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권자인 OOO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OOO 씨를 KBS사장으로 선택한다면, 지난 1990년 4월 투쟁과 같은 불행한 사고를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과거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성명 일부분이다. 빈칸에 들어갈 알맞은 단어는 무엇일까. ①노태우-서기원 ②김대중-박권상 ③노무현-서동구 ④이명박-김인규. 나열된 보기 중 어떠한 것을 넣어도 문맥이 어색하지 않다면 최고 권력이 공영방송 사장 자리에 자기 인사를 ‘꽂고’ 싶어 했다는 방증 아닐까. 

사실 그랬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공영방송사 사장 자리는 대부분 청와대가 좌지우지해왔다. 민주정권인 김대중, 노무현 정부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정답은 ③번이다.

KBS, 독재 권력 전리품

박정희·전두환 독재 정권은 KBS 사장을 노골적으로 내리꽂았다. KBS 초대 사장인 홍경모(1-2대, 1973년 2월~1979년 2월), 3대 최세경(1979년 2월~1980년 7월), 6대 박현태(1985년 2월~1986년 8월)사장은 문공부 차관 출신이다. 7대 정구호 사장(1986년 8월~1988년 11월)은 5공 청와대 대변인을 지내고 KBS로 왔다.

1980년 임명된 한국일보 출신 이원홍 사장(4-5대, 1980년 7월~1985년 2월)은 KBS 사장에서 신군부 정권 문화공보부 장관으로 ‘영전’했다. 그는 KBS입성 때 ‘죽음의 사자’, ‘괴벨스’라는 별칭이 붙던 인물이다. 그는 땡전뉴스를 앞세웠고, KBS내 양심 언론인을 내쫓았다. 탤런트 박용식씨가 전두환 대통령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TV출연 금지를 당한 것도 이 사장 작품이다.

   
▲ 이원홍 KBS 사장(왼쪽)과 이진희 MBC 사장의 모습. 두 방송사 사장은 ‘땡전뉴스’로 군부정권에 충성 경쟁을 했다. ⓒ연합뉴스
 

87년 민주화 이후 방송사 노동조합이 출범하면서 사내 민주주의와 공정 보도에 대한 열망은 커졌다. 제도도 뒷받침됐다. 자율적 의결기구 KBS 이사회가 생겨 사장 임명 제청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허울에 불과했다. 8대 서영훈 사장부터 지난 길환영 사장까지 ‘민선’ 사장은 모두 9명이었는데, 임기를 다 채운 사장은 서기원, 김인규 사장뿐이다. 홍두표, 박권상 사장은 연임에 성공했으나 정권이 바뀌자 자진 사퇴했다. 정연주 사장은 MB정부에 의해 강제 해임됐다.

다만 독재정권 시기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노동조합이 출범하면서 낙하산 사장과 정면으로 맞서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은 1990년 4월 낙하산 사장 반대 투쟁이다. 방송민주화라는 부푼 꿈을 품은 KBS 조합원들과 방송통제에 정권 운명을 건 노태우 정부의 한판 대결이었다. 

노 정부는 노조에 우호적이던 서영훈 사장을 내쫓고 5공 청와대 대변인 출신 서울신문 서기원 사장을 신임 사장으로 임명했다. 이후 출근 저지 투쟁 등 반발이 커지자 KBS 요청으로 1990년 4월 12일 경찰 병력이 KBS 사내에 투입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경찰 1000여 명은 171명의 사원을 연행했다. 무기한 제작거부 투쟁이 계속되자 4월 30일 경찰 병력 1000여 명이 들이닥쳐 저항하는 사원 333명을 연행해갔다. 한겨레신문을 제외한 언론의 편파 보도와 구성원간 내부 분열 등으로 KBS사원들은 제작거부 38일 만에 방송에 복귀했다. 

