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디 만수야, 얼쑤패 피습사건이 아직까장 해결이 안 된 모양인디, 무민국 전 의원이 도와준 게 있남?”

김만수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던 이순신이 물었다.

“사건이 발생했던 1988년엔 무민국 전 의원이 큰 도움을 주진 못했지만 최근에 그 사건 변론을 맡어주겠다고 먼저 제안을 했다고 허던걸요.”

“무민국 전 의원이 변론을 맡겠다고 몬자 제안을 힜다고?”

김만수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이순신의 입이 쩍 벌어졌다.

“어따 참말로 얼쑤패가 대단헌 단첸가 본디 고런 단첼 이끌어가는 박정기를 니가 어떡기 알게 됐는지 고것도 참 궁금허네 잉?”

조수석에 앉아 있는 김만수가 차창을 열고 담뱃불을 붙인 뒤 박정기와 어떻게 만났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형님, 제 처가 방송작가잖아요.”

“고건 나도 잘 알고 있는디, 제수씨가 방송일을 허다가 박정기를 알게 된거여?” 

“네, 작년 봄에 첨 만나서 가깝게 지내는 관곈데요. 형님, 아까 마포대교 건너기 전에 SBC방송국 보셨죠?”

“거 여의도공원 옆에 있는 고 방송국이 SBC 아녀?”

“네, 맞습니다. 고 건물 뒤편에요. 밤섬오피스텔이 있는데, 그 건물 3층에 김산연구회 사무실이 있거든요.”

“김산연구회?”

“네, 1985년에 창립된 단첸데 아리랑 연구가인 황운규씨가 회장을 맡고 있구요. 정기 형은 거기 회원인데, 제 처가 그 김산연구회 사무실을 방송 취재 차 찾어갔다가 우연히 만남이 이루어졌구만요.”

“먼일로 거길 취재허러 갔는디?” 

“제 처가 작년 삼일절 특집으로 삼일운동허고 아리랑을 주제로 헌 다큐멘터리 제작을 허게 됐는데,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 혁명가인 김산의 업적을 취재하려고 거길 들렀네요.”

차 안에 가득 찬 담배연기가 싫은지 이순신이 뒷좌석 창문을 활짝 열며 다시 물었다.

“너그 처가 취잴 가는디 너도 동행혔남?”

“네, 그날이 2월 둘째준가 셋째주 일요일이었는데요. 제 처가 혼자서 차를 타고 집을 나서려고 하는데, 아 글쎄 큰 애 다솜이는 가만있는데요, 둘째 다함이 이 녀석이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난리를 치지 뭡니까. 그래서 제가 운전을 하고 구리에서 서울로 넘어왔는데요. 여의도에 도착해서 제 처를 김산연구회 사무실로 들여보내고 애들 둘을 데리고 63빌딩에 가서 쇼핑도 허고 여기저기 관람도 허는데, 아 또 다함이 이 녀석이 울기 시작하는데 이거 정말 미치겠더만요.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김산연구회 사무실로 찾아가게 됐구만요.”    

“거 참 너그 부부허고 박정기의 만남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리것다만 참 벨시럽기 이루어졌네 잉?”

“그러게 말입니다. 인연이 있으면 만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나게 되는 모양인데, 거기서 그렇게 만난 정기형 허고 저희 부부가 금방 친해진 건 고향이 같은 전라도라서 그랬던 건데요. 초면에 저녁도 같이 먹고 술도 한 잔 허다보니 호형호제하게 되었는데, 아무튼 간에 그 날 이후로 저희 부부허고 정기 형은 한 달에 서너 번 씩 만날 정도로 매우 가깝게 지내고 있고만요.”

김만수의 말을 듣고 있던 이순신이 앞좌석 거울에 비친 택시 기사의 표정을 살핀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기사님! 조수석에 있는 저 동생이요, 얼쑤패 박정기라는 사람허고 같은 전라도라서 곰방 친해졌다는디, 이 시상에 지연이나 혈연이 읎는 나라는 읎겄지요?”

이순신이 이렇게 묻자 택시 기사는 바로 대꾸했다.

