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두려운 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을 때 ‘가족관계가 어떻게 돼?’라는 질문이에요. 동생이 있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나이를 물어볼 텐데. 나는 계속 나이가 들어가는데 내 동생은 계속 17살이에요. 사람들이 ‘나이차가 왜 이렇게 많이 나?’ 그러면 나는 뭐라고 답해야하죠? 그런 게 무서워요.”

서현씨(23)씨는 지난해 동생을 잃었다. 단원고 2학년 2반 남지현 학생이다. 동생은 작년도 올해도 17살에 멈춰있다. 멈춰있는 건 동생의 나이만이 아니다. 서현씨는 자신의 시간이, 엄마아빠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른다. 그는 CBS라디오 인터뷰에서 “1년이 지났는데 제 체감상 지금이 한 (2014년) 5월쯤 된 것 같거든요. 사실 기억이 잘 안 나요”라고 말했다. 

기억나는 건 장면 장면이다. 전원구조 오보, 단원고에서의 비명들, 팽목항에서 쓰러지던 사람들, 기자들에 둘러싸여 지나가던 대통령, 동생이 나오던 날의 화창한 날씨, 단원고 책상 위에 놓인 무수한 국화다발들…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매일 밤 울면서 잠드는 거? 언제쯤이면 안 울고 잠들 수 있을까요.” 지난 4일 안산 고잔동에 위치한 형제자매 공간 ‘우리 함께’에서 서현씨를 만났다. 

“인터뷰를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는 게 언론이 할 일인데 지금은 우리가 ‘있는 그대로 보도해달라’고 부탁을 해야하니까요. 사실 1주기 맞춰서 쉴 새 없이 인터뷰를 했어요. 그런데 슬픈 기사들만 나가고 16일이 지나니까 정말 뚝 끊기더라고요. 지금 중요한 건 슬퍼하는 게 아닌데.” 서현씨의 지난 1년은 언론에 대한 불신을 확인하고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 지난 4일 안산 고잔동에 위치한 형제자매 공간 ‘우리 함께’에서 남서현씨를 만났다. 사진=이하늬 기자

 

 

“돈 걱정 없지 않냐고요? 우리는 지옥이에요”

사고 첫날부터 그랬다. 서현씨는 단원고로 갔다. 엄마는 동생을 데리러 진도로 내려갔다. “구조된 애들은 이름에 형광펜으로 표시가 됐어요. 체육관에서 대형스크린으로 뉴스를 보면서 형광펜이 쳐지기를 기다렸어요. 처음에는 전원구조라고 하다가 잠시 뒤 뉴스 속보가 떴어요. ‘전원 구조 오보, 대부분 배 안에 있는 것으로 추정’ 그게 뜨는 순간 체육관에 있는 사람들이 다 악 소리를 질렀어요. 그 오열소리들, 잊히지가 않아요.“

진도에서 만난 언론의 민낯은 가관이었다. 다짜고짜 마이크를 들이대는 배려 없는 취재도 문제였지만 남일 보듯이 했다는 게 서현씨 생각이다. “첫 날 언론사 차 때문에 구급차가 팽목항으로 못들어왔어요. 가족들이 항의를 했지만 언론사들은 못들은 척하고 차를 빼지 않았어요.”

대통령이 진도체육관을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대통령한테 할 말이 너무 많고 대통령의 입장을 듣고 싶은데 기자들은 그저 대통령 얼굴 찍는 거에 바빠서 그런 걸 다 무시했어요. 기자들이 대통령을 다 둘러싸고 있어서 제발 기자분들 앉아달라고 앉아달라고 소리를 질렀죠. 가족들을 만나러 온 건지 기자들을 만나러 온 건지. 대통령이 체육관 가운데를 걸어갈 때는 얼굴도 못봤어요.” 

1년이 지났지만 서현씨가 느끼는 언론은 그때와 다르지 않다. 1년간 아무런 단체행동을 하지 않던 형제자매들이 지난달 5일 나선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당시 이들은 정부 시행령 발표에 대해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정부는 시행령을 발표하고 나흘 뒤인 4월 1일 배·보상 기준 발표했다. 사망한 단원고 학생들이 1인당 8억2000만원을 보상금으로 받는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그때 우리는 지옥이었는데 주변에서는 기사만 보고 ‘이제 돈 걱정은 없지 않냐’ 그런 말을 해요. 부모님께 돈 빌려달라는 연락도 오고 그래요.” 하지만 서현씨 가족은 여행자 보험금 1억 원도 받지 않았다. 보험금을 수령하려면 사망신고를 해야한다. “대체 어느 부모가 사망신고를 하고 싶겠어요? 시행령이 뭐가 문제인지 알려주는 기사는 없는데 가족들이 8억 받는다는 기사가 넘쳐났어요. 시행령은 완전히 묻혔어요.”

