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에도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이런 가사가 있지 않습니까. 즐거우나 괴로우나 항상 나라 사랑해야 되고. 최근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에도 보니까 부부싸움 하다가도 애국가가 들리니까 국기 배례를 하고. 그렇게 우리가 해야 이 나라라는 소중한 우리의 공동체가 건전하게 어떤 역경 속에서도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박근혜 대통령이 영화 ‘국제시장’을 보고 난 뒤 청와대 회의에서 했다는 말이다.

섬뜩한 기시감이다. 197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3선 개헌으로 가까스로 정권 연장에 성공한 뒤 영화관에서 애국가를 상영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72년에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암송하게 하라는 문교부 지시가 내려왔고 학생들에게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라고 지시한 주일학교 교사가 구속되는 일도 벌어졌다. 그리고 그해 10월, 유신이 시작된다. 국기에 대한 경례는 1989년에서야 폐지됐다.

‘국제시장’의 국기에 대한 경례 장면은 전체주의 병영국가로 치닫던 그 엄혹한 시절에 대한 풍자다. 박 대통령이 여기서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의 메시지를 읽었다면 황당할 뿐만 아니라 매우 위험하다. 세월호 1주기를 앞두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민심을 외면하고 우리 국민들은 왜 나라를 사랑하지 않느냐고 탓하는 꼴이다. 군사독재 시절의 퀴퀴한 냄새가 난다. 심지어 행정자치부는 태극기 게양을 의무화하는 법 개정을 준비하고 있다.

이 끔찍한 농담을 ‘다큐’로 받은 사람이 또 있다. 지난달 30일 박노황 연합뉴스 신임 사장이 직원들을 모아놓고 국기게양식을 거행했다. “국가기간뉴스통신사인 연합뉴스의 정체성과 위상을 구성원 모두가 재확인하는 자리“라는 박 사장의 연설도 있었다. 박 사장은 취임과 함께 편집총국장제를 없애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편집총국장은 2012년 연합뉴스 파업 때 편집권 독립을 위해 단체협약으로 마련된 장치다.

영국의 문필가 사무엘 존슨은 박노황 같은 사람을 두고 일찌감치 “애국심은 악당의 마지막 도피처”라고 비꼬았다.

박 사장은 자신을 사장으로 낙점한 정부에 노골적으로 충성 시그널을 보내고 있다. 해마다 350억원 이상의 정부 지원금을 받는 연합뉴스를 국영이나 관영 통신사라고 부르지 않는 건 정부가 보도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다. 박 사장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연합뉴스의 공정성과 독립성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쳤다.

가뜩이나 연합뉴스는 뉴스 도매상으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뉴스 생태계를 무너뜨리는 장본인으로 비난받고 있다. 연합뉴스가 생존의 대안으로 정권과의 결탁을 모색하고 어설프게 코드를 맞추려 시늉한다면 그건 연합뉴스의 몰락을 가속화하는 자충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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