“암만요 암만. 저도 택시 운전을 헌지가 오래 됐는디 두 분 사장님만치로 전라도 사투릴 쓰시는 손님이 차에 타면 맹삭읎이 반갑고요. 멫 마디 야글 나누다 보믄 곰방 친해지더만요.”

“머 저도 전방서 군대생활을 허고 서울서 멫 년 직장생활을 험서러 전라도 사람을 만나믄 맥읎이 반갑고 곰방 정이 들던디, 팔이 안으로 굽는 건 어쩔 수 읎나 봅디다요.”

“그러게 말여요. 전라도 깽깽이로 태어난 죄로 무시 당헐 때도 많고 손해를 볼 때도 많았지만 누가 고향이 으디냐고 물으믄 난 당당허기 전라도라고 대답험서러 살고 있네요. 근디 으떤놈들은 출세허고 지 밥그륵을 지키것다고 심지어 호적까지 바꿨다고 허던디 참 한심헌 놈들이 아닌가 싶네요.”

그런 놈들이 더럽다는 듯 택시 기사는 차창 밖으로 침을 뱉었다. 택시가 신촌역 근처에 이르렀을 때 이순신이 다시 물었다. 

“저기 기사님은 향우회 같은 디는 안 나가쇼?”

“내 신세가 이러다봉게 사실 중학교 동창회나 면 향우회에 멫 번 나가다가 발걸음을 뚝 끊은 지 오래 됐는디요. 가진 것도 읎고 잘 난 것도 읎으믄 학연도 지연도 다 필요 읎더만요.”

택시 기사의 한탄에 이순신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리자, 김만수가 입을 열었다. 

“저기 기사님, 동창회나 향우회를 나가도 온통 정치판이죠?”

“나야 머 순창향우회에 단 한 번도 나간 적이 읎어서 거긴 어떡기 돌아가는지 잘 모리것소만 가끔 향우회에 댕겨 오는 손님들을 차에 태울 때가 있는디요. 고 사람들 허는 얘길 가만히 들어보믄 으떤 향우회는 말이요, 정치인들 사조직이나 다름 읎는 모양이던디, 허이고 참말로 이 나라 정치인들 문제요, 문제!” 

혀를 차던 택시 기사가 조수석의 김만수를 슬쩍 쳐다보았다.

“앞에 계신 사장님, 저도 들은 풍월이 있어가꼬 얼쑤패가 으떤 단첸지 쪼까 아는데요. 작년에 으떤 신문에 말이요, 얼쑤패가 임대료를 낼 돈이 읎어가꼬 문을 닫기 생겼다는 독자투고가 실렸던디, 다행히 아직까장 문을 닫지 않은 모양이네요?”

“네, 다행스럽게도 문을 닫진 않았지만 매달 사비를 털어 넣으면서 근근이 꾸려 가느라 정기 형이 많이 힘들어 하는데요.”

1984년 3월 영화, 국악, 민요, 사진 등 6개 소모임의 집합체로 창립된 얼쑤패의 좁은 사무실은 민주화 세력이 문화강습을 받던 공간이었다. 당시만 해도 서울 도심 한복판에 그런 공간이 드물었다. 그래서 재야에서 활동하던 많은 예술가들이 서울 신촌역 앞에 들어선 얼쑤패 사무실을 대중과 만나서 소통하는 공간으로 삼았다. 더욱이 박정기는 운동권의 어느 계파에도 소속되지 않아 얼쑤패 사무실엔 소속이나 조직에 상관없이 다양한 젊은이들이 드나들었다. 