 

   

▲ 지난해 4월 21일 mbc취재진이 시신을 싣고 출발하려는 유가족을 붙들고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이치열 기자

 

 

“꿈도 학업도 친구도 잃었는데 슬프지가 않아요”

동생은 사고 8일째인 23일에 나왔다. 유난히 화창한 날이었다. 수습 작업에 속도가 붙었다. 그날 가장 많은 아이들이 수습됐다. 엄마 아빠는 “오늘은 팽목항에 나가봐야겠다”며 팽목항으로 갔고 서현씨는 언니와 함께 진도체육관에서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스크린에는 수습된 희생자들의 인상착의가 뜬다. 146번. 회색바지. 양쪽에 덧니. 검은색 시계. 소원팔찌. 맨발로 상황실로 뛰어갔다. 동생임을 확인한 서현씨는 바닥에 머리를 박고 울었다. 

장례를 치르고 가족들은 집으로 돌아왔다. 동생 방은 부엌 옆이다. 방문 바로 옆에는 정수기가 있다. 서현씨는 밤에 물을 마실 때면 동생이 잘 자는지 확인하곤 했다. “어느 날 밤에 물을 마시다가 갑자기 혹시 이 모든게 꿈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거에요. 지현이 방문을 한번 열어볼까? 지현이가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방문을 열었는데 지현이가 없는거에요. 내 동생이 없는 거, 이게 정말 현실인거에요.”

사고 이후 서현씨는 막연한 공포를 느낀다. 가족 모두 불면의 밤을 보냈다. 한 동안 가족들은 한 방에 모여 잤다. 매일 새벽 3시가 넘어야 잠들었고 새벽 5시면 잠에서 깨 지현이 영정이 모셔진 합동분향소로 향했다. 서현씨는 갈 때마다 오열했다. 그렇게 한 달을 보냈다. 서현씨는 사고 이후 6개월가량 외출도 거의 하지 못했다. 1년쯤 지나니 사람들은 서현씨의 졸업, 직장, 인간관계에 대해 염려한다. 

“이전에는 꿈, 학업, 친구, 남자친구에 대해 소중하게 생각했는데 4월 16일에 동생을 잃고 저는 제 모든 것을 잃었어요. 저한테는 남은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슬픔이 느껴지지 않아요. 예전에는 취업이 안 되면 초조했을 텐데 이제는 그런 게 없어요. 왜인지 아세요? 그런 건 다 2순위라서. 제가 지금 분향소나 단원고에 더 자주 못가면 나중에 후회할 거 같아요. 그건 언젠가 없어지잖아요.” 

 

   

▲ 지난 4일 안산 고잔동에 위치한 형제자매 공간 ‘우리 함께’에서 남서현씨를 만났다. 사진=이하늬 기자

 

 

“마음 아파하는 것보다 왜 우리가 이러는지 알아주세요”

서현씨처럼 지내는 단원고 희생자 형제자매는 안산에만 168명이다. 서현씨는 이 숫자가 무섭다. “저처럼 이렇게 지내는 사람이 이 동네에만 200명 가까이 있다는 거잖아요.” 이들은 지난 해 가을까지만 해도 서로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연락할 방법도 몰랐다. 그러다 지난 해 11월께 ‘우리 함께’라는 공간이 생겼다. 세월호 형제자매들을 돕는 사회복지네트워크다. 이제 형제자매들은 이곳에서 모인다. 서현씨가 외출을 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사람들을 만나면 웃으면 웃는다고 뭐라고 하고 울면 분위기가 다운돼요. 여기서는 그게 아무런 문제가 안 돼요. 웃으면 웃을 수도 있고 갑자기 화를 내도 다들 이해를 해요. 어느 날 갑자기 잠수를 타도 내버려둬요. 죽음이라는 게 어느 순간순간 훅 들어와요. 가령 물을 마시다가 갑자기 생각나서 펑펑 울어요. 우리는 서로 이해할 수 있어요. 똑같은 아픔을 진도에서부터 지금까지 느끼는거니까.” 

이들은 이 싸움이 길어지리라는 걸 안다. 서현씨는 처음에는 지난달 5일 형제자매 기자회견만 끝나면 마음이 후련해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기자회견을 했던 날 서현씨는 밤새 울었다. “이걸 언제까지 해야하지? 한 산을 넘으면 또 산이 있어요. 부모님들은 진상규명을 위해 싸우지만 그게 끝난다면 형제자매들은 제대로 기억하기 위한 싸움을 시작해야 해요. 이건 저희의 몫이에요.”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알아야 한다. ‘세월호를 기록하다’ 저자 오준호 작가는 “시간이 지나면 팩트가 조금씩 망가지고 재구성되기 시작할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래서 서현씨가 또래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도 ‘제대로 알아달라’다. “마음 아파하는 건 이제 끝났다고 생각해요. 왜 우리가 이러는지 알아주세요. 모르기 때문에 행동으로 안 가는 것 같아요. 제가 친구들한테 서운한 것도 그런거에요. ‘슬프지?’라는 말 대신 같이 행동해줬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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