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에서 이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으면, 고리타분하거나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대학교수나 비즈니스맨, 공무원, 연구원 그리고 정치지도자를 막론하고 이 단어쯤은 당연히 써주는 것이 기본 소양이라도 되는 듯 싶었다. 바로 그 단어가 마케팅이었다. 대학교수라도 경영학 전공자나 쓸법한 이 단어는 인문학과 이공계학과를 불문하고 입에 올리지 않는 곳이 없다. 상품이나 서비스에만 한정되었던 마케팅이라는 단어는 이제 개인을 널리 알리는 데도 쓰인다. 그 맥락이야 이해할 수 있지만 마케팅의 본질은 없고, 그 마케팅의 효과를 과잉 포장하는 담론만 넘치고 있다. 마케팅에 대한 주목은 콘텐츠 자체에 대한 가치가 널리 알려지지 않을 때 드러나는 문제점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일어났다. 즉, 마케팅의 전제 조건은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마케팅과 꼭 붙어 다니는 단어가 있는데, 브랜드라는 말이다. 브랜드도 상품이나 서비스에 붙어 다녔는데 이제 개인의 이름도 브랜드라는 단어로 대치되었다. 마케팅을 하는 이유는 바로 브랜드를 위해서이다. 개인의 사회적 확장이라는 점 때문에 이제 국가 브랜드라는 말도 아무렇지않게 쓴다. 글로벌 시대라는 어구가 매번 이런 논리에 등장하는 이유이다. 이 브랜드라는 말도 전제되어야 할 요건도  바로 얼마나 좋은가이다. 좋음에 대한 신뢰성이 바로 브랜드로 연결되는 것이다. 사람 개인이 좋아야 하는 것은 물론 국가가 얼마나 해당 이름과 마케팅에 부합하는가가 사전에 갖춰져야 한다.

영화 '어벤져스'의 국내 촬영 사례는 바로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마케팅과 브랜드 담론의 그늘이었다. 그것은 독식과 독재 그리고 독약의 순환 고리를 강화 하거나 합리화 했고, 영화를 포함한 문화 콘텐츠의 본질적인 마케팅을 훼손하고 브랜드에 악영향을 주기에 충분했다. 2014년 이 영화의 촬영에서 보인 정부와 공공기관의 태도는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듯 보였다. 대형 블록버스터 영화의 촬영 유치를 자랑했다. 영화는 이제 웃고 즐기는 대상이 아니라 국가를 알리는 마케팅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 영화가 비록 오락영화라고 가볍게 무시할 일이 아니라는 인식을 보여주는 듯했다. 고급문화와 저급문화의 이분법적인 구분은 낡은 사고라는 생각이 담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영화라면 가치가 있다는 팝 컬쳐의 기호를 대변하는 듯 했다. 물론 이러한 언행의 이면에는 '어벤져스'에 대한 경제적인 수익 논리가 작용했다. 세계적인 흥행작이기 때문에 영화 ‘어벤져스’에 한국의 도시 곳곳이 등장하면, 세계 여러나라 사람들이 한국을 인식하게 되고 그것이 관광유발 효과로 이어진다고 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어 보였다. 단 이를 위해 할리우드 영화 제작사에 전권을 주어야 했다. 시민들은 2주간 출퇴근 시간에도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그 불편에도 영화가 어떻게 나오는지 전혀 몰라도 되었다. 뉴질랜드처럼 도시 공간이 아니라 자연환경 속에서 별도로 촬영이 이뤄지는 것은 생각도 미처 못한 채, 프로도 효과에 포위되어 버렸다.

   
▲ 영화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 포스터
 

그 효과에 대해서는 복잡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어벤져스'는 오락액션 영화였다. 그것도 만화 캐릭터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키덜드 시네마였다. 한계는 명확했다. 이런 영화를 많이 찍은 나라들도 많지만, 관광 대국이 되었다거나 국가브랜드가 좋아졌다는 말은 생소하다. 일단 단지 존재를 인식시키는 것과 호감에 이어 관광행위로 이어지는 것은 별개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바란다면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영화이거나, 그 장소에 가야할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관광유발 정책에서 정말 우선해야 하는 것은 영화에 등장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실체와 본질일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 첨단 IT국가의 이미지를 구축한다고 해도 그에 부합하지 못한다면, 설령 있을 수 있는 호감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첨단 IT국가는 몇 개의 장면으로 형성될 일도 아니라는 점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첨단 IT국가의 이미지는 한국의 정책 당국자가 바라는 것이었지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바람과는 거리가 있었다. 때문에 만족스럽게 영화속에 그러진다고해도 수용자들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근본적으로 영화 '어벤져스'는 한국에 대해 긍정적인 컨셉이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다뤄 줄 수 없는 한계를 이미 갖추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는 23개 국가 이상이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특정 국가만 특별하게 다뤄줄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애초에 그런 요구를 하는 것도 바람직할 수 없었다. 또한 영화 자체의 스토리와 컨셉을 생각했을 때, 특정 국가를 위해 확 바꿀 수는 없는 것이며, 이는 영화 '트랜스 포머'의 사례처럼 흥행 실패를 낳을 수 있다. 중국의 자본을 의식한 제작진이 인위적으로 스토리 라인이나 장면을 재구성한 탓에 '트랜스포머'는  작년에 역대 최저의 평가를 받았다.