얼쑤패는 1985년에 김지일의 담시를 소리꾼 임진석이 재창작한 ‘똥나라’를 초연했다. 그 해 유길준은 젊은이들을 위한 한국미술사를 강의했다. 술집이 즐비한 신촌에 문을 열고 이런 활동을 펼쳤던 얼쑤패는 우리 문화의 맛과 멋을 깨닫기 시작하는 대학생들에게 단소, 판소리, 풍물, 대동놀이, 마당극 등을 보급했다. 그런가하면 얼쑤패 사무실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살자!’고 외치던 전대협 등 운동권의 은신처이자 큰일을 비밀리에 기획하는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얼쑤패는 늘 정권의 감시를 받았다. 1986년 1월 서울시교육위원회는 설립인가도 받지 않고 전통문화를 가르쳐 사회교육 질서를 문란하게 했다며 얼쑤패에 폐쇄명령을 내렸다. 1988년 피습사건 이후 쇄락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1990년대 들어 전통문화운동의 열풍도 식어가고 대학가의 문화도 급변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얼쑤패 사무실에 드나드는 사람도 크게 줄었다. 그런 상황에서 임대료까지 오르게 되자 얼쑤패는 재정난 때문에 패쇄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지난해 9월 D일보, H신문 등 몇몇 일간지엔 얼쑤패 폐쇄 위기를 걱정하는 독자투고가 실렸다. 향락의 거리로 변해 버린 신촌에서 우리 소리와 우리 가락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전통문화 정립에 앞장서 온 얼쑤패가 임대료 등 관리비를 낼 수 없는 딱한 사정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이었다. 문화강습과 발표회 등을 통해 우리 스스로 우리 전통문화의 뿌리를 찾고 계승 발전시켜 나가야 된다고 주장해 온 얼쑤패를 함께 힘을 모아 되살려 보자는 호소문이었다. 신촌거리에 꼿꼿하게 버티고 서서 마치 흥선대원군처럼 서양문물과 맞서던 얼쑤패가 비싼 건물 임대료 때문에 문 닫을 위기에 내몰리다보니 예서제서 쏟아져 나온 탄식이었다. 하지만 전통문화가 설 땅과 마당을 잃게 되었다고 한탄하는 몇몇 사람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물론 아직 얼쑤패의 강습공간은 없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박정기는 정신적으로 외롭고 경제적으로는 궁핍하다. 지인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어렵게 살고 있는 그를 걱정하며 얼쑤패를 그만 접으라고 충고했다. 다른 일을 모색해 보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충고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역정을 냈다. 그러다 올해 초 교통사고로 뇌출혈을 일으켰다. 이후 간질증세를 보이고 있는데, 가끔씩 극단적이고 공격적인 언행을 서슴지 않고 있다. 원래 그는 여리고 순수했지만 최근 들어 그의 성격은 매우 거칠고 난폭해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박정기는 대학로에도 신촌에 있는 얼쑤패 사무실 같은 문화공간을 마련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10년 동안 전통문화 부흥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올 초엔 연세대 근처 Y빌딩에서 매월 하루씩 문화교실을 열고 있는데, 이 강좌에 무민국이 출강해 생활법률을 강의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무민국은 얼쑤패 피습 사건의 변론을 맡겠다고 나섰다. 무민국과 박정기 두 사람은 특별히 뭔가를 도모하겠다는 목적의식 때문에 어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남극의 황제펭귄들처럼 서로 몸을 맞대고 혹독한 시련을 견디는 강한 연대 속에서 두터운 동지애를 다져 나가고 있는 듯 했다.  

“순신이 형님, 한 가지 부탁을 좀 헙시다.”

이순신이 머리를 뒤로 돌려 입을 연 김만수를 쳐다보았다. 

“얼쑤패 대표인 정기 형은 저 보다 한 살이 많은데요. 심성은 착합니다만 성격이 괴팍한 부분이 있으니 있다가 정기 형을 만나서 고 양반 거친 말투 때문에 혹시 속상한 점이 있어도 형님이 꾹 참으시고 절대 상처 받지 마세요.”

김만수의 당부에 이순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기 형은 지난 겨울 눈길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뇌에 약간 출혈이 있었는데요. 다행히 수술이 잘 돼서 몸은 멀쩡헙니다만 가끔 간질 증세를 보이고 있네요.”

“머? 간질이라믄 갑자기 쓰러져가꼬 입에 기거품을 물고 벌벌 떠는 벵인디, 고런 간질벵을 박정기가 앓고 있다고야?”

“예, 그런데다가 성격까지 예전 같지 않아 참 걱정이네요.”

“듣고 봉께 참 짠헌디, 고 양반을 돌봐 줄 가족이나 친척이 주변엔 없다냐?”

