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노무현’이다. 성완종 리스트로 촉발된 ‘박근혜 대통령 불법대선자금 수수 의혹’에 대한 정부여당, 그리고 보수언론의 해법은 노무현이었다. 성완종 리스트로 궁지에 몰린 정부여당은 이완구 총리의 사퇴로 꼬리가 잘려나가자 ‘노무현’으로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성완종 리스트 파문이 커지던 지난 15일 “부정부패의 책임이 있는 사람은 누구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완구 전 국무총리가 국회 대정부질의에서 반복되는 말 바꾸기로 비난에 휩싸이던 상황이었다. 이 전 총리는 15일 대정부질의에서 “대단히 복잡하고 광범위한 수사가 될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광범위한 수사’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금방 밝혀졌다. 조선일보는 17일자 1면 기사에서 검찰이 여야 유력 정치인 14명에게 불법 자금을 제공한 내역을 담은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전 새누리당 의원)의 로비 장부를 확보했다고 보도했다. 해당 의원들은 반발했다. 언론보도를 통해 불법 금품수수와 합법적인 후원금 등이 구별되지 않은 채 여야 정치인들의 이름이 마구잡이로 거론됐다. 

   
▲ 4월 17일자 조선일보 1면
 

황교안 법무부장관은 20일 국회 기관보고에 출석해 “정치권에서 오가는 불법정치자금 전반에 대해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수사 확대 의지를 밝혔다. 

‘야당도 대선 자금 수사’를 받아야한다는 식으로 막연하게 진행되던 새누리당의 공세는 ‘특별사면 논란’으로 초점이 맞춰졌다.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23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당 지도부 차원에서 (특사 논란에 대해) 국정조사를 요구하는 것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정현 최고위원도 같은 자리에서 ‘국회 법사위 차원의 청문회와 국정조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새누리당 지도부의 재보선 유세현장에서도 특사 논란이 부각됐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26일 성남 중원 지원 유세에서 “(성 회장의) 특사를 누가 시켰는지 국민 앞에 밝히라”고 말했다. 김무성 대표는 앞서 25일 성남 중원 유세에서 “국가 내란을 기도했던 이석기 전 의원을 왜 노 전 대통령이 사면했는가를 당시 민정수석이었던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국민 앞에 낱낱이 밝혀야 한다”며 옛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까지 꺼내들었다. 

새누리당은 전·현직 비서실장을 무대로 끌어올리려는 야당의 요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야당은 23일 국회 운영위원회 개최와 청와대 비서실장 출석을 요구했으나 새누리당 의원들의 불참으로 운영위는 무산됐다. 야당은 이병기 현 비서실장 및 김기춘·허태열 전 비서실장의 출석을 요구했다. 박근혜 대통령과 직접 연관된 성완종 리스트 속 3명의 전·현직 비서실장 감추기에 나선 것이다.

   
▲ 이완구 국무총리가 이임식을 하기 위해 27일 오후 정부서울청사로 들어서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 오후 이완구 총리의 사표를 전격 수리했다. ⓒ연합뉴스
 

새누리당의 의혹제기에 새정치연합이 “MB 인수위가 사면을 요청했다”고 반박에 나서면서 성완종 리스트를 둘러싼 논란은 어느새 정쟁이 됐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26일 “퇴임하는 (노무현) 대통령이 후임 (이명박) 대통령 측을 정치적으로 배려한 사면으로 참여정부 청와대엔 더러운 돈을 받고 사면을 다룬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 반박했다.

급기야 대통령까지 가세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28일 김성우 홍보수석을 대독해 발표한 대국민 메시지를 통해 “고 성완종 씨에 대한 연이은 사면은 국민도 납득하기 어렵고 법치의 훼손과 궁극적으로 나라 경제도 어지럽히면서 결국 오늘날같이 있어서는 안 될 일들이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어주게 되었다”고 말했다. 성완종 리스트에 측근들이 오른 것을 사과하라는 야당의 요구에 정면으로 대응한 셈이다. 

보수언론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이완구 총리가 난타를 당하던 대정부질의(13일-15일) 때부터 조중동 등 보수언론은 노무현을 부르짖기 시작했다. 동아일보는 13일 “2007년 12월 당시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특별사면이 결정되기 직전 경남기업 관련 계좌에서 5000만~1억 원의 뭉칫돈이 빠져나간 정황”을 검찰이 포착했다며 노무현과 경남기업을 엮기 시작했다.

동아일보는 같은 날 사설에서 “검찰은 해외 자원개발 비리 수사 중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 12월 성 회장이 ‘행담도 개발 비리 사건’으로 두 번째 특별사면을 받기 전에 경남기업 관련 계좌에서 뭉칫돈이 빠져나간 사실을 포착했다”며 “성 회장이 사면을 예상한 듯 항소를 포기한 것을 보면 노 정부의 핵심 인사들에게 로비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조선일보는 14일 5면 기사 <“문재인, 노 정부 때 성완종 2번 특사 해명해야”>에서도 여권과 야권 탈당파 인사들의 입을 통해 성 전 회장이 참여정부에서 두 차례 사면을 받은 것에 대해 문재인 대표가 해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날 사설에서도 “비리 기업인이 한 정권에서 두 번이나 특사를 받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라고 밝혔다.

   
▲ 4월 14일자 조선일보 5면
 

새누리당에 의해 특사 논란이 커지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문제제기가 이어졌다. 중앙일보는 28일 사설에서 “보통사람들에겐 하늘의 별 따기인 특별사면을 성 전 회장이 같은 정권에서 두 차례나 받았다는 건 아무래도 정상적인 일은 아니다”며 “당시 사면에 직·간접으로 관여한 사람들이 나서 스스로 진상을 밝히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현 정권의 실세들이 연루됐다는 ‘성완종 8인 리스트’의 진실을 캐는 작업도 탄력을 받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이 성완종 리스트가 공개된 4월 10일부터 20일까지 5개 신문(조선·중앙·동아·한겨레·경향)의 성완종 리스트 관련 보도를 분석한 결과 이완구 전 총리 관련 기사가  24.09%(153건)로 가장 많았고, 노무현 대통령 특별사면과 야당 책임론 관련한 기사가 6.77%(43건)로 뒤를 이었다. 박 대통령 불법 대선자금 관련한 보도는 4.72%(30건) 뿐이었다. 조선일보의 경우 박 대통령 불법 대선자금에 초점을 맞춘 기사가 1.27%(2건)에 그쳤다. 언론이 정부여당을 도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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