그럼 해외 영화 촬영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야 하는 것일까. 대형 흥행 영화중심의 지원체제는 전면 수정되어야 한다. 오히려 그에 들어가는 직간접 비용으로 독립 영화나 저예산 영화를 지원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번에 한국 정부가 대대적으로 시민불편을 감수하며 지원한 ‘어벤져스’는 다른 소수 영화, 저예산 영화 뿐만이 아니라 한국 영화 스크린이나 상영비율을 모두 잠식했다. 극장들은 세계적인 흥행작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독점은 이미 불보듯했는데, 경제적 수익논리를 내세우며 세계홍보를 위해 쌍수를 들고 나선 것은 과도한 행위였다. 영화진흥위원회는 한국 영화를 진흥하는 곳이지만, 결과적으로 '어벤져스'같은 해외 할리우드 영화의 흥행을 더 증폭시켜준 역할을 한 셈이 되었다. 독립, 저예산 영화가 아무리 한국을 좋게 그려주어도 이 정도 배려를 해줄리 만무해보였다. 이는 영화진흥위원회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정부 정책의 근본적인 성격과 역할에 대한 재인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자동적으로 알아서 작동하는 상품과 서비스에 정책이 개입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로인한 부작용을 줄이고 전체적인 균형과 형평의 조율이 정책의 역할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벤져스'에 대대적인 조치를 취하고, 그것에 대해서 홍보효과를 도출하려한 당국들의 행위는 공공 정책의 근본을 저버린 것이었다. 또한 대형 상업영화에 적극적인 나라에 대해 정말 소중한 브랜드 가치를 가질 문화애호가들이 얼마나 될까 의문스럽다.

   
▲ 영화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 스틸컷
 

다시 처음이 꺼냈던 마케팅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마케팅이 전혀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전제조건은 좋은 콘텐츠이다. 당연히 잘 알려야 바람직하다. 대한민국에서 좋은 콘텐츠를 알리는 일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콘텐츠가 마땅하지 않는데 이를 애써 꾸미는 것은 결과는 바람지 않을 것이다 애써 겉으로 포장하는 영화 이미지는 실망감으로 돌아온다. 한류의 한계는 이런 점에서 드러나고 있다. 가수와 드라마로 비롯한 한국 선호 현상은 직접 방문이 늘어나면서 오히려 실망감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체가 충실한 것이 아니 것은 자명한데, 이미지만 과잉인 한류가 우려스러운 일이다. 진정 브랜드를 좋게 구축하려면, 컨텐츠의 컨셉을 확실하게 잡는 일부터 해야 한다. 그것은 수용자들이 원하는 것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케터의 욕구만 강요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런 강요가 긍정적인 결과를 낼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좋은 콘텐츠와 컨셉은 어떻게 알 수 있고, 선택할 수 있을까. 그게 정말 가능할까. 정답이 있다고 말한다면 사기꾼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것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것을 정책 당국자들이 판단하는 것은 더욱 알 수가 없다. 문화예술만큼 다양하게 변화 무쌍한 것도 없다. ‘어벤져스’ 사례에서 처음부터 잘못된 것은 결과에 대한 확신이었다. 이 영화만 찍으면 엄청난 효과가 있다는 판단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대박에 대한 몽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정답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정답이 있다면, 그것은 다양한 창작자들에게 문을 여는 것이다. 다양한 창작곡으로 해답이 수용자들과 상호소통하는 과정에서 찾아질 것이다. 그것이 작은 영화나 무명의 작품이라고 해도 다양하게 지원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다양성의 보장은 수익의 논리나 선택과 집중의 논리의 반대쪽에 있다. 하지만 그것이 답을 찾아가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한 창작과정에서 여러 논의를 통해 콘텐츠의 내용은 물론 컨셉을 다채롭게 접근하게 될 것이다. 공간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는 스토리와 주제, 메시지들을 통해 한국의 팬을 늘려가는 수순을 밟아가야 한다. '어벤져스'는 한국에 대한 팬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어벤져스'의 팬을 늘릴 뿐이었음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자본을 좇으면 그 자본의 논리에 공간이 종속된다. 종속된 공간은 그 자체가 정체성을 갖기 힘들다. 공간에 맞는 컨셉과 스토리를 쫓고 그에 부합하는 창작 환경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이 정책이 해야할 일이다. 오로지 하나의 답을 강요하는 것은 분명하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워 보여도 다양성을 찾는 것이 오답으로 보여도 답을 찾는 길이다. 대형흥행작을 중심으로 한 지원이 정답같지만 오답인 이유이며, 보잘것없는 저예산 영화들이 정답이 될 수 있는 이유다. 특히 서브 컬쳐는 현재의 주인공은 아니어도 미래의 주인공이기도 하니 더욱 그렇다. 정책이 할 일은 바로 서브 컬쳐의 진작임을 모르는 이들은 없는 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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