ‘민의 지배’를 상징하는 법무부장관은 좀 더 신중하게 형사법의 대원칙, 무죄추정의 원칙을 거듭 되새겼어야 한다. 그리고 언론은 ‘그림 나온다’는 이유로 청년의 행위를 성급하게 단죄하기 전에 ‘왜, 어떻게’를 물어야 한다. ‘왜, 어떻게’라는 맥락이 사라지면 결국 남는 건 그저 관심법과 성급한 단정뿐이다. 사리사욕과 정파적 이익을 고려한 아전인수 해석뿐이다.

조선일보는 슬로우뉴스 인터뷰가 나간 직후 인터뷰 내용을 ‘우라까이’하면서 “인터넷 좌파 매체”로 슬로우뉴스를 호명했다.

대한민국에 사과하지 않았다고, 그리고 신원을 밝히지 않았다고 태극기 태운 청년을 꾸짖는 그 조선일보의 기사는 두 가지 점에서 인상적이다. 우선 신원을 밝힐 어떤 이유도 없는 청년의 신원을 밝히라고 요구한다. 언론의 역할을 넘어 경찰이 되는 것도 모자라 헌법마저 무시하는 처사다.

   

▲ 민노씨 슬로우뉴스 편집장

 

 

슬로우뉴스를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진보와 보수도 아닌 ‘좌파 인터넷 매체’로 호명했다. 사건과 전혀 무관한 명명임을 따로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언론 인터뷰에서 신원을 밝혀야 할 어떠한 이유도 없는 청년에게 신원을 밝히라며 경찰 놀이하는 언론, 사건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독자의 편견을 부추기고자 ‘인터넷 좌파매체’라는 자의적인 호명을 일삼는 언론, 그런 언론을 부를 수 있는 표현, 그런 이름은 내가 알기론 단 하나다.

삼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삼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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