   
공영방송 낙하산 사장 계보도. 김유리 김도연 안혜나 제갈인혜 기자.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DJ·노무현이라고 다를까

민주정부라 불리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역시 낙하산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통합방송법 제정 당시 공영방송 중립성을 위해 KBS 사장에 대한 대통령 임면권을 임명권으로 바꾸었으나 낙하산 사장 논란이 일기는 마찬가지였다. 1998년 KBS 이사회 호선 절차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김대중 정부가 합동통신 기자 출신 박권상(1998년 4월~2003년 3월)을 차기 사장으로 낙점한 것이 대표적이다. 

박 사장은 제5공화국이 단행한 언론통폐합으로 인해 강제해직됐다 복귀한 언론인이었다. KBS노조는 그의 개혁성에 기대를 걸어보자는 심산으로 입장을 정리했으나 구성원 불만은 커져만 갔다. 언론개혁 차원에서 조선일보 등을 집중 조명한 프로그램 ‘이제는 말한다’ 편성을 경영진이 거부하는 등 노사 갈등의 골은 깊어만 갔다. 박 사장도 정권이 바뀐 2003년 임기를 1년 앞두고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 김인규 전 KBS 사장(왼쪽, 2009년 11월~2012년 11월)과 정연주 전 KBS 사장(2003년 4월~2008년 8월). 정 전 사장은 노조와 시민단체의 추천을 받아 임명된 인사다. 김 전 사장은 MB 언론특보 출신이었다. MB정부는 사정기관을 총 동원해 정 전 사장을 몰아내고, 이병순에서 김인규 사장으로 이어지는 친정권체제를 확고히 했다. (사진 = 언론노조 이기범, 미디어오늘 이치열)
 

노무현 정부도 서동구 사장(2003년 3월~2003년 4월) 임명으로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서 사장은 경향신문 출신으로 노무현 대통령 대선 캠프 언론정책 고문을 맡았던 사람이다. 노 정부도 KBS사장 자리에 대해 ‘선 내정 후 제청’의 공식을 밟은 것이다. 권력 측근으로는 방송 독립성을 지킬 수 없다고 판단했던 노조와 시민사회단체가 사장 공동추천위원회를 발족해 당시 이형모 전 KBS 부사장, 성유보 민주언론시민연합 이사장, 정연주 한겨레 논설주간 등 3인을 새 사장 후보로 이사회에 추천했으나 KBS 이사회는 서동구를 임명제청했다. 언론노조는 “(서동구 임명제청은) 민주주의 기본을 부정한 것”이라고 반발했다. 

언론노조 KBS본부가 파업 돌입 태세를 갖추자 서동구 사장은 4월 2일 전격 사표를 제출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사표를 수리했고, KBS 이사회는 임시 이사회를 열어 정연주 한겨레 논설주간을 KBS 신임사장(2003년 4월~2008년 8월)으로 임명제청하기로 의결했다. 2008년 MB정부는 감사원, 검찰, 방송통신위원회, 국세청 등을 통해 그를 압박하고 해임함으로써 ‘언론장악’의 포문을 열었다. 

1988년 KBS노동조합 설립 당시 입사 3년차 PD였던 현상윤 전 KBS PD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도 대통령 의중이 반영된 사장이 임명됐다”면서도 “박 사장의 경우 보수적 성향으로 KBS 구성원과 마찰을 빚기도 했지만 외압에서는 자유로운 편이었다”고 했다. 현 전 PD는 “정연주 사장 시절 외압은 없었다”며 “정 사장은 내부 구성원 의견을 적극 반영해 KBS를 운영했다. 뉴스 보도와 방송 제작 아이템에 아래로부터 의견이 상당히 많이 반영됐다”고 술회했다. 

MB정부 하에서 임명된 이병순(2008년 8월~2009년 11월), 김인규(2009년 11월~2012년 11월), 길환영 사장(2012년 11월~2014년 6월) 모두 KBS 내부 인사였다. MB 대선캠프 언론특보였던 김인규 사장을 제외하면 겉으로 낙하산 인사가 아닌 듯하나 여야 7대4로 쏠린 KBS 이사회에서 권력에 독립한 사장 선임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길 사장은 지난해 세월호 침몰사고 국면에서 ‘청와대 보도 개입’ 논란이 불거져 해임됐다. 

