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는 무조건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이하 <어벤져스>)에 관해 써야 한다. 아니, 쓰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를 빼면 극장에 영화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지난 4월 23일 개봉한 이 영화는 주말을 지나면서 무려 344만 명의 관객을 모았다. 유례가 없는 관객의 ‘폭풍 흡입’인 것이다. <인터스텔라>나 <아바타>가 개봉 8일이나 9일만에 관객 300만 명을 돌파한 것과 비교하면,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아직 중고교의 중간 고사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초등학생인 둘째 아들은 이 영화를 관람했지만 이번 주가 중간 고사 기간인 큰 아들은 주말을 단단히 벼르고 있다. 아마 대부분의 중고교가 비슷한 상황일 것. 이번 주말이 지나면 가뿐히 700만 대열에 합류할 것으로 예상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정도면 가히 <어벤져스> ‘광풍’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정확한 수치를 보면 <어벤져스> 광풍이 얼마나 강한 바람인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지난 25일(토)의 상황을 보자. <어벤져스>는 전체 2200여 개의 스크린 가운데 1,843개를 차지했고, 전체 관객의 90%, 전체 매출의 90%를 차지했다. 당일 흥행 1위 영화가 115만 명을 동원했는데, 2위는 고작 43,760명을 동원했을 뿐이다. 이렇게 되면 흥행 순위라는 것이 별 의미가 없어진다. 영화를 본 관객 10명 가운데 9명이 같은 영화를 봤고, 나머지 한 명이 여러 영화를 분산해서 본 것이니. 이 지독한 쏠림 현상.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영화 자체의 이야기보다는 영화 산업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산업의 기본 질서가 무너져 버렸기 때문에.

   
▲ 영화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 포스터
 

이 부분에서 비평가들은 난감해진다. 시장을 유지할 수 있는 기본적인 질서가 필요하다고 아무리 ‘떠들어봐도(?)’ 그 누구도,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이나 심지어 관객들도 듣지 않는 상황에서, 다시 스크린 독과점을 거론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그럼에도 스크린 독과점을 이야기해야 한다. 영화는 문화이다. 문화라는 말은 단지 소비하는 상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정신을 담고 있다는 뜻이다. 그 정신을 특정한 영화가 독점하도록 내버려 두면 결국 위험한 사회가 도래할 확률이 높아진다. 적어도 그럴 위험성이 다분하다. 기본적으로 독과점이 우려스러운 것은 이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 국민이 그렇게 떠받들고 있는 미국에서도 특정 영화가 이렇게까지 스크린 독과점을 하지는 않는다. 아직 미국에서 <어벤져스>를 개봉하지 않아 정확한 수치를 알 수 없지만, 미국에서 특정 영화가 전체 스크린의 10% 이상을 차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어벤져스> 역시 많아야 15%를 넘기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미국은 ‘자본주의 천국’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독점할 수 없도록, 다시 말해 다른 영화가 상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그러나 여기는 다르다. 그 작은 기회마저 철저하게 짓밟아버린다.

지금 극장가를 장악하고 있는 CJ, 롯데, 메가박스는 처음부터 극장업으로 영화계에 진출했다. 마치 대형마트처럼 전국 체인점으로 극장을 형성해 영화산업이 돈이 된다는 것을 그들은 체감했다. 이후 배급업에 뛰어들어 자신들의 극장에 영화를 스스로 배급했고, 더 나아가 투자, 제작으로까지 몸집을 부풀렸다. 이렇게 수직 계열화를 완성한 이들에게 영화산업은 돈을 벌어다주는 산업일 뿐이다. 물론 이것을 욕할 필요는 없다. 산업이라는 단어는 이익을 회수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으니까.

   
▲ 영화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 스틸컷
 

그런데 시장 질서를 해치면서 눈앞의 이익에만 눈이 멀다면 마땅히 비판해야 한다. 나는 지금 한국영화 산업이 이런 단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지금 한국영화의 하향평준화가 문제가 되는 것도 이들이 제작을 하면서 패기 있는 영화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나리오 작업에서부터 깊이 관여하면서 그렇고 그런 영화만 범람하는 시대가 되었지 않은가! 할리우드 직배가 끝난 시점에서 세 체인망은 할리우드 영화를 이 시장에 무한 공급하고 있다. 그것이 돈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최대한 좋은 시간에 최대한 많은 스크린을 관객들에게 열어놓는다. 그래서 ‘속전속결의 치고 빠지기’식 극장 문화를 만들어 놓았다. 이 방식이 여기서는 가장 돈을 벌기 쉬운 방식이라는 것을 그들은 몸으로 깨우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거대 체인망이 추구하는 전략이 문제가 많다고, 결국 한국영화도 죽이고 한국영화 문화도 죽인다고 말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당장 눈앞에 있는 자본의 증식에만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소리치는 것은 ‘소 귀에 경 읽기’가 아닐까? 그럼에도 소리쳐야 한다. 그것이 비평가의 임무이다. 전체 스크린의 30% 이상을 특정 영화가 차지하지 못하도록 법적으로 규제해야 하고, 특정 극장에 특정 영화가 절반 이상의 스크린을 확보할 수 없도록 법적으로 규제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특정 회사가 투자, 제작, 배급, 상영을 모두 관장하는 수직 계열화를 할 수 없도록 법적으로 규제해야 한다.

시장이 스스로 하지 못하면 제도적으로 보완해야 하는 것이 정상적인 자본주의 체제이다. 지금 한국영화가 위기인 것은 스크린 독과점, 수직 계열화와 무관하지 않다. 이 부분을 직시하고 다시 현실을 봐야 한다. 훗날 우리 후손들이 어떻게 한 편의 영화가 90% 이상의 스크린을 독점하고 90% 이상의 매출을 독점할 수 있었느냐고, 그 시대는 어떤 시대였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어떤 답을 할 것인가? 지금 한국에서 영화는 문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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