“피붙이는 대부분 광주에 있긴 헙니다만 정기 형이 보통사람들처럼 살지 않다보니 형제들도 다 떠나버린 모양입디다. 그래서 서울서 혼자 살고 있는데 돈도 없고 먹는 것도 부실허다보니 요즘 몸이 부쩍 쇠약해졌구요, 신경도 날카로워졌고만요. 근데...”

박정기의 근황을 설명하던 김만수가 울컥 올라오는 울분 때문인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만수야, 어쩌그냐?”

“글쎄, 참 괜찮은 인물인 것 같은데요. 세상 사람들이 하나 둘씩 떠나고 경제적으로 힘들다보니 정기 형이 많이 위축돼 있는데 옆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파서 그러네요.”

“안타까운 일이긴 허다만 너무 상심허지 말고 너라도 옆에서 잘 챙겨줘야 될 것 같은디. 근디 만수야, 가만 봉께 너 박정기를 친성지간 만큼이나 끔찍허게 생각허는 모양이다 잉!”

“사실 그런데요. 형님도 아시겠지만 저도 뭐 가방끈이 긴 게 아니잖어요. 그러고 인맥이 넓은 것도 아닌데, 정기 형은 제게 세상살이를 많이 가르쳐 주구요. 또 이 사람 저 사람 소개시켜 주면서 인맥도 많이 넓혀주고 있는데, 솔직히 말허면 정기 형은 제 정신적 지주고만요.”

“머 정신적 지주?”

어이가 없다는 듯 이순신이 큰 소리로 물었다.

네, 나이 차이는 거의 없지만 난 정기 형을 스승처럼 여기고 있는데요. 저기 형님, 민중현 신부 아시죠?”

“고 거리의 신부님 말이냐?”

“네, 그 신부님도 정기 형허고 허물없이 지내는 사인데요. 지난해 가을 정기 형이 제게 민 신부님을 소개시켜 줘서 자주 찾아 뵙고 있네요.”

“만수 니 말을 듣다 봉께 박정기 고 양반, 결코 간단헌 인물이 아니네 잉?”

“네, 결코 간단헌 인물이 아닌데요. 얼쑤패 피습사건으로 인해 정기 형의 인생은 많이 무너졌지만요. 그 사건이 우리나라 민주화운동과 민족문화운동에 미친 영향이 대단한데요. 형님, 혹시 한예총이라고 들어 보셨나요?”

“글씨 으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다만...”

“저기 한예총은요, 한민족예술인총연합이라는 단첸데, 이 단체도 그렇지만 얼쑤패 피습사건 이후에 또 하나의 단체가 탄생했는데, 요즘 텔레비에도 많이 나오고 신문도 많이 나오는 그 시민 단체 있지요, 경민련이라고.”

“경민련은 많이 들어봤는디, 뭐냐 거 경제민주화실천시민연합인가 허는 고 단체 아녀?”

“맞습니다. 그 경민련도 얼쑤패 피습사건 여파로 만들어진 것인데, 형님, 어떤가요? 정기 형이 보통사람은 아닌 것 같지요?”

“암만 암만, 아까 니가 서강대학교 근방을 지날 때 박정기는 제도권 밖의 무민국이라고 힜던 것 같은디, 그 말이 딱 맞는 표현이고만 그려!”

이렇게 말하고 난 뒤 이순신은 걸출한 인물 한 사람의 역량이 얼마나 큰 지 헤아려 보았다. 그러면서 서해훼리호 참사를 수습하고 있는 영민국 정권엔 어떤 인물들이 포진돼 있는지 따져보았다. 청와대와 여당, 그리고 장․차관 중에 자신을 포함한 위도인들이 믿고 따르며 존경할 만한 인물은 거의 없는 듯 했다.   

“아까 봉께 한강은 참 도도하게 흐르던디 그 도도헌 강물은 누구 편인 것이여? 돈도 쥐고 권력도 쥐고 있는 이 땅의 잘 먹고 잘 사는 놈들 편이여, 아니믄 읎어도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 편인 것이여 잉!”

이순신이 이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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