위아래로 압박받던 MBC 사장들

MBC 사장직도 독재 정권 전리품이나 다름없었다. 9-12대 이환의 사장(1971년 6월~1980년 7월)은 5·16장학회 상임이사 출신이었고, 13대 이진희 사장(1980년 7월~1982년 6월)은 KBS 이원홍 사장과 함께 신군부에 충성 경쟁을 했다. 그는 82년 5월에서 85년 2월까지 문화공보부장관을 지냈다. 앞서 말한 KBS 사장 이원홍 장관 전임이었다. 14-15대 이웅희 사장(1982년 6월~1986년 2월)도 청와대 대변인 출신이다. 

언론노조 MBC본부는 지난 2010년 김재철 사장(2010년 2월~2013년 3월) 임명을 앞두고 낸 노보에서 16대 황선필 사장(1986년 2월~1988년 8월)과 17대 김영수(1988년 11월), 18-19대 최창봉(1989년 2월~1993년 3월), 20-21대 강성구(1993년 3월~1996년 6월) 등을 ‘낙하산 인사’로 규정한 바 있다.

황선필 사장은 정두환 정권 대변인을 하다 1986년 MBC 사장에 임명됐다. 1987년 결성된 MBC노조는 황 사장에 대해 “MBC를 정부 홍보기관의 늪 속으로 더욱 함몰되게 한 정치권력의 주구이다. 또한 그는 소위 TK사단 중심의 파벌주의를 형성해 청와대, 군 출신 등 숱한 낙하산 인사로 불신을 조장해 왔다”고 비판했다. 야당 후보 얼굴이 알려지지 못하도록 뉴스에서 야당 후보 뒷모습이나 손가락만 찍어 내보내라고 지시할 정도로 간섭과 개입이 심했다. MBC노조는 공정방송 사수를 기치로 내걸어 1988년 방송사 최초로 파업에 돌입했다. 황 사장은 파업 사흘 만에 사퇴했다. 

뒤를 이은 TK출신 김영수 사장도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으로서 서울신문에서 MBC로 온 낙하산 인사였다. 구성원들은 “언론 민주화를 표방하고 있으면서도 속으로는 여전히 방송언론을 장악하려는 의도를 버리지 못하는 제6공화국 허구성을 규탄한다”며 관선 이사진 선임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김 사장도 일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 최창봉 사장은 1990년 9월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을 비판적으로 다룬 의 ‘농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다’ 편을 방송 몇 시간 전에 불방 결정을 내렸다. 사측은 불방 사태에 항의한 안성일 노조위원장과 김평호 사무국장을 해고했다. MBC노조가 1992년 ‘50일’ 파업에 돌입하게 된 배경이다. ⓒ언론노조 MBC본부
 

1989년에 임명된 최창봉 사장은 방송문화진흥회법에 의거해 임명된 최초 사장이자 전문 방송인 출신이었다. 노조는 선임 절차상 하자를 문제 삼으면서도 “방송사 운영에 대한 민주화 의지를 예의주시할 것”이라고 유보적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그 역시도 권력의 “외풍에 힘없이 무너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최 사장은 1990년 9월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을 비판적으로 다룬 의 ‘농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다’ 편을 방송 몇 시간 전에 불방 결정을 내렸고, 1991년 1월부터 방송됐던 사회 고발성 대하드라마 ‘땅’도 경영진의 일방 지시로 조기 종영시켰다. 사측은 불방 사태에 항의한 안성일 노조위원장과 김평호 사무국장을 해고했다. 노조가 1992년 ‘50일’ 파업에 돌입하게 된 배경이다. 

청와대 주인 교체되면 스스로 사퇴?

문민정부 이후부터는 MBC 내부 인사들로 사장직이 채워졌다. 1993년 사장에 임명된 강성구 사장은 32년 사상 처음으로 공채 출신 인사였으나 그도 ‘땡전뉴스’ 꼬리표가 뒤따랐다. 1996년 강 사장 연임에 김영삼 대통령 차남 김현철씨가 개입한 의혹이 불거져, 노조는 또다시 사장 퇴진을 촉구하는 파업에 돌입했다. 사측은 파업 15일째 노조위원장과 집행부 전원을 고소했고, 파업 종료 후엔 위원장 해고·집행부 정직 처분을 했다. 연임이 결정된 뒤 석달 동안 조합원들의 투쟁이 이어졌고, 강 사장은 사퇴서를 제출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임명된 개혁 성향인 김중배 사장(2001년 3월~2003년 3월)은 한국일보 출신으로 동아일보 편집국장, 한겨레신문 사장 등을 거친 신문 쪽 인사였다. 그는 개혁적으로 방송사를 운영했지만 임기 2년을 놔두고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자 돌연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럼에도 민주정부는 이전 정부와 다르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7년에 입사한 조능희 언론노조 MBC본부장은 내부 자율성을 꼽았다. 조 본부장은 정권의 낙하산 인사를 인정하면서도 “방송 제작 자율성이 보장이 됐던 시기로 정치권력과 자본에 대한 비판이 여타 정권에서는 굉장히 어려웠지만 간부와 구성원간 언로가 트였고, 의견이 수렴되는 과정이 있었다”고 했다. ‘송두율과 국가보안법 편’, ‘황우석 편’ 등을 대표 사례로 꼽았다.

이후 MBC 사장은 이긍희(2003년 3월~2005년 2월), 최문순(2005년 2월~2008년 2월) 사장으로 이어졌고, MB정부 들어 엄기영(2008년 2월~2010년 2월), 김재철(2010년 2월~2013년 3월), 김종국(2013년 5월~2014년 2월), 안광한(2014년 2월~현재) 사장이 자리를 이어가고 있다. 김재철 사장 재임기 언론노조 MBC본부는 공정보도를 요구하며 170일 파업을 강행했다. 이 과정에서 해고된 언론인만 6명이었다.

   
▲ 역대 공영방송 사장은 끊임없이 낙하산 논란에 시달렸다. 민주정부도 마찬가지였으나 운영 면에서는 차이가 확연했다.
 

정권의 시녀 벗어나려면

공영방송 사장의 역사는 잔혹사라 부를 만하다. 권력으로부터 흔들리거나 스스로 정권의 입을 자처했다. 개혁성을 인정받던 사장도 정권이 바뀌면 자진 사표를 던지고 자리를 떠났다. 아니면 버티다 해고됐다. 보도 공정성이 무너지면 구성원의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최고 통치자가 누구냐에 따라 방송사 공정성이 결정되는 구조다. 

김승수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방송과 언론에서 모든 대통령 권한을 내려놓도록 해야 한다”며 “현재는 대통령이 감시 대상이 아니라 대통령의 낙하산이 방송사 보도를 감시하는 구조”라고 밝혔다. 김 교수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잘못”이라며 “그 당시 KBS와 MBC 덕을 보겠다고 그 권력을 놓지 못했다. 야당이 정권을 잡기가 쉽지 않은데 지배구조 문제를 해결했어야 했다”고 비판했다. 

추혜선 언론개혁시민연대 정책위원장은 “방송사 지배구조 개선이 공영방송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느냐 마느냐 기로에 놓여있는 시점”이라며 “대의제 민주주의를 통한 사장선임 구조를 안착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 이 기사는 새언론포럼 <현장기록, 방송노조 민주화운동>, 강준만 저 <한국현대사산책> <한국대중매체사>, 연합뉴스 <한국인물사전>, 언론노조 KBS본부·MBC본부 노보 등을 참고했습니다. 

해외에선… 정부 입김 피하는 제도적 장치 마련

◎영국 BBC - 공영방송 이사회가 전권 행사 
영국 BBC 사장은 공영방송 이사회인 BBC트러스트에서 결정된다. 사장 선임과 관련해 전권을 위임받는 BBC트러스트는 12명으로 구성된다. 이중 4명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 지역을 대표한다. 이들은 공개 모집을 통해 선발돼 문화부 장관추천, 왕이 임명해 정파 논란을 피하도록 했다. 임기는 5년이다. BBC트러스트는 공개 모집을 통해 사장 후보를 모집하며 언론 공개를 통해 국민적인 검증을 걸쳐 사장에 임명한다. 

◎일본 NHK - 특별다수제 도입 
일본 NHK의 사장 선임 방식은 특별다수제로 요약된다. NHK의 경영위원회는 공공성·중립성 확보를 위해 존재하는 최고 의사결정 기관이다. 12명으로 이뤄진 경영위원은 일본 8개 지역 대표와 전국 단위 4명으로 구성한다. 특정 정당 당원이 5명을 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사장은 12명 중 4분의 3 이상 동의를 얻어야 선임된다. NHK는 사장 자격조건에 공무원 임용 조건을 적용한다. 동시에 방송기기 제조·판매업체 관계자나 방송사·케이블TV 등의 법인임원 사퇴 1년 이하인 경우 사장이 될 수 없도록 했다. 

◎독일 ZDF - 독립적 방송위원회 
복수의 공영방송을 가진 독일은 방송위원회가 사장과 부사장의 임면권을 갖는다. 방송위원회는 방송사 별로 설치되는 독립적 감독기관이다. 방송위원회는 77명으로 이뤄진다. 정당·사회단체·종교단체 등 다양한 이해집단 대표가 참여한다. 보통 사장·부사장 임면은 재적인원 3분의 2 이상 출석에 과반수 찬성을 얻어 의결한다. ZDF의 경우 재적 3분의 2 이상 참석에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선출되는 구조로 특정 집단이 강한 영향력을 미치기 어려운 구조다. 

 

<편집자주>

미 디어오늘이 오는 5월 창간 20주년에 맞춰 저널리즘의 미래를 고민하는 20회 연속 기획 시리즈를 내보냅니다. 미디어 산업의 전통적인 수익 기반이 붕괴되고 콘텐츠 플랫폼이 다변화하면서 주류 언론의 의제설정 기능이 약화되고 생존을 위한 경쟁에 매몰되면서 급기야 저널리즘의 근간이 위협을 받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이 기획 시리즈는 한국 언론의 현실을 진단하고 퇴행적인 일련의 변화를 비판하고 혁신과 대안을 모색하는 순서로 진행합니다. 창간 20주년, 미디어오늘은 언론 보도의 이면과 팩트 너머의 진실을 파고드는 정직한 감시자, 언론의 언론으로서의 역할을 강화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지지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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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뉴스, 가격 없는 상품의 딜레마.
(02) 온라인 저널리즘이 불러온 재앙.
(03) 붕괴하는 광고 시장, 추락하는 저널리즘.
(04) 현장에 기자들이 없다.
(05) 퇴행적인 취재 시스템.
(06) 차별성 없는 콘텐츠.
(07) 신문시장의 구조적 위기.
(08) 방송의 통신 종속.
(09) 무늬만 뉴스 도매상, 연합뉴스.
(10) 뉴스 구독 행태의 변화.
(11) 콘텐츠 수익모델 다변화.
(12) 뉴스 다양성과 경쟁력 확보.
(13) 기자 재교육과 전문성 강화.
(14) 기자의 미래.
(15) 공영방송 제자리 찾기.
(16) 신문읽기 교육의 현재와 대안.
(17) 뉴스룸 쇄신, 조직의 동력을 바꿔라.
(18) 대안 언론의 등장과 주류 언론의 틈새 시장.
(19) 에버그린 콘텐츠를 찾아라.
(20) 저널리